김수녕

덤프버전 :

김수녕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김수녕
金秀寧 | Kim Soonyung


파일:하계올림픽김수녕3.png

출생
1971년 4월 5일 (53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대미초등학교 (졸업)
청주중앙여자중학교 (졸업)
청주여자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스포츠산업경영학 / 석사)
종목
양궁
소속
선수
예천군청 (1999~2002)
해설
MBC (2004~2014)
신체
164cm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어린 시절
2.2. 1988년
2.3. 1989년~1991년
2.4. 1992년
2.5. 1999년
2.6. 2000년
3. 은퇴 이후
4. 평가
5. 수상 기록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양궁 선수로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획득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올림픽 최다 금메달 기록(4개)[1]이며 동시에 최다 메달 기록(6개)이다.[2]


2. 선수 경력[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971년 4월 5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여기 저기를 이사다니다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이 청주시였다. 여기서 양궁에 입문했고, 소년체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양궁 신동의 등장이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청주여고 1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가 되었다.

2.2. 1988년[편집]


불과 만 17세의 여고 2학년생으로 처음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 개인전 금메달,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2관왕에 올랐다.[3] 서울 올림픽 당시 양궁 개인전은 30m, 50m, 70m, 90m 거리별 성적을 합산해서 메달 색깔을 가리는 방식이었는데, 총점 344점을 기록하면서 팀 동료이자 선배인 왕희경, 윤영숙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단체전에서는 선배들과 힘을 합쳐서 양궁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했다.

2.3. 1989년~1991년[편집]


김수녕의 진정한 전성기였다. 1989년과 1991년 세계선수권 2년 연속 2관왕,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단체전 금메달, 1989년 거리별 공인 6종목 모두 세계신기록을 모두 보유했다. 이게 겨우 20대 초반에 거둔 성적이다. 그야말로 양궁계의 최강자, 넘사벽. 참고로 세계선수권 2년 연속 2관왕은 김수녕 이후 단 한 사람도 기록하지 못했다. 이 시절에 세운 세계 기록은 하도 많아서 본인도 기억을 못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수녕 선수가 현역 생활동안 세운 세계신기록은 30개가 넘는다.

2.4. 1992년[편집]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당연히 국가대표가 되었는데, 여기서 무적의 그녀는 뼈아픈 패배를 맛봤다. 팀 동료인 조윤정과의 결승전에서 패하면서 개인전 은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다만 당시 경기장면을 보면 결승 후반까지 점수가 비슷하다가 마지막 두 발이 점수가 좋지 않게 나왔다. 자신의 점수를 보고 아쉬워하는 표정보다는 웃어넘기는 표정을 지었다. 즉, 대인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단체전에서는 또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본인의 세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 대회부터 흔히 양궁 대회 방식으로 알고 있는 토너먼트가 도입이 되었는데, 이 토너먼트의 긴장감이 생각 이상이었다고 한다. 마침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패배가 너무 아쉽기도 했고, 또 이룰 것은 다 이뤄서 목표도 사라졌기 때문에 그냥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2.5. 1999년[편집]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학 선배였던 이기영씨[4]와 결혼하면서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하게 살아가는가 싶었는데, 1999년에 전격적으로 컴백을 선언했다. 어린 선수 위주의 대표팀이라서 경험 많은 선배가 필요하다는 협회의 판단 아래 협회에서 복귀를 권했다고 한다. 협회에서 복귀를 권했다고는 하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은 자력으로 뚫어야 했다. 그런데 6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기어코 선발전에서 1위를 기록하며 김수녕은 다시 국가대표가 되는 관록을 보여주었다.[5] 게다가, 인생의 경험도 늘어서 과거처럼 지는 것을 싫어하는 김수녕이 아닌 좀 더 여유롭게 활을 쏘는 김수녕으로 변했고, 그 결실은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맺어졌다.

2.6. 2000년[편집]


올림픽 4강전에서 윤미진에게 패하면서 3,4위전으로 밀렸다. 3, 4위전에서는 북한의 최옥실을 누르고 동메달을 차지했는데, 원숙해진 김수녕은 집 장식장에 동메달도 걸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배들과 함께 단체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 여자 양궁의 신화를 이어갔다. 이로써 그녀가 차지한 메달의 수는 모두 6개가 되었으며, 이 중 금메달만 무려 4개가 되었다. 이 기록은 역대 한국 선수 사상 최고 기록[6]이다.

3. 은퇴 이후[편집]


파일:김수녕2.jpg
그녀의 실질적인 고향인 청주시에는 김수녕 양궁장이 있고, 세계양궁협회에서는 20세기 최고의 여자 양궁 선수로 김수녕을 선정했다. 2012년 현재는 세계협회에 일하면서 전 세계를 순회하며 지도하고 있다.

은퇴 이후에는 올림픽 때마다 MBC의 양궁 종목 해설위원으로도 만나볼 수 있는데, 해설에서는 아래에서 후술할 대담성이 무색해지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대한민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기 직전이 되면 울먹거리면서 거의 해설을 진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7] 이로 인해 처음에는 시청자들에게 해설로서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나중에 들어서는 어차피 한국팀 선수가 금메달도 땄는데 뭐 그냥 그러려니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일부 스포츠 마니아들은 '김수녕이 울었다' 라는 말을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랑 같은 의미로 쓰는 경지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2014년 1월 9일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공주의 전담 코치를 맡는다는 기사가 떴다. 기사에 나온 내용으로 보면 대한양궁협회에서 여러 명의 후보 명단을 보내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골랐다고 한다.


4. 평가[편집]


대담성이 큰 장점으로, "시위를 떠난 화살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 를 신조로 삼아 이미 지난 성적에 미련을 두지 않는 모습 때문에 평정심을 잃지 않고 늘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치열한 승부욕은 전성기에는 불패의 모습을 만들어 냈고, 결혼과 출산 이후 복귀한 시점에서는 승부욕을 달인의 달관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경륜으로 승화시키면서, 그야말로 진정한 신궁으로서 자리잡았다.

한국 양궁이 수십년째 세계 정상을 지키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많은 궁사들이 등장하여 신궁 호칭을 물려받고 있지만, 가끔 김수녕 혼자만을 신궁으로 지칭할 때도 있다. 이 점에서 김수녕이 한국 양궁 역사에서 갖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는 국민학교 국정교과서 자연 과목의 물리 파트에서 김수녕이 1988 서울 올림픽 양궁 단체전 당시 과녁을 겨냥하는 사진이 컬러로 실려 있을 정도였다. 정확히는 이 사진이다.(출처: 경기일보)

그러나 의외로 현대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언급이 잘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대부분 커리어 최고의 스포츠 영웅들로 차범근, 박지성, 손흥민, 김연아, 김연경, 이상화, 장미란 등을 언급하곤 하는데 김수녕은 시대가 너무 옛날인지라 인터넷상의 인지도는 현실에 비해 낮은 감이 있다. 참고로 같은 양궁 종목에서 86 AG 한 대회 3관왕 김진호도 있고, 전이경은 통산 금메달이 4개나 있으나, 이 또한 상대적으로 언급이 덜 되는 편이다. 한국에서 인터넷이 시작된 건 1994년~1995년 즈음인데(PC통신도 존재는 1989년부터 있었으나 이 때쯤 활성화되었다) 김진호, 김수녕, 전이경은 이보다 이전 시대의 선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5. 수상 기록[편집]


올림픽
금메달
1988 서울
단체전
금메달
1988 서울
개인전
금메달
1992 바르셀로나
단체전
금메달
2000 시드니
단체전
은메달
1992 바르셀로나
개인전
동메달
2000 시드니
개인전
세계선수권
금메달
1989 로잔
단체전
금메달
1989 로잔
개인전
금메달
1991 크라쿠프
단체전
금메달
1991 크라쿠프
개인전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0 베이징
단체전
동메달
1990 베이징
개인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988 콜카타
단체전
금메달
1988 콜카타
개인전


6. 둘러보기[편집]




[1] 두번째는 쇼트트랙 선수 전이경으로, 동계올림픽 여자 선수들 중에서 최초로 쇼트트랙 2관왕 2연패를 달성하여 금메달 4개, 동메달 1개를 가지고 있다. 다만 전이경은 김수녕보다 메달 1개가 적다.[2] 이후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진종오가 금메달을 따고,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이승훈이 동메달을 따서 동률이 되었다. 하지만 진종오는 경우 2020 도쿄 올림픽에서 메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최다 메달 타이 기록은 당분간 깨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3] 두 번째는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2관왕을 달성한 쇼트트랙 선수 김기훈으로, 대한민국의 최초로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2관왕을 달성한 남자 선수이다.[4] 前 유소년 수영코치, 現 백영고등학교 학생인권부장[5] 6년의 공백을 깨고 치열한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한국 양궁 선수로 올림픽에 3번이나 출전하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6] 이후 진종오가 금4, 은2로 (살짝 앞서는) 타이기록을 달성했다.[7] 김수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런 멘탈로 어떻게 올림픽에 3번이나 출전했는지 의아해하기도 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13:52:34에 나무위키 김수녕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