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현/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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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1998)
2.1. 무등중학교
2.2. 광주제일고등학교
4. 마이너리그, 방출 (2008~2010)
4.2. 시즌 오프 (2009)
4.3. 마이너리그 (2010)
6.1. 넥센 히어로즈 시절 (2012~2014.04)
6.1.1. 2012 시즌
6.2. KIA 타이거즈 시절 (2014.04~2016)
6.2.2. 2015 시즌
6.2.3. 2016 시즌
7. 시즌오프2 (2017~2018)
7.1. 도미니카 윈터리그 (2017)
7.2. 멜버른 에이시스 2018-2019 시즌
7.3. 은퇴 (2019)
8. 연도별 주요 성적
8.3. 미국 독립 리그



1. 개요[편집]




김병현의 아마추어 시절부터 은퇴까지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1998)[편집]



2.1. 무등중학교[편집]


처음 야구를 시작했을 당시에는 유격수로 시작했다가 중학교 3학년때 투수로 전향하였다. 원래는 일반적인 오버핸드 투구법을 지향했지만 해태 투수 방수원이 무등중학교의 유망주들을 살펴보려 왔을때 언더스로 투수 흉내를 내며 놀고 있던 김병현을 보고 '너는 언더핸드로 던지는것에 재능이 있으니 그렇게 던져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했고 그렇게 언더스로가 됐다.


김병현이 후일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회상하길 어린 시절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데모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돌을 너무 못 던져서 자신이 돌을 던졌는데 잘 던진다고 칭찬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계속 돌을 던지던 중 언더스로로 던지면 더 멀리 나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그때부터 언더스로로 던졌다고 한다(...)

2.2. 광주제일고등학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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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고의 김병현

1994년 광주일고 1학년 당시에는 투수 또는 1루수로 11경기에 출전했고 제1회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동대문상고를 제압하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1995년 2학년으로 올라간 뒤 3학년 서재응이 등판하는 날에 팀의 공격력을 살리기 위해 3루수로 출전했다. 2학년 때 1루수에서 3루수로 컨버트한 이유는 1학년 대형타자의 입학때문인데 그가 바로 최희섭이었다. 2학년 때 출전한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23이닝 연속 무실점에 28이닝 1실점의 역투를 펼쳤고 덕수상고와의 결승전까지 43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방어율 0.035를 기록하며 청룡기 MVP를 따냈다. 최희섭(1학년), 김병현(2학년), 서재응(3학년)이 합작한 우승이었다.

김병현은 3학년에 타율 0.528을 찍었다. 시즌 첫 대회인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홈런 2개를 때리며 0.692라는 높은 타율을 기록하며 최다안타상을 수상했고[1] 7월 대구에서 열린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0.571로 타격상을 차지했다.[2] 김병현이 훗날 애리조나에서 뛸 무렵 안타를 기록하자 김병현이 고교생 당시 강타자였음을 지역 언론에서 보도했고 아침식사 먹으면서 그 기사를 읽던 팀 동료 1루수 마크 그레이스가 뿜을 뻔 했다고...마크 그레이스는 지금 내가 던져도 BK 넌 삼진으로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3]

김병현은 외야수로 출전한 적도 있는데 한 번은 수비 도중 타구가 햇빛에 들어가면서 김병현은 방향 감각을 잃고 말았다. 공은 김병현의 얼굴에 맞고 한없이 떼굴떼굴 펜스 끝까지 굴러가 상대팀에게 결승점수를 헌납하며 패배했고 아픈 얼굴을 부여잡으며 광주로 돌아온 적이 있다고 밝혔다.

청소년 대표팀에도 뽑혔으나 고3때 팔꿈치 부상을 입고 만다.


2.3. 성균관대학교[편집]


고3때부터 해태 타이거즈와 입단 협상을 진행했으며 계약금으로 3,400만원을 제시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고졸 선수가 프로 직행보다는 대학 진학을 대부분 선택하는 분위기였으며 김병현의 부친이 상경하여 성대 체육실장 및 감독과 면담한 결과 장학금 2억원이 든 통장을 받아들고 성균관대학교 진학을 결정했다고 한다. 김병현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그렇게 성균관대학교 법학과[4] 1997학번으로 입학했다.[5][6] 여담으로 성균관대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600주년기념관에서 개최된 2012년 미디어데이에서 학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법학과 97학번 김병현'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건 덤이었다.

2학년 때,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해 금메달과 더불어 병역 혜택을 받았다.

이때 중국과의 4강전에서 중간 계투로 나와 6이닝 동안 18타자를 상대해 12삼진을 잡아내는 괴력을 보였다. 그리고 이 중 8타자 연속 삼진이 있다. 아마추어 시절 한미 대학 국가대표 대항전에서 6⅔이닝 동안 15탈삼진을 기록하는 대호투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D-Backs)의 러브콜을 받아 미국으로 향한다. 이때 받은 계약금이 무려 225만달러로, 2023년 현재까지도 한국 아마추어 야구선수가 메이저리그 구단에 입단하며 받은 계약금 중 최고 액수다.[7] 그 당시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김병현을 굉장히 폭발적인 능력을 가진 특급 유망주로 평가했다고 볼수있다.

여담으로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박찬호가 던지는 것을 보고 '찬호형이 이 정도 하는데 잘하는거면, 나도 잘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고 그때를 회상하면서 당돌한 생각을 했다며 껄껄 웃었다.#

3.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편집]



3.1.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시절 (1999~2003.05.)[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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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병현/선수 경력/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2003.05~2004)[편집]


보스턴 레드삭스로 가서 선발로서 괜찮은 활약을 펼치다가 보스턴의 집단 마무리 작전이 실패하자 후반기부터 마무리로 뛰면서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2003년 디비전시리즈에서 펜웨이 파크의 홈 팬들에게 법규를 날리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8] 그 이유는 법규 사건 당시 회상 인터뷰. 이 사건 때문에 그래디 리틀 감독은 김병현을 엔트리에서 제외했고 그해 리그 챔피언십에서 뉴욕 양키스에게 패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마무리로선 16 세이브 3블론, 선발로선 12경기 ERA3.38 3승 5패로 선발과 마무리 모두 준수한 활약을 했다


3.2.1. 2004 시즌[편집]


전성기였던 애리조나 시절과는 달리 2003년 이후로는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이어갔다. 발목 부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데다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고정적인 보직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루틴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2004년 팀이 밤비노의 저주를 깨면서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하나를 더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사실 우승 반지는 본인의 활약과는 거리가 멀었고, 실제로 우승배당금도 가장 낮은 등급을 받았다. 어쨌든 우승 반지는 얻었으니 동양인 최초 양대리그 우승자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9] 항간에는 반지에 새겨진 알파벳을 이유로 애리조나 시절 반지는 A급이고, 보스턴 시절의 반지가 B급이라는 루머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반지에 새겨진 문양은 어디까지나 양 팀의 로고로서 애리조나(Arizona)의 A보스턴(Boston) B일 뿐이다. 애초에 MLB에 관심있는 사람이 두 팀의 로고를 모르지도 않을 테고 구단 또한 선수에게 평생 보물이 될 우승 반지에 떡하니 등급을 새길 턱이 없으니 단지 우승 보너스와 착각했거나 우스개에서 시작된 루머일 듯.애초에 진짜 그런식이였으면 C가 아니라 B를 새겨준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할 정도로 활약이 없었다

3.3.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 (2005~2007.05)[편집]



시간이 지날수록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내부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은[10] 김병현을 빨리 처분하고 싶었던 보스턴과[11][12] 선발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콜로라도 로키스의 이해관계에 따라 김병현은 콜로라도로 트레이드 되었다. 콜로라도에서도 선발과 불펜을 오갔으나 이미 보스턴 시절부터 하락세에 접어든 탓에 별다른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 2006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풀타임 선발을 뛰면서 배리 본즈에게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넘는 통산 715호 홈런을 헌납하였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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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동판으로 제작되어 영구 박제되었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제 1회 대회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비록 준결승 일본전에서 후쿠도메 고스케에게 맞은 3점홈런이 있는 3실점을 포함한 부진한 투구내용을 보였지만 이전 라운드 경기들에서 든든한 투구를 펼치며 대한민국의 4강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이색적인 기록으로 더블헤더 경기에서 김선우와 김병현이 둘다 선발투수로 출전하여 더블헤더 경기의 선발투수의 성이 같은 최초의 사례로 남게 되었고[14]광주일고 1년 선배인 서재응과의 선발대결도 펼쳤다. 이는 한국인 선발 맞대결 최초의 사례로 남아있다.


3.4. 플로리다 말린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시절 (2007.05~2008)[편집]




2007년 5월 14일 플로리다 말린스로 트레이드되어 그토록 원하던 선발 자리를 꿰찼으나 부진하며 8월 4일 말린스로부터 웨이버 공시당했고, 얼마 안 가 친정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클레임[15]을 걸어서 2003년 이후 4년 만에 친정팀으로 돌아왔으나 두 경기만에 거하게 털렸고 8월 14일 애리조나로부터 다시 방출, 이후 8월 25일 다시 플로리다 말린스로 이적하였다. 이렇게 몆 달만에 팀을 세 차례나 옮겨다닐 정도로 불안한 행보 속에도 그토록 원했던 10승에 어찌어찌 성공, 데뷔 첫 두 자릿수 승수를 거뒀지만 평균자책점은 6점대를 찍는 등 나머지 지표는 형편없었다.

시즌 종료 후 FA자격을 얻었지만, 부진한 성적 때문에 원소속팀이던 플로리다를 포함해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에게 외면받고 말았다.[16]

4. 마이너리그, 방출 (2008~2010)[편집]



4.1. 피츠버그 파이리츠 시절 (2008)[편집]


2008 시즌은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시작했으나, 방출당했다. 언더핸드 스로 투수가 선발로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는 속설을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

4.2. 시즌 오프 (2009)[편집]


2회 WBC를 앞두고 대표선발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였고, 선발된 이후에 1년간의 휴식을 뚫고 다시 몸을 만들기 시작하겠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의 훈련 모습이나 뿌리는 공의 상태를 대표팀 관계자 누구도 보지 못하였기에 상당한 물음표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대표팀이 소집되는 날,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불참하였고 이에 대해 아직 몸이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우회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니냐는 분석과 함께 자연적으로 엔트리에서 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바로 이런 뉴스가 나온 오후에 그는 인터뷰를 자청하면서, 여권을 다시 찾았음을 밝히면서 합류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그저 기행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해 WBC 대표팀 김인식 감독은 '13명의 투수 엔트리는 어제 확정되었다.'는 말로 김병현을 엔트리에서 완전 제외하였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는 발목 부상도 있었다고 한다. 김인식 감독도 발목 부상 소식을 듣고 최종적으로 제외했다고 밝혔다.#

이 상황은 2010 시즌을 앞두고 민훈기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정말 사실로 밝혀졌다. 밥먹는 식당에 가방을 놓고 왔는데, 공항에서 지인을 통해 퀵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퀵은 인천공항 고속도로를 탈 수 없었고, 하필 밸런타이데이라서 차도 역시 지나치게 막혔다. 2008년의 방출도 몸상태와 지인의 사망등으로 꼬여서 일어났으며, 에이전트가 타구단을 알아보겠다고 했으나 자기가 그냥 쉬겠다고 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2009년은 WBC를 시작으로 의욕적으로 덤볐지만, 일이 잔뜩 꼬여서 그냥 쉬게 된 셈이 됐다. 2010 시즌에 복귀를 하게 된 건, 야구 말고는 자신이 할 수 있을만한 일이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듯 하다. 이후 인터뷰에서 재차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하여 2010년 스프링캠프에 도전을 준비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 한인 사회인야구에 종종 출몰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병현은 미국에 개업한 초밥집 '우미스시'가 성황이라서 먹고 살 걱정은 없다. 2013년에도 성황리에 영업중. 보통 언론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여동생분이 "오빠를 대신해 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자기는 아르바이트다"라고 한 걸 보니 진짜 BK스시가 맞는 듯하다. 물론 그 동안 받은 연봉만으로도 생활 자체에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국 메이저리거 중에 500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받은 것은 저 당시까지만 해도 김병현과 박찬호 외에는 없었다. 한국인 메이저 리거 전체를 통틀어도 기껏해야 추신수와 류현진이 더해질 뿐이며, 그나마 다년계약인 류현진은 2016년까지는 만져보지 못한 돈이다.

2017년 이후로 샌디에고 지점 우미스시는 더 이상 김병현의 여동생이 관리하지 않는다. 대신 김병현의 사업파트너가 관리를 하고 있으며, 벽에 걸려있었던 야구 관련 기념물품들은 다 치워버렸다. 주인은 여전히 김병현이고 가끔씩 미국에 올 때마다 들른다고 한다.

4.3. 마이너리그 (2010)[편집]


2010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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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서 마이너에는 그저 운동하러 왔을 뿐이며, '여기 애들은 야구 잘 못해요'라는 말을 남겼다. BK는 여전하다.

로스터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을 해지했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인터뷰에 따르면 훈련 스케줄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어서 그냥 나간 거라고 한다. 더욱이 몸도 제대로 안 만들었는데 등판을 하라는 등 구단 측의 무리한 요구가 많았던 탓도 있다. 애당초 김병현 성격에 그걸 순순히 따를 리도 없고 말이다.

이후 국내 지명권을 가지고 있는 넥센 히어로즈가 김병현의 영입을 시도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카더라로 밝혀졌고, 결국 미국 독립리그에 속한 오렌지 카운티 플라이어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점차 구위가 올라오고 제구력도 좋아지는 중이라고 하였다. 7월까지 성적은 3승 1패 평균자책점 2.56.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무척 좋은 결과를 거뒀다.

다만, 이후 김병현의 성적이 다시 떨어지고 나아지지 않자 결국 야구를 그만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지만, 실은 비자 문제로 인해 한국에 잠시 귀국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 즈음에서 이미 결혼을 했으며, 딸도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5. 일본프로야구[편집]



5.1.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 (2011)[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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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배번은 99번. 신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마무리로 내세운다는 방침이었다. 김병현 본인은 일단 '나 자신이 만족하는 공을 던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팬들은 센트럴리그(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소속리그)의 임창용과 퍼시픽리그(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소속리그)의 김병현의 잠수함 매치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지만, 교류전이 끝나도록 1군에 콜업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라쿠텐의 마무리 투수인 라이언 스파이어가 준수한 성적을 거뒀고, 그에 비해 김병현은 아직 몸 상태가 완벽하지 못했던 것. 결국 일본에서 특별한 출전기회를 얻지 못한 채 2군 생활만 하다가 귀국, 결국 11월 16일 라쿠텐 측으로부터 공식적인 방출 통보를 받았다.

한편 전 지바 롯데 마린스 감독이자 보스턴의 신임 감독인 바비 발렌타인이 김병현에게 큰 관심을 보인다는 기사가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여담으로 이 때 인터뷰에서 "보직은.. 솔직히 제가 감독이라면 저 안 써요"라는, 오늘날에도 종종 회자되는 주옥같은 명언을 날렸다.그래서 진짜 안썼다

6. KBO 리그[편집]



6.1. 넥센 히어로즈 시절 (2012~2014.04)[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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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8일 김병현이 넥센과 1년 16억(계약금 10억, 연봉 5억, 옵션 1억)에 계약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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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식에서도 여전히 걸출한 입담과 기행을 펼쳤다.

6.1.1. 2012 시즌[편집]


그리고 3월 29일 한국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에서 첫 등판, 1⅔이닝 1피안타, 1볼넷, 1사구(死球) 무실점, 최대 직구 구속 145Km/h으로 성공적인 한국 무대 데뷔전을 치루었다. 또한, 4월 4일 LG트윈스와의 2군 연습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하여 4이닝 5탈삼진 1볼넷 무실점하였다.

5월 8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1군 첫 등판했다. 이대형에게 첫 안타를 내준 뒤 양영동에게 안타를 맞으며 야갤러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그 뒤 이진영에게 또 안타를 맞으며 1실점. 그 뒤로 3명은 범타 처리했으나 아쉬운 경기를 보여주었다.

5월 18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출장했다. 4회까지 2실점으로 잘 막았지만 사전에 김시진 감독과 서로 약속했던 투구수인 95구를 초과해서 승리 요건을 채우지 못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딱 96구째에 적시타를 맞아주는 개그를 선보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는 준수한 경기 내용이었으나 이날 삼성이 좌타자에 약한 김병현을 공략하기 위해 1~5번 타자를 모조리 좌타로 채우는 작전을 펼쳐서 여기에 조금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다. 한 술 더 떠서 삼성 타자들이 작심하고 커트를 난무하는 바람에 이닝을 적게 먹기도 했다. 최종 결과는 4⅔이닝 동안 6피안타 2볼넷 6탈삼진 3실점. 기대를 모았던 이승엽과의 첫 맞대결에서는 3타수 동안 각각 3루타, 몸에 맞는 공, 삼진으로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가 나왔다.

그 뒤로 몇 차례 등판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6월 20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과의 경기에서 6이닝 95투구수 4피안타 3볼넷 2탈삼진 1실점 무자책으로 두산 타선을 잘 막고, 팀이 3:2 승리를 따냄에 따라 마침내 시즌 첫 승이자 한국에서의 첫 승을 따냈다.[17]

6월 26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과의 경기에 등판, 6이닝 3실점(3자책)의 준수한 피칭으로 2승을 따냈다. 두산의 선발 땀승회가 초반부터 2.1이닝 6실점으로 탈탈 털리는 바람에, 김병현은 이날 야수진의 대량 득점을 등에 업고 6이닝 동안 70개의 투구수만 기록하였다.

7월 5일 목동야구장에서 한화 이글스의 선발투수 박찬호와 선발전이 예고되었지만 비가 와서 무산. 두 선수가 맞붙는 장면을 고대했던 팬들이 많았던 만큼 아쉬움을 표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다음날 선발 예고되었으나 다시 우천 순연되어서 로케이션을 걸렀다.

7월 12일 SK를 상대로 5이닝 4피안타 5실점하면서 패전투수가 되었고, 7월 26일 KIA전에서는 1⅓이닝 동안 무려 6피안타 5실점하면서 조기 강판되었다. 7월 31일 현재 WHIP 1.66을 기록했다.

결국 2군에 내려갔다가 10일 후 1군 콜업, 그리고 8월 22일 두산전에서 첫 홀드를 따냈다.

김시진 감독 경질 이후 김성갑 대행 체제로 이루어지는 남은 경기, 김성갑 대행은 김병현을 다시 선발로 보직을 변경하겠다고 예고하고, 9월 20일 롯데전에 선발투수로 등판시켰다. 이전의 선발로서 좋지 못한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로서는 많이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6이닝 1실점 5삼진 무사사구라는 훌륭한 투구내용을 보여주었다. 타선도 거기에 응하여 장기영의 8호 홈런을 포함해 3:1로 갈 길 바쁜 롯데를 꺾고 팀은 5위로 올라섬과 동시에 자신도 시즌 3승을 달성하였다.

10월 2일 시즌 마지막 홈경기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했으나, 윤석민에게 홈런을 맞는 등 3이닝 3실점을 하고 조기강판되었다. 하지만 실책 때문에 조기강판된 것은 아니고, 3루 수비 커버를 하러 달려들다 두산 베어스의 주루코치인 김민호와 충돌하여 선수보호 차원에서 조기강판시킨 것. 이날 경기는 3:1로 패배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2012년 최종 성적은 3승 8패. 신인 한현희와 승수가 같고, 이닝수, 비율스탯 모두 밀린다.

2012년의 넥센 DTD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팬들도 있지만, 몇 년 동안 운동을 아예 접고 있던 30대 아저씨가 갑자기 공 던지는데 선발승 팡팡 찍으면 약물을 의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2012시즌은 KBO 연착륙으로 보고 2013시즌을 기대하자는 팬들도 있었다.

2012년 내내 제구가 잡히지 않아 고생을 했고, 후반기에 잠시 셋업으로 나왔을 때는 두산의 클린업 트리오를 말 그대로 지리게 잡는 위엄을 보여주었지만 변화구의 각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탓에 좌타자만 만나면 쥐약이었다. 좌타 상대용 결정구와 제구를 잡는게 숙제로 꼽혔다.

2013년 연봉은 1억 인상된 6억 원으로 결정되었다. 실망스러운 2012년 성적에 비추어 볼 때 의외의 일인데[18], 입단 당시 다년 이면계약이 있었던 것으로 확실시된다. 사실 이름값을 보고 계약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김병현 영입 후 넥센은 장사꾼 이미지에서 많이 벗어났고 기념품 구입도 꽤 늘어났다고 한다. 김병현 보러 야구장 온다는 팬들도 있고 한다.


6.1.2. 2013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병현/선수 경력/201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강철 코치도 그를 살리진 못했다. 시즌 초반엔 갑자기 각성하여 이닝을 잘 소화해줬지만 6월 11일 사직 롯데전에서 퇴장당한 날을 기점으로 급격히 무너졌다. 그에 대한 히어로즈 팬덤의 여론도 더욱 악화되었다. 사실 영입한 것 자체는 마케팅이나 홍보 측면에선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쓸데없이 비싼 계약금이 문제다. 그것도 2년 연속으로 돈을 퍼주었다.

2014년 연봉은 4억 삭감된 2억 원으로 결정되었다. 삭감 금액이 4억 원인데, 이는 이용규의 5억, 박명환의 4억 5천만 원에 이은 3위 기록이다.

김병현의 부활 가능성에 대해 분석한 글이 화제를 모았다.

6.2. KIA 타이거즈 시절 (2014.04~2016)[편집]


파일:external/3.bp.blogspot.com/1089056215_74b06f3c.gif
시즌 중 트레이드를 통해 고향 연고팀인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6.2.1. 2014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병현/선수 경력/201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2. 2015 시즌[편집]


시즌 시작 전 김진우가 번호를 49번에서 94번으로 변경하면서, 김병현 본인에게 상징과 같은 49번을 2015 시즌에는 달 것으로 기대했으나, 뜬금없이 박성호가 49번을 차지했다. 49번에 대한 관심이 없는 듯.[19] 그런데 괌 재활조에서 훈련을 하던 도중 2월 5일 현지에서 복통을 일으켜 병원을 찾은 결과 맹장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다고 한다. 휴식 이후 다시 몸을 만들어야 하니 최소 3~4주는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팬들은 시즌 시작도 안했는데 이러냐며 절망하고 있다.

회복 후 2군 경기에 출전 중 인데, 5월 4일 현재 방어율이 8점대 중반이다... 특히 kt 위즈 전에서는 5이닝 13실점 8자책을 기록하기도 하면서 팬들에게 맹렬히 까이고 있다.[20]

5월 13일 삼성 2군과의 경기에서 5이닝 무실점 8K로 좋은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7일 최근 부진하고 있던 험버가 2군으로 내려가고 김병현이 1군으로 콜업되었다. 17일 두산 베어스 경기에서 선발 양현종에 이어 불펜으로 나와 민병헌의 무릎을 맞추는 데드볼을 기록했지만 그 이후 2루수 김민우의 호수비로 1이닝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내려갔다. 5월 16일에 1군 등록 전 선수단에 합류하면서 메이저리그 3인방(서재응, 김병현, 최희섭)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다만 서재응은 16일에 컨디션 조절 차 말소되어서 1군 엔트리에 세 명이 모인 건 아니었다.

5월 21일 사직 롯데전 선발 등판에서 5이닝 4피안타 2K 2실점을 기록했다.

파일:external/i.jjang0u.com/143230210640328.gif

그리고 명움짤을 하나 남겼다. 타자는 강민호다.

6월 16일 경기에선 박용택에게 쓰리런을 맞았다.

18일 경기에선 동점상황에서 올라와 실점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맹장염 복귀 이후 선발, 불펜을 오가는 스윙맨으로서 볼만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KBO 복귀 후 불펜 김병현이 선발 김병현보다 훨씬 좋았기에 아예 불펜으로 가길 바라는 팬들도 있다.

7월 2일 한화전 홈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1⅔이닝 동안 무려 74구를 던지며 6피안타 5사사구를 기록했고, 6실점하며 조기 강판당했다. 결국, 팀은 그대로 지며 패전의 멍에를 썼다. 탈삼진은 2개를 잡았다.

7월 3일 2군행을 통보받았다. 'ERA 8.28' 김병현 2군행, 제구력 회복 절실

8월 5일 목동 넥센전에 선발 등판하여 5⅔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고 승리 요건을 채우고 내려갔다. 하지만 최영필이 8회 스나이더, 박병호에게 연이어 홈런을 맞으면서 ND가 기록되었다. 시즌 첫 승은 다음 기회에 미뤘다.

8월 21일 사직 롯데전에 선발 등판했으나 8실점하며 박살났다.

최희섭이 은퇴를 선언한 지금, 8점대 방어율을 찍었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내년에도 뛸 예정이다. 이유로는 손영민2016년 4월에 제대를 하나, 몸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김병현을 제외하면 믿을만한 옆구리 투수도 팀에 없는 상황. 다만 나이도 많고 실력도 전성기에 비해서 폭락한 선수인지라 내년에 큰 기대가 보이지 않는다.

서재응도 은퇴를 선언하여 광주일고 트리오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또한 임창용불미스러운 사건으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드림팀의 유일한 투수 생존자가 되는 듯하였으나 2016년 3월 28일 KIA 타이거즈가 임창용을 영입하면서 팀 동료가 되었다. 야수로는 아직 홍성흔, 조인성, 이병규, 박한이가 있다. 2016시즌 김병현의 나이는 38세다.


6.2.3. 2016 시즌[편집]


4월 17일 기준으로 우승반지를 찾았다는 기사가 떴다.

KIA의 불펜들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징계 먹은 임창용의 복귀까지 늦어지는 와중에도 합류가 감감무소식이다. 김기태 감독의 말에 의하면, 아예 공도 만지지 않았다고 한다. 불펜 운용이 어지러운 때에 한번 올라올 만하지만,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올해가 KIA에서의 마지막인 듯.

스프링캠프 기간에 맹장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2군 경기에 간간히 올라오긴 했지만, 15경기에 등판하여 1승 1패 2홀드, 평균자책점 7.36으로 나올 때마다 탈탈 털렸다. 2016년 8월 24일 kt전에 마지막으로 나섰는데, 4⅓이닝 7안타 3실점(3자책)을 기록했다. KIA 관계자는 "2군 경기를 보니 이전보다 스피드가 10km/h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언급했다.

한 팬이 김병현에게 언제 1군에 올라오냐고 물어봤는데, "야, 생각을 해봐라. 네가 감독이면 나를 올리겠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고 대답했다는 썰이 있다.

결국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본인은 선수생활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강하다고 한다. 모 구단감독님이 김병현에 관심이 있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프런트 측에서 체크 결과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사실상 불발됐다.[21]

추후 밝힌 바로는 웨이트보다 러닝에 집중했는데 몸이 덜 회복된 채 훈련을 하다가 골반에 이상이 오며 투구 밸런스가 무너졌다고 한다. 식이요법으로 5개월 간 10kg를 감량했고 투수가 아니면 타석이라도 서겠다고 선언했지만 받아줄만한 팀을 국내에서는 찾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7. 시즌오프2 (2017~2018)[편집]


2017년 저니맨 외인구단에 합류할 계획이라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지만, 실제로 입단하지는 않았다.

이후 직접 보도보다는 타인의 기사에 간접적으로 언급되면서 은퇴 했는지, 아직 은퇴하지 않았는지 추측만 난무하고 있다.

서울 용산해방촌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채널A의 관찰 카메라 24라는 프로그램에서 촬영차 해방촌에 갔다가 카메라 동선에 김병현이 잡혔다. 그러나 원체 꾸미지 않는 성격 때문에 카메라맨 두 명이 있었음에도 김병현이 지나가는 줄 모르고 그냥 가는 길 그대로 보내드렸다. 이후 인터뷰에 따르면 해방촌에 이사온 지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7.1. 도미니카 윈터리그 (2017)[편집]


2017년 10월 11일, 재기를 위해 도미니카 윈터리그에 진출, 히간테스 델 시바오팀의 유니폼을 입은 사진이 실린 기사가 보도되었다.

2017 도미니카 윈터리그 개막 직전에 히간테스 델 시바오에서 나와 현재는 산티아고에서 강정호와 함께 생활 중이라고 한다. 다만 강정호도 방출되었고, 경기 나오거나 팀을 새로 찾았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이번 오프시즌에 무언가 보여주기는 어려울 듯하다.

2018년에 들어와서는 모교였던 광주일고 야구부 스프링 캠프에 같이 참여하여 훈련하고 있다는 사실이 김여울 기자를 통해 전해졌다. 아직 은퇴를 한 것은 아니고, 고교 선배이자 현재 일고 감독인 성영재 감독의 배려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 "개인 훈련은 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보인 것을 봐서는 이제 선수 생활을 정리하려는 듯.

그러다가 2018년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메이저 리그 개막 경기에 초청되었다. 애리조나 유니폼을 입고 시구도 진행했다.[22] 여기서 알려진 근황으로는 캘리포니아 주에 여전히 스시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현역 복귀 생각은 없는 듯하여 사실상 은퇴를 선언한 듯 싶었지만..

7.2. 멜버른 에이시스 2018-2019 시즌[편집]


2018년 10월 29일, 호주 프로야구 리그에 속한 멜버른 에이시스 입단이 확정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개막전부터 리저브(예비)로 되어 있어서 등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3주차인 질롱 코리아와의 시리즈를 앞두고 액티브로 변경되었다.

2018년 11월 29일 드디어 중간 투수로 6회초 팀이 3:1로 뒤진 가운데 두번째 등판되면서 첫 타자 삼루 땅볼에 이어 두 타자 연속 삼진을 기록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11개 투구수 (스트라이크 9, 볼2)

5주차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로스터에서 제외되었다.(선수 정보에는 여전히 액티브로 표시) 6주차에 로스터로 복귀했으나 리저브로 빠졌으며 7주차인 질롱 코리아전에 맞춰 액티브로 돌아왔다.

시즌 최종 성적은 9경기, 1세이브, 9 2/3이닝 1실점, ERA 0.93, 6피안타(1피홈런) 5피사사구 9탈삼진, 피안타율 .171, WHIP 1.14. 9번의 등판 중 4번이 질롱 코리아와의 경기였다.

7.3. 은퇴 (2019)[편집]


2019년 1월 선수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

본인을 저니맨이라고 말하면서 은퇴식은 사치라고 하였고 또한 고향팀에서 은퇴식을 제안했어도 거절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8.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8.1. MLB[편집]


역대 기록(투수)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fWAR
bWAR
1999
ARI
25
27⅓
1
2
1
3
.333
4.61
20
2
25
31
15
14
1.46
0.1
0.0
2000
61
70⅔
6
6
14
5
.500
4.46
52
9
55
111
39
35
1.39
1.0
0.4
2001
78
98
5
6
19
11
.455
2.94
58
10
52
113
32
32
1.04
1.4
3.1
2002
72
84
8
3
36
0
.727
2.04
64
5
32
92
20
19
1.07
2.5
4.0
2003
7
43
1
5
0
0
.167
3.56
34
6
19
33
17
17
1.14
0.5
1.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fWAR
bWAR
2003
BOS
49
79⅓
8
5
16
0
.615
3.18
70
6
26
69
38
28
1.11
1.9
1.5
2003 시즌 합계
56
122⅓
9
10
16
0
.474
3.31
104
12
45
102
55
45
1.12
2.3
2.8
2004
BOS
7
17⅓
2
1
0
0
.667
6.23
17
1
9
6
15
12
1.38
0.1
-0.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fWAR
bWAR
2005
COL
40
148
5
12
0
1
.294
4.86
156
17
85
115
82
80
1.53
1.3
1.6
2006
27
155
8
12
0
0
.400
5.57
179
18
69
129
103
96
1.55
2.4
0.4
2007
3
6
1
2
0
0
.333
10.50
6
2
5
2
7
7
1.67
-0.2
-0.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fWAR
bWAR
2007
FLA
14
75⅔
5
3
0
0
.625
4.16
65
9
61
68
41
35
1.56
0.1
-0.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fWAR
bWAR
2007
ARI
2
2⅔
0
1
0
0
.000
23.63
11
1
3
3
9
7
4.88
-0.1
-0.5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fWAR
bWAR
2007
FLA
9
34
4
2
0
0
.667
5.62
49
8
15
34
33
31
1.70
0.1
-0.1
2007 시즌 합계
28
118⅓
10
8
0
0
.556
6.08
131
20
84
107
90
80
1.68
-0.5
-1.1
MLB 통산
(9시즌)
394
841
54
60
86
20
.474
4.42
781
94
456
806
451
413
1.38
11.0
11.1

역대 기록(타자)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1999
ARI
25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000
0.0
0.0
2000
61
3
.000
0
0
0
0
0
0
0
1
.250
.000
.250
0.0
0.0
2001
78
6
.167
1
0
0
0
2
0
0
0
.167
.167
.334
0.0
0.0
2002
72
2
.500
1
0
0
0
0
0
0
0
.500
.500
1.000
0.0
0.1
2003
7
13
.154
2
1
0
0
1
0
0
0
.154
.231
.385
0.0
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03
BOS
49
7
.286
2
0
0
0
0
0
0
0
.286
.286
.572
0.1
0.1
2003 시즌 합계
56
20
.200
4
1
0
0
1
0
0
0
.200
.250
.450
0.0
0.1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05
COL
40
38
.079
3
0
0
0
2
0
0
2
.122
.079
.201
-0.3
-0.4
2006
27
50
.160
8
1
0
0
4
4
0
1
.176
.180
.356
-0.1
-0.2
2007
3
2
.000
0
0
0
0
0
0
0
0
.000
.000
.000
0.0
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07
ARI
2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000
0.0
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07
FLA
23
30
.067
2
1
0
0
1
0
0
2
.125
.100
.225
-0.2
-0.1
2007 시즌 합계
28
33
.061
2
1
0
0
1
0
0
2
.114
.091
.205
-0.2
-0.1
MLB 통산
(8시즌)
394
153
.124
19
3
0
0
10
4
0
6
.156
.144
.300
-0.6
-0.5

8.2. MiLB[편집]


  • 한 연도에 동일 구단 산하 여러 레벨의 기록이 존재할 경우, Rk → A- → A → A+ → AA → AAA 순으로 서술.
역대 기록(투수)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AZL 다이아몬드백스(Rk)
1
2
0
0
0
0
-
0.00
1
0
1
2
0
0
1.00
엘패소 디아블로스(AA)
10
21⅓
2
0
0
0
1.000
2.11
6
0
12
32
5
5
0.70
투산 사이드윈더스(AAA)
11
30
4
0
1
0
1.000
2.40
21
2
16
40
9
8
1.20
1999 시즌 합계
22
53⅓
6
0
1
0
1.000
2.19
28
2
29
74
14
13
0.99
2000
투산 사이드윈더스(AAA)
2
8⅓
0
0
0
0
-
0.00
1
0
5
13
0
0
0.60
2003
3
17⅔
1
1
0
0
.500
2.55
17
2
4
8
5
5
1.0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4
사라소타 레드삭스(A+)
1
2
0
0
0
0
-
0.00
0
0
0
2
0
0
0.00
포터킷 레드삭스(AAA)
22
60⅔
2
6
0
0
.250
5.34
71
6
18
39
43
36
1.37
2004 시즌 합계
23
62⅔
2
6
0
0
.200
5.17
71
6
18
41
43
36
1.3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6
콜로라도 스프링스 스카이삭스(AAA)
3
13
0
1
0
0
.000
6.23
18
0
5
11
11
9
1.69
2007
5
24⅓
1
1
0
0
.500
2.96
21
2
11
31
10
8
1.32
MiLB 통산
(6시즌)
58
179⅓
10
9
1
0
.526
3.56
156
12
72
178
83
71
1.19

역대 기록(타자)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1999
엘 파소 디아블로스(AA)
10
2
.500
1
0
0
0
0
1
0
1
.667
.500
1.167
투산 사이드윈더스(AAA)
11
4
.000
0
0
0
0
0
0
0
0
.000
.000
.000
1999 시즌 합계
21
6
.167
1
0
0
0
0
1
0
1
.286
.167
.453
2003
투산 사이드윈더스(AAA)
3
6
.167
1
0
0
0
0
1
0
0
.167
.167
.334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2006
콜로라도 스프링스 스카이삭스(AAA)
3
4
.500
2
0
0
0
1
0
0
0
.500
.500
1.000
2007
5
6
.000
0
0
0
0
0
0
0
0
.000
.000
.000
MiLB 통산
(4시즌)
32
22
.182
4
0
0
0
1
2
0
1
.217
.182
.399

8.3. 미국 독립 리그[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0
오렌지 카운티[23]
10
45⅔
3
1
0
0
.750
2.56
39
2
27
48
23
13
1.38
미국 독립 리그 통산
(1시즌)
10
45⅔
3
1
0
0
.750
2.56
39
2
27
48
23
13
1.38


8.4. KBO[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2
넥센
19
62
3
8
0
3
.273
5.66
65
6
48
43
44
39
1.60
2013
15
75⅓
5
4
0
0
.556
5.26
71
7
49
43
46
44
1.4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4
KIA
21
71
3
6
0
0
.333
7.10
88
5
40
66
58
56
1.62
2015
23
49
0
5
0
2
.000
6.98
67
7
29
38
38
38
1.74
2016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4시즌)
78
257⅓
11
23
0
5
.324
6.19
291
25
166
190
186
177
1.33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2014년
1완투
0완봉
KBO 통산
1완투
0완봉

8.5. ABL[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8-19
멜버른
9
9⅔
1
0
0
1
1.000
0.93
6
1
5
9
1
1
1.14
ABL 통산
(1시즌)
9
9⅔
1
0
0
1
1.000
0.93
6
1
5
9
1
1
1.14
[1] 이 해 대통령배는 박용택의 활약으로 휘문고가 우승했다.[2] 광주일고는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경동고에 패했다. 1년 뒤 대통령배 준결승전에서 이 두 학교는 또 만났고 경동고가 끝내기 야수선택에 힘입어 결승에 진출했다. 1996-1997년은 경동고의 마지막 황금기였다.[3] 실제로 마크 그레이스는 팀이 대패하는 와중에 가비지 이닝을 소화할 때 마운드에 오른 적이 있다.[4] 이제 성균관대학교에 법학과는 없다. 2009년도부터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도입하면서 로스쿨로 지정된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법학과 학부과정에 신입생 모집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5] 당시에만 해도 체육특기생은 학적만큼은 원하는 학과로 넣어주던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법학과경영학과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법학과는 관련 없지만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법학과 나오신 법규형님'으로 불린다.[6] 참고로 김병현은 만일 야구를 그만두게 된다면 체육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야구선수를 못할까봐 걱정이 됐던 메이저리거 체대를 희망했으나 법대에 들어가면 좋은 인맥이 쌓이니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감독님의 조언으로 법대에 진학했다고 한다.[7] 타자로서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정도 활약하는 추신수조차 200만 달러를 못 넘겼다. 참고로 2000년대 초반 플로리다 말린스와 계약을 맺은 베네수엘라 출신 국제 유망주 미겔 카브레라의 계약금은 180만 달러로(다저스에게 200만 달러 오퍼가 있긴 했다.) 당시는 물론 2023년 현재까지도 S급 유망주가 아닌 이상 200만 달러도 넘기기 힘든 게 현실이다. 게다가 당시의 계약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한다면 1000만 달러 이상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는 2010년 드래프트 당시 역대 타자 최고액을 갱신한 브라이스 하퍼보다 많다.[8] 요약하자면 9회말 선두타자 라몬 에르난데스를 중견수 뜬공으로 처리했으나 그 뒤로 빌리 맥밀론을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크리스 싱글턴을 상대로는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사구를 내주어 1사 1,2루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다행히 후속타자 마크 엘리스를 무려 98마일의 직구 등으로 삼진으로 돌려세웠으나 이후 감독은 김병현을 강판시키고 앨런 엠브리를 등판시키게 된다. 문제는 엠브리가 에루비엘 두라소에게 좌익수 방면 적시타를 허용해 동점을 허용했고 이후 연장끝에 보스턴이 지자 홈관중의 야유를 받아들이지 못한 김병현이 법규를 날렸다는 것[9] 참고로 일본인 최초 양대리그 우승 기록은 4년 뒤에 이구치 타다히토가 기록한다.[10] 홈구장에서 이거를 날렸기 때문이다.[11] 사실 김병현도 본인 의사와는 관계없이 트레이드로 팔려온 입장이었기 때문에 보스턴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었다. 은퇴 이후에 보스턴 홈 구장에 대해서 호평을 하긴 했지만 보스턴이라는 구단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것으로 보인다.[12] 여담으로 이 당시 일본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할 뻔했다.# 당시 치바 롯데 감독이던 바비 발렌타인도 외국인 투수 보강을 위해 적극적으로 김병현의 영입을 주장했고, 실제로 치바 롯데와 보스턴 양 구단 간 이적료 협상까지 들어갔으나 결국 무산된 걸로 보인다.# 야만없이지만 이 때 치바 롯데로 갔다면 이승엽과 같은 팀 소속이 되었을 것이다.그리고 일본에서도 우승반지 하나 더 얻고 갔을 것이다[13] 비슷한 예로 박찬호는 본즈에게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달성하는 71호, 72호 홈런을 연달아 맞았다.[14] 2경기 둘다 승리했고 김병현은 승리를 챙겼다.[15] 포스트시즌 대비용으로 한번 로또 긁는 심정으로 영입했다는 설이 있다.[16] 결국 김병현은 일평생 FA 신청을 단 한번도 하지 못했다.[17] 이로써 두산 베어스서재응박찬호에 이어 김병현까지 3명의 전직 메이저리거의 국내 복귀 첫승을 헌납하였다.[18] 두 외국인 선수를 제외한 넥센의 다른 1군 투수들에게 책정된 2013년 연봉을 다 합쳐도 6억이 안 된다.[19] 김병현의 성격상 그런 것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어서 그럴 것이다. 은퇴 이후 선수 시절의 유니폼이나 야구 용품을 잘 챙기려하지 않아서 사실상 아내와 여동생이 챙겨줬다고...[20] kt 2군은 1군과 다르게 퓨처스 리그 최강이다.[21] 취임 초기~15시즌 종료 직후라면 이적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김성근이 2년 연속 지원은 받을만큼 받았음에도 가을야구에도 실패하고 혹사 논란까지 커지자 구단이 박종훈 단장을 필두로 쥐고 있던 권한을 대부분 회수해가버려서 아쉽게 되었다.[22] 유니폼 우측 소매에 붙인 패치를 통해 2002년 밀러 파크에서 열린 올스타 선발 당시의 유니폼임을 알 수 있다.[2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으나 스스로 퇴단하였으며, 이후 미국 독립리그의 오렌지 카운티 플라이어스에 입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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