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규(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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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도규2.jpg
출생
1885년 6월 17일
전라도 보성군 조내면 감동리
(현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덕산2리 감동마을)[1]
사망
1967년 1월 4일
전라남도 보성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본관
김해 김씨
이명
김종문(金宗文)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김도규는 1885년 6월 17일 전라도 보성군 조내면 감동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덕산2리 감동마을)에서 이조참의를 지낸 김현(金俔)의 9대손인 김형국(金炯國)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몸이 강건하고 뜻이 늠름하고 호쾌했다고 하며, 일찍이 친우들과 함께 무사(武事)를 배우고 진(陣)치는 법을 연습했다. 특히 산이 돌고 물이 꼬부라진 곳을 만나면 반드시 진터를 세워 보려고 했고,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으면서 항상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통분한 생각을 갖고 근심하였다고 한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정미7조약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보성에서 안규홍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칼을 집고 쫓아가서 모든 시설과 방략에 대하여 조언하였다. 호곡(毫谷)싸움에서 먼저 왜적의 괴수를 목베고 안규홍의 부장(副將)이 되었다.

그는 군대를 거느리고 적을 공격하며 노획할 때에 분대별로 정비하기를 법도가 있게 하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했다. 운월(雲月)에서의 전투에서는 먼저 대포를 쏘아 일본군의 장수를 사살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병치(並峙)와 진산(眞山)에서의 전투에서도 역시 일본군을 상대로 전과를 거두었다.

또, 그는 부하들과 함께 달고 쓴 것을 같이 겪어 술 한 잔이나 고기 한 조각이라도 반드시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규홍이 체포되어 의병이 해산되자, 그는 이름을 숨기고 은신하였다. 항상 안규홍이 죽은 것을 애석히 여기고 그와 함께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죽은 듯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1967년 1월 4일 보성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도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8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인근의 대곡리·용전리와 함께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