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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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기형1.jpg
출생
1887년 9월 8일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장산리
사망
1943년 6월 29일
중국 충칭
이명
김현구(金鉉九·金玄九·金玄狗)

해악(海岳)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김기형은 1887년 9월 8일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4년경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문화사업에 종사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육영사업에 전념하였고, 1919년 3월과 4월 안악군내의 만세시위를 주동했다. 이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연통제의 황해도 경무사로 임명되어 안악군 대행면 굴산리에 국내 연락소를 두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이후 이승길(李承吉)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의 산하단체로서 한용단(韓勇團)을 조직하여 독립공채를 매각하는 등 군자금 모금활동에 주력하다가 1921년 1월 29일 일본 경찰에 붙잡혀 동년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들어 황해도 독판(督辦) 및 각 군의 요원들에게 연락사항을 전달·지시하며 군자금 모집을 계속하다가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2년 7월, 상하이에서 결성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회원을 맡아 갈등이 심화된 임시정부를 수습하고자 노력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0월에는 김구, 여운형, 박은식 등 16명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으나, 그해 6월 3일 윤해, 신숙 등이 황해도 대표단이라는 명칭을 도용하자, 이에 반발하여 국민대표회의 의원으로서 비난 성명에 연서(連署)하였다. 1924년에는 상해 한교민단의사(韓僑民團議事)와 동 총무부장을 역임하였으며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이사를 맡는 한편 한국노병회 회계검사원이 되었다.

또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審判委員)에 선임되어 나창헌·곽헌(郭憲)·채원개·최석순 등과 함께 이승만을 면직시키는 심판서를 1925년 3월 11일에 발표하였다. 이듬해 11월 한국노병회 정기총회에서 김문희(金文熙)·강창제 등과 같이 회계검사원으로 재임되어 노병회의 재정을 감사하는 한편 김규식·최창식 등과 협의하여 상해 한인유학생의 진학준비기관으로 프랑스조계 천상리(天祥里)에 3.1 공학(公學)을 세웠다.

1928년 3월에는 이동녕·이시영·김구·김두봉·안창호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재무부장·문화부장·감사 등을 지내다가 2년 후에는 한국노병회의 이사로 취임하였다.

1931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 상임위원 등을 지냈고, 난징에서는 5당 통일운동에 참여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했으며, 1937년에 동 당의 감찰위원이 되었다. 1940년 1월에는 충칭에 가서 한국 광복군을 창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43년 6월 27일 충칭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김기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