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1969)/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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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치 경력[편집]



1.1.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파일:2006090723525812021_15016.jpg


은퇴 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한신 타이거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으나, 2006년 시즌 중 8연패에 빠진 SK 와이번스의 사정으로 인해 조범현 감독의 요청으로 연수를 중단하고 그해 6월 25일부터 1군 타격 보조 코치를 맡았다. KBO 리그에서의 첫 지도자 생활을 현역 시절 마지막 소속팀에서 하게 된 셈. 그러나 팀은 결국 6위에 머물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고 조범현 감독이 물러난 후 그도 코치에서 물러나 다시 일본으로 연수를 받으러 건너갔다.

의외로 이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많은 이들이 김기태의 KBO 지도자 생활 시작 팀을 LG 트윈스로 알고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이 당시 SK는 연고지 인천광역시에서도 타팀에 인기도가 밀리는 비인기 구단이었고 김기태가 SK 코치로 재직한 기간이 불과 4개월 남짓 밖에 되지 않았으며 주목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보조 코치였기 때문이었다.


1.2. 요미우리 자이언츠 1기[편집]


요미우리 자이언츠 No.130[1]
김기태(金杞泰)
요미우리 자이언츠 No.84[2]
김기태(金杞泰)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1110301000139300009681.jpg


2006 시즌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김종훈, 김한수와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지도자 연수를 마친 후 코치 생활을 했다. 2008년 시즌 중에는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팀 타격코치로 선임되어 금메달을 이끌었다. 2006 시즌 후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계약하면서 한국인 코치 1명을 데려갈수 있는 조항[3]이 있었는데, 그 조항으로 김기태가 갈 수 있었다고 한다.[4]

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솔선수범하여 이승엽만을 위한 보조코치에서 한국인 최초로 일본프로야구 팀의 정식 타격코치로 선임되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퓨처스 팀 감독도 맡았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하라 다쓰노리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서 평가가 굉장히 좋아서, 후에 국내 복귀 뒤에도 여러 일본프로야구 팀에서 탐을 낼 정도였다고 한다. 한 때 몸담았던 팀인 삼성 라이온즈에서도 2009년 강봉규신명철의 타격 성장에 기여한 나가시마 키요유키 타격코치가 치바 롯데 마린즈로 옮겨 공석이 된 1군 타격코치 자리에 김기태를 영입하려고 시도했을 정도였다.


1.3. LG 트윈스 시절[편집]


LG 트윈스 No.71
김기태(金杞泰)


파일:external/dimg.donga.com/41735117.2.jpg



파일:/image/076/2011/10/08/2011100801000545500045351.jpg


2009년 시즌 종료 후 김재박의 뒤를 이어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확정되었다는 설도 있었으나 LG의 감독은 박종훈이 되었고, 박종훈 신임 감독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LG 트윈스의 2군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5] 이 때부터 김기태 차기 감독 내정설을 불러 일으켰다. 2011 시즌 말미에는 김영직과 보직을 바꿔 1군 수석코치로 콜업되었다. 2011 시즌을 마치고 박종훈 감독이 사임한 후 후임 감독으로 수많은 카더라가 난무하던 가운데, 유일한 내부승격 후보였다. 이 때 LG 2군 선수단을 본인의 유명한 카리스마로 휘잡으면서 '사신기태'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나중에 이 별명을 알게 되고 나서 "선수들하고 잘 지내는데 왜 사신으로 부르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결국 본인 성격과 성향이 사신과 맞아 떨어졌음이 해가 지날수록 드러나게 된다. 특히 2018시즌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서의 행보를 보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2군 감독으로 있을 때 박병호의 트레이드를 끝까지 반대했다고 한다.


1.4. 요미우리 자이언츠 2기[편집]



1.4.1. 2021 시즌[편집]


요미우리 자이언츠 No.78
김기태(金杞泰)
2020 시즌이 끝나고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키움 히어로즈의 사령탑이 공백이 되면서 선동열, 김경문과 함께 감독 후보로 물망이 올랐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2020년 12월 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2군 수석 코치 제의를 받아 11년만에 NPB로 복귀했다.# 이로서 요미우리 계열 스포츠단 코치엔 죄다 한국인이 있게 되었다.[6]

아베 신노스케 2군 감독이 갑작스럽게 1군으로 콜업되면서 니오카 토모히로라는 사고뭉치 감독대행과 함께 하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시즌 중에 나카타 쇼가 들어오면서 본의 아니게 군기반장이 되게 생겼다(...).


1.4.2. 2022 시즌[편집]


요미우리 자이언츠 No.88
김기태(金杞泰)
2021시즌의 모든 일정이 종료된 후 코치진의 인사 이동이 이루어졌는데 고토 코지 1군 메인 타격코치가 3군 타격코치로 내려가면서 1군 메인 타격코치로 승격하게 되었다. 11월 15일 보직이 최종 확정되었고 무라타 슈이치가 내야 수비코치직을 겸하면서 김기태를 보좌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즌 준비 도중 폐결핵이 발생되어 중도 귀국했다.현지기사 광주 기독병원에 입원했다고 알려졌다.

4월 15일자로 요양을 마친 뒤 현장에 복귀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일단은 2군에 합류하며 추후 요코가와 후미노리 1군 타격 코치와의 보직 전환과 관련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기사

4월 19일 1군에 타격 코치로 합류했다.현지기사

나카타 쇼를 열혈지도하는 모습이 보도됐다.# 쇼는 이제 죽었다 [7]

7월 현재 팀 홈런은 1위이나 팀타율이 센트럴리그에서 뒤에서 2등에 그치고 있는데, 테이블세터와 하위타선에서 까먹는 게 매우 크다. 요미우리가 꼴찌권으로 나락간 가장 큰 이유가 물론 우노 마사루가 빙의된 수비와 틈만나면 핵실험 저지르는 불펜때문이지만. 다만, 작년에 폭행으로 인해 무상 트레이드로 건너온 나카타 쇼 하나만큼은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긴 하다.

트위터에 직캠 등이 올라오는 걸 보면 선수들과는 잘 지내는 듯한데, 경기 전 선수들에게 두피안마를 해주는 듯하며 오카모토 카즈마에게 어깨안마를 해주기도 했다(...). 요미우리가 코로나19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 카메이 요시유키 코치와 함께 감염되지 않았다.

2022시즌 68승 3무 72패로 센트럴리그 4위에 머무른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10월 6일 김 전 감독을 포함한 코치진 6명의 퇴단을 공식 발표했다.#

2022 시즌 종료 후 가을야구 진출 실패 팀 혹은 감독계약이 만료되는 팀들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김기태의 행선지 또한 주목할 부분인데 LG 감독을 맡아서 10년 동안 가을야구에 가지 못했던 암흑기를 청산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KIA도 김기태 감독 체제에서 최초로 3년 연속 가을야구 및 8년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록하는 등 확실한 임팩트를 남긴 공은 분명 있지만, 두 번이나 '자진 중도 퇴진'이라는 불명예 기록과 경기 외적, 내적으로도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는 만큼 앞으로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는 두고봐야 알 것이다.

다만, 2022년 폐질환으로 인해 시즌 중간에 쉰 적이 있는 만큼 건강 문제가 2023년의 지도자 생활에 변수가 될 것이다.


1.5. kt wiz 2군 감독[편집]


2022년 10월 14일, kt wiz의 2군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휴식기 없이 바로 현장으로 복귀했다. 2군 팜이 황폐화되어 선수단이 노쇠화된 kt의 야수 유망주를 배출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다만 kt가 준PO 탈락 직후 마무리캠프에는 요미우리와의 계약이 아직 남아서 합류하지 못했다.

한편 아들 김건형이 kt 소속으로 군 복무 중인데, 전역할 때까지 방출되지 않는다면 비록 2군이지만 부자가 한 팀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만나게 된다.

이강철 감독의 요청으로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팀 수석 겸 타격코치를 맡았으나 첫 경기인 호주전 전날인 2023년 3월 8일에 조기 귀국하게 됐다. 사유는 이전부터 발목잡았던 건강 문제. 공석이 된 타격코치 자리는 보강없이 심재학 퀄리티컨트롤 코치가 맡게 되었고, 현재 kt wiz 2군은 서용빈 코치가 대행으로 맡고 있는 중이다.

2. 감독 경력[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최종 순위
2012
LG 트윈스
133
57
72
4
7위
-
2013
128
74
54
0
2위
3위
2014
17
4
12
1
9위[A]
-
통산
278
135
138
5
­.495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최종순위
2015
KIA 타이거즈
144
67
77
0
7위
-
2016
144
70
73
1
5위
5위[B]
2017
144
87
56
1
1위
우승
2018
144
70
74
0
5위
5위[B]
2019
42
13
28
1
10위[A]
-
통산
576
307
308
3
.499­
총계
896
442
446
8
.498­


2.1. LG 트윈스 감독[편집]



2.1.1. 2012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기태(1969)/201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LG 트윈스 No.91
김기태(金杞泰)


파일:external/photo.hankooki.com/yoyo201204032026440.jpg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3092001001724300130701.jpg


2012년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나이가 42세로 시즌 당시 최연소 감독이었으며, 나이가 젊다 보니 타격 케이지 안에서 직접 타격 시범을 보여주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되었다.

2.1.2. 2013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기태(1969)/201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LG 트윈스의 10년에 걸친 암흑기를 청산한 해였다.


2.1.3. 2014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기태(1969)/201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즌 초반에 성적이 좋지 않자 사퇴. 런기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2.2. KIA 타이거즈 감독[편집]


KIA 타이거즈 No.77
김기태(金杞泰)


파일:김기태2019.png



2.2.1. 2015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기태(1969)/2015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pgr21.com/1429099516_BandPhoto_2015_04_15_20_59_10.jpg

쓰리피트 아웃에 항의하다가 그 거리를 보여준다며 직접 누웠고, 이로 인해 눕기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하나 더 만들어졌다.


파일:4jKJHYo.jpg

러브 투게더 시프트. 미국 ESPN에 소개 될 정도로 엄청난(?) 시프트 였다.


2.2.2. 2016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기태(1969)/2016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KIA 타이거즈에서 2년차. 프런트에게 FA 선수 중 손승락을 꼭 잡기를 요청했지만, 아무도 잡지 않았다. 하지만 구단 내 재활 시설과 선수육성 시스템에 대규모 투자를 하면서 리빌딩에 더 큰 도움이 될만한 해다.

지난해 어느 정도의 리빌딩과 작년보다 나아진 용병 투수들을 보면 기대가 되는 시즌. 그리고 시즌 전 순위 예상을 뒤엎고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는 데에 성공했다.

LG 트윈스에 이어 기어코 감독 2년차에 가을잔치 티켓을 거머쥐었다.


2.2.3. 2017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기태(1969)/2017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2017103001002530700198521_20171030235326856.jpg


이제는 우승을 향해 전력질주해야 할 KIA 타이거즈의 3년차. 프런트에게 브렛 필을 대체하는 좌타 외국인 선수와 최형우를 꼭 잡기를 요청했고, 전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최형우도 잡았고 나지완양현종도 잔류시키고 외국인 타자까지 로저 버나디나로 교체해주었다. 구단의 과감한 투자에 보답하는 성적을 내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타이거즈 부임 3년차가 되자, 이제는 김기태 감독의 성향을 '잘 알게 된' 선수들이 알아서 시즌 전 몸을 만드는 습관을 기르게 되면서 2년 동안 해온 체력테스트를 없앴다. 김 감독 시각에서는 이제는 준비가 잘 되었다고 판단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윤석민이 시즌 전 어깨 뼈 수술로 이탈이 불가피해지면서 4, 5선발 및 중간계투 구성을 고민해야 하게 되었다.

마무리캠프와 스프링캠프 동안 큰 부상이나 충돌 없이 무탈하게 팀 훈련을 이끌었다.[8] 무엇보다도 최형우의 가세 및 안치홍-김선빈의 제대 등으로 주전 층이 두터워지면서 백업층 역시 다양해지면서 운용 폭이 커진 것이 김기태 감독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투수력은 리그 중간급이나 공격력은 단연 1등팀.

결국 2017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을 상대로 시리즈 전적 4승 1패를 거두며 기아 타이거즈에게 11번째 우승을 선물했다. 그리고 김기태 본인으로서도 선수와 지도자 커리어 통틀어 첫 우승이다.


2.2.4. 2018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기태(1969)/2018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KIA 타이거즈 출범 이후 최초로 3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을 이끈 감독이 되었다.[9]

다만 야구 내외적으로 잡음이 많았던 시즌.


2.2.5. 2019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기태(1969)/2019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즌 도중 사퇴하였다. 조범현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오랜만에 팀을 우승시켰으나(2009, 2017) 성적 부진으로 인해 팬들의 비난에 의해 연임 2년차(2011, 2019)에 자진 사퇴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물론 차이점도 있는데, 조범현은 포스트시즌이 끝나고 사퇴했으며 2011년 당시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1위를 질주하다가 후반기에 급추락했으나 결국 최종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는 진출했다. 그러나 2019년의 김기태는 프로야구 출범 이후 해태 타이거즈 포함하여 타이거즈 역사상 최악이라고 할 정도로 시즌 시작부터 답이 없는 형편없는 성적을 보였다.

이런 형편없는 몰락의 배경에는 16년 와일드카드 결정전, 17년 우승, 18년 와일드카드 결정전 이라는 성적을 보여줬음에도 주축 선수들이 먹튀 또는 부상으로 전력이 급하락하면서 성적도 같이 떨어지게 된 점도 있으나, 감독(코칭스텝들의 책임과 권한)의 역할도 크며, 전술적인 무능과 선수 부상 등의 배경에 이들의 잘못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들이 있기에 이 모든 것을 선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럴 경우에는 과거 노리타들이 범했던 것과 같은 우를 범하는 꼴이 될 수 있다. 믿었던 선수들이 제정신이 아니어서 부진에 빠졌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으나, 이미 17년 하반기부터 타자들의 노쇠화에 대해서 몇몇 팬덤에서는 지속적으로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실제로 17년, 18년 주전야수 막내가 안치홍이었던 것을 고려해보면 야수진의 고령화가 진행중이었다. 즉, 하루 아침에 선수단이 무너진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이는 4년 연속 통합 우승을 해오던 삼성 라이온즈의 몰락 과정과[10] 00년대 한화 이글스의 몰락 과정에서도 보였던 것이다. 이미 수차례 반복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프로 감독이 이러한 사례들을 전혀 학습하지 않은 수준의 팀 운영을 보였다는 것은 감독으로서의 재능과 노력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분명 주전 선수들의 성적이 떨어진 부분은 변명거리가 될 수 있으나, 2년간 수도 없이 팬덤과 외부 전문가들이 이야기 해 온 운영을 고집하여 몰락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후술할 투수 운영 문제에서 투수를 여럿 갈아마셨으니 감독으로서 운영능력에 대해서는 KIA 타이거즈 사상 최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11] 수많은 악재에 대해서 수도 없이 경고해왔으나 그것을 무시하고 밀어부친 주제에 변명을 한다는 것은 후안무치의 끝이 될 것이고, 경고하던 사람들이 운이 좋아서 버틴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결과물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

김기태가 사퇴하자 놀랍게도 KIA의 팀 성적이 갑자기 껑충 뛰었다. 결과 뿐만이 아니라 여러 지표 면에서도 상당히 좋아져서, 선수들이 태업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 아닌 의혹도 제기되고 있으며, 있는 자원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무능한 감독이라는 반증이 될 가능성이 열려버렸다. 동시에, 임창용과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 등으로 차후 감독을 맡게 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더군다나 소위 어용기자라 불리는 기자들이 지속적으로 임창용만 공격하고 김기태의 이야기는 청취하지 않으면서, 막장스캔들에 연루되어 있으면서 말 한마디 안하고,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은 옹졸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데[12], 감독으로서 인격과 실력이 모두 실격이라는 판정패를 당할 위기에 놓여져 있다. KIA 팬들의 바램과는 달리 KIA 타이거즈가 김기태 감독 커리어상 마지막 감독이 될 수도 있는 상황.

다만 2004년 유남호[13]도 돌풍을 불러일으켰다가 2005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지하에 틀어박혀버리는 상황도 있었기에 평가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지켜보는 것이 타당한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김윤동[14], 황인준[15], 홍건희[16], 한승혁[17], 유승철[18], 윤석민[19] 등 투수를 갈아마시고, 선수들을 이용하여 언플하고, 팬들을 향한 위선적인 모습들과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이 떠난 점들이 서정환과 쏙 빼닮았다. 심지어는 투수 문경찬을 대타로 세우거나 임창용의 정당한 발언을 항명으로 치부하고 사적 감정으로 팀을 운영하는 등 더 심각한 패악질까지 부렸다. 성과상으로는 팀 차원에서는 가장 큰 업적을 세웠으나[20] 하는 짓거리는 초대 금지어와는 전혀 다를바가 없으므로 럭키 서정환 이란 악명은 KIA 타이거즈 팬들에게 영원히 입에 오르내릴 것이며, 만일 이후 KIA 타이거즈가 상승세로 간다면 감독으로서는 두 번째 금지어로 확정될 것이다. 현재도 확정적인 분위기이나 결론은 내후년 이후에 내리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2019 시즌 종료 후 돌이켜보아도 금지어가 확정적인 분위기이다. 일단 구위만으로 오승환을 연상시킬 정도의 묵직한 직구를 던지던 김윤동의 인생을 작살내놨으며, 팀 투수 운영을 제멋대로 해서 임창용이 총대 멨다가 말도 안되는 과정으로 강제로 옷을 벗겨버리고, 그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된 투수들을 박살낸데다가 창단이래 첫 10위, 밑도 끝도 없는 양아들 사랑과 뎁스를 늘려놓기만 하고 활용조차 안 하는 방치형 육성, 팀 케미스트리 저해 등 단순히 2017 시즌 우승 하나만 놓고 미화하기에는 적어도 2018 ~ 2019시즌 모습은 노망난 강병철을 다시 앉혀놓은 06~07시즌의 롯데 자이언츠와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싸지른 똥들이 팀을 여전히 아작내고 있는 것도 있다는 점에서 우승시즌 감독이다 라는 말 말고는 도저히 좋게 포장해줄 건덕지가 단 하나도 없다. 당장 오자마자 FA로 영입한 이대형을 내동댕이 친 것도 있고. 아무리 결과적으로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지만 FA로 사왔고 직전 시즌 주전으로 뛰었던 선수를 풀어주는 감독이 있었는가? 게다가 임창용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재원 견제 사건도 김기태의 지시였다고 하니, 파도파도 괴담 그 자체인 감독이다. 우승하고도 금지어가 되는 KBO에서도 정말 드문 케이스.

퇴임 후에는 쉬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 하다. 토론토에서 벌어진 2019 NBA 파이널 1차전 때 김기태 전 감독으로 보이는 사람이 카메라에 잡혀 여러 커뮤니티에서 본인인지 아니면 그냥 닮은 사람인지 갑론을박이 벌어졌는데, # 그냥 닮은 사람이라기엔 너무 본인과 유사하고 결정적으로 가족들이 토론토에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김기태가 맞는 것으로 굳어지는 분위기. 만일 맞다면, NBA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KIA 측에서 편의를 봐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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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5 23:28:03에 나무위키 김기태(1969)/지도자 경력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육성 코치 시절 등번호.[2] 2군 타격 코치 시절 등번호.[3] 그래서 김성근이 공백기에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코치 생활을 할 수 있던 것이다.[4] 원래 예정된 분은 김동재 전 기아 타이거즈 코치.[5] SK 시절 선수와 코치로 잠시 함께한 인연이 있다.[6] AXIZ에 하재필 고문, 이태운, 김창성 코치가 있다.[7] 취소선을 쳤지만 농담이 아니고 진짜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LG 2군 감독 시절 박병호에게 "그렇게 할거면 그냥 집에 가!"라고 불같이 화를 내거나, 다른 코치진들에게는 "쟤 타격폼 아무도 손대지마라. 손대는 사람은 죽는다."라며, 박병호를 지금의 홈런타자로 있게 만든 당사자이다. 거기에 이 팀은 아베 신노스케, 무라타 슈이치까지 있다. 셋 다 한성깔 하는 분들인 건 덤(...)[A] A B 시즌 중도 사퇴[B] A B 와일드카드 결정전 敗[8] 다만 박경태가 어깨 통증으로 재활군으로 보내지는 등 캠프 이탈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9] 일전에 김성한에 이은 2호 감독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김성한 감독은 2004년 시즌 중 경질되었고 잔여시즌은 유남호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시즌을 4위로 마무리했기 때문에 1호라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10] 2015년 윤오안임의 도박사태의 여파가 분명 있었으나, 주전야수들의 대안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성과만을 고려한 운영의 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있는 선수들을 극한으로 뽑아먹었다고 봐도 된다.[11] 세대교체 면의 육성문제에서는 김성한, 조범현이 낫고 선동열에게 투수관리는 밀린다. 투수운영 면에서는 서정환과 비견되는 수준.[12] 물론 그럴 의도가 있는지 없는지는 본인들만 알고 있을 것이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김기태가 잘못을 시인하는게 아니라 "이러한 사단이 난 것은 제가 모자라서 난 것이다. 제가 다 감내하겠다" 라는 식으로 언플이라도 했으면 덕장 코스프레도 해가면서 극소수의 지지층들 덕택에 어떻게든 권토중래가 가능했을 것이다.[13] 프로야구 원년부터 여러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지만 해태 - KIA에서 상당히 오래 있었다. 이 때문에 감독 취임 당시만 해도 문제가 없었지만 그 다음 시즌은....[14] 말 안해도 모두가 알겠지만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다 주저앉은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2020시즌이 개막하기도 전인 4월 9일자로 수술 소식이 알려졌으며 이 수술로 인해 2020시즌은 물론이고 2021시즌도 장담하지 못하는 수준의 부상임이 확정되었다. 참고로 2018시즌 같이 구른 임기준도 2019시즌에 복귀를 하긴 하지만 결국 통증때문에 은퇴한다.[15] 팔꿈치 통증으로 말소된 이후로 퓨처스리그에서도 보이지 않는 중. 2020시즌에는 연습경기에서 모습을 보였으나 2021시즌 중 방출되었다.[16] 2016시즌 전형적인 노예로 구른 뒤에 구위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두산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여기 언급된 투수들 중에서 2021년 현재 가장 잘 나가고 있다.[17] 2018시즌 선발로 겨우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투수를 수시로 불펜대기시켰다. 특히 우천취소된 6월 10일 경기에서는 직구가 142km/h가 찍히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정도로 미친듯이 굴렀다. 2018년에 선발 로테이션을 돌던 당시 직구 평균구속이 151을 기록하고 최고구속 155km/h를 쉽게 던지던 선수가 이 정도의 구속하락을 겪을 정도면 대체.. 2019 시즌에는 재활군과 2군을 전전하다 결국 입대하게 되었다.[18] 재활을 마치고 온 투수를 미친듯이 갈아마신다. 한달에 250구를 넘게 던진 달이 무려 2번 있었으며, 140 초중반을 오가던 평균구속이 7월 27일 이후 평균구속이 130후반~140 에서 머무르게 된다. 이후 2019시즌 재활군과 2군을 전전하다 현역입대를 택하게 된다.[19] 비록 2015년 한 해였지만 그 해에도 상당히 굴렀다. 결국 2015 시즌을 끝으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2020시즌 개막 전 은퇴하게 된다. 다만 은퇴 과정은 다소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다.[20] KIA 타이거즈 최초로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 감독이니 팀 차원의 성과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이 본인의 능력이 아니라 선수들의 능력과 운이 같이 따랐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