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아레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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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아레나스의 수상 이력






베스트팀
파일:NBA 로고.svg

2nd : 2006-07
3rd : 2004-05 · 2005-06







파일:길버트아레나스.jpg

길버트 제이 아레나스 주니어
Gilbert Jay Arenas Jr.

출생
1982년 1월 6일 (42세)
플로리다주 탬파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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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애리조나 대학교
신장
193cm (6' 4")
체중
98kg (215 lbs)
윙스팬
207cm (6' 9.5")
포지션
포인트 가드
드래프트
2001 NBA 드래프트 2라운드 31순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지명

소속 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2001~2003)
워싱턴 위저즈 (2003~2010)
올랜도 매직 (2010~2011)
멤피스 그리즐리스 (2012)
상하이 샤크스 (2012~2013)
등번호
0번 - 골든스테이트 / 워싱턴
1번 - 올랜도
9번 - 워싱턴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입단 전
3. NBA 커리어
3.1. 골든스테이트 시절
3.2. 워싱턴에서의 전성기
3.3. 부상
3.4. 사건사고와 몰락
4. 플레이 스타일
5. 수상 내역
6. 기타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NBA에서 활동했던 농구선수. 2라운드에 뽑혀 주목받지 못하다 올스타급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특이한 정신세계 및 기행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나 빠르게 몰락한 괴짜 가드. 아디다스 광고 모델로 한때 주목받았다.

별명은 '에이전트 제로'.

2. 입단 전[편집]


길버트 아레나스는 플로리다 탬파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약물 중독에 빠져 LA로 이주해 홀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어렸을 때부터 농구에 빠진 아레나스는 그랜트 고등학교에서 농구선수로 대활약했으며 당시 등번호인 25번을 영구결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고등학교가 농구 명문은 아니여서 크게 인지도를 얻지는 못하고, 그는 애리조나 대학교에 진학한다. 아레나스가 성공하리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몇몇은 심지어 아레나스의 출장시간이 0분이 될거라고 무시하기도 했다. 이에 아레나스는 자신의 등번호를 0번으로 정하게 된다.

아레나스는 1학년때부터 평균 15.4점을 득점해 사람들의 의견을 불식시켰으며 2학년때는 16.2점을 기록하며 애리조나대를 NCAA 토너먼트 파이널까지 올려놓는데 공헌했다. 자신감이 붙은 아레나스는 2001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는데...


3. NBA 커리어[편집]



3.1. 골든스테이트 시절[편집]


대학리그에서 준수한 커리어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레나스에 대한 평가는 '운동능력이나 슛은 뛰어나지만 포인트가드와는 성향이 맞지 않고 슈팅가드를 하기에는 키가 작은 어정쩡한 선수' 였다. 2000년대 후반부터 데릭 로즈러셀 웨스트브룩 등 듀얼가드가 활약하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타입의 선수에 대한 평가가 안좋았다.

1번과 2번 사이의 트위너였던 아레나스는 드래프트 1라운드가 끝날때까지 호명되지 않았으며 결국 2라운드가 돼서야 전체 30번이라는 낮은 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코트에서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벤치나 덥혀야 했다.

골든스테이트의 부진으로 헤드코치가 교체되고 나서야 아레나스는 출장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두각을 드러낸다. 연속으로 두자리 수 이상의 득점을 올리며 선발멤버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 4월에는 이달의 신인으로 뽑히기도 하며 루키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2년차에는 모든 경기에서 선발출장하며 18.3득점 6.3 어시스트 4.7 리바운드라는 좋은 기록을 뽑아내며 기량발전상을 수상했다. 루키 챌린지 게임에서 소포모어 팀으로 참가해 MVP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2라운드 출신인 아레나스는 바로 프리 에이전트가 된다.


3.2. 워싱턴에서의 전성기[편집]


03-04 시즌을 앞둔 시점에서 워리어스는 샐러리 캡 때문에 주전이 된 아레나스와 고연봉으로 재계약하는게 불가능하게 되었고 많은 팀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레나스는 워싱턴과 6년 $60M의 계약을 맺는데, 이때 갈 팀을 동전던지기를 해서 정했는데 LA 클리퍼스가 워싱턴 위저즈보다 많이 나왔는데 더 적게 나온 워싱턴을 골랐다나 뭐라나.

워싱턴에서의 첫 시즌에서 복근 부상으로 몇 경기를 날려먹기는 했으나 19.6득점 5.0어시스트를 뽑으며 적응을 완료했으며 04-05 시즌부터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골든스테이트 시절부터 함께 뛰기도 했던 앤트완 재미슨, 슈팅가드인 래리 휴즈와 같이 워싱턴을 오랜만에 플레이오프로 이끄는데 성공했으며 최초로 올스타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2005년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 불스와 1라운드에서 만났을 때 2:2 동률 이후 5차전에서 버저 비터를 꽂으며 6차전에서도 승리했다. 2차전에서 마이애미 히트에게 스윕당했지만. 다음 시즌때는 커리어 하이인 평균 29.3득점을 기록해 워싱턴의 확실한 에이스가 되었다. 단 06년 올스타전에는 뽑히지 못해 저메인 오닐의 대타로 참가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만난건 리그 최강의 선수가 되어가던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르브론에게 뒤지지 않는 활약을 펼쳤으나 시리즈 스코어는 2:3으로 뒤쳐지는 상황에서 맞이한 6차전.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막판 아레나스는 자유투 찬스를 얻는다. 첫번째 자유투를 실패하자 르브론이 다가와 "이번에 실패하면 너희는 ㅃㅃ2라능." 이라 말을 걸었고 아레나스는 다음 자유투도 실패한다. 이후 데이먼 존스가 역전포를 꽂으며 113-114로 워싱턴은 짐을 싸야 했다.

이런 일도 있었지만 아레나스는 이후로도 훌륭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한편 하프타임동안 포커 게임을 한다든가 유니폼을 입은 채 샤워를 하는 등 기행을 해 '길버톨로지' 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대스타가 된다. 한국에서도 '길교주' 라는 별명이 붙고 워싱턴의 동료인 앤트완 재미슨은 '안장로', 캐런 버틀러는 '캐집사' 라고 덩달아 불리기도 했다.

2007년 1월 유타 재즈전에서의 버저 비터. 공이 들어가는걸 확인하기도 전에 뒤로 돌아서서 양손을 펼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간지폭풍.##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아디다스의 대표모델도 되고, NBA 라이브 08의 표지에도 등장하기도 했으나 여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당시 아레나스 시그니처 모델인 길제로는 로우컷 모델로 KBL선수들도 많이 신었다.


3.3. 부상[편집]


06-07 시즌이 끝나가는 4월, 아레나스는 샬럿 밥캣츠제럴드 월러스와 충돌하며 무릎을 다쳐 시즌 아웃된다. 위저즈는 아레나스뿐만 아니라 버틀러도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다시 만난 클리블랜드에게 탈탈 털려야 했다.

다음 시즌이 시작된 후 8게임을 뛰었지만 회복이 덜됐기 때문인지 부진을 겪어 오랜 기간동안 결장하게 된다. 위저즈의 플레이오프 진출이 간당간당해진 막판에 복귀해 벤치멤버로 뛰고 클리블랜드와 또다시 1라운드에서 만나지만, 완치도 안됐으면서 4차전에서 무리하게 뛴 나머지 또다시 나가떨어지고 만다. 결과는 르브론이 미쳐 날뛰면서 2-4로 클리블랜드가 진출.

이후 아레나스는 재미슨과 같이 워싱턴과 재계약하지만 2007년부터 시작된 부상에 시달리며 08-09 시즌에 거의 뛰지 못했다. 워싱턴은 이 시즌에 동부 꼴찌를 차지한다.


3.4. 사건사고와 몰락[편집]


2009-2010 시즌에는 건강을 되찾고 길교주로서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는 듯 싶었다. 그러나 락커룸에 총기를 가져와 도박빚 문제로 팀메이트인 자바리스 크리텐튼[1]에게 겨누는 초대형사고를 치고 만다. 최고 징역 5년까지 선고받을 수 있었으나 보호관찰 2년 및 사회복귀훈련 30일 선에서 끝났는데, 아레나스는 또 한번 정신을 못 차리고 얼마 뒤 손가락으로 총 쏘는 흉내까지 냈다..결국 빡친 데이비드 스턴 총재가 출장정지 명령을 내리고 워싱턴은 당연히 09-10 시즌도 말아먹는다. 아레나스의 인기에 한몫한 돌아이 기질이 최악의 경우로 발현된 사건.

이후 아레나스는 절치부심하는 심정으로 등번호를 '에이전트 제로' 라는 별명을 선사한 0번에서 9로 바꿨지만 이미 팀의 중심은 루키 존 월이 되었고, 부상과 불미스러운 사건을 겪은 아레나스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결국 2010년 12월 18일 올랜도 매직라샤드 루이스와 트레이드되면서 쫓겨난 뒤 올랜도에서 별 활약을 하지 못한다. 이때는 페니 하더웨이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1번을 달고 뛰었다.

올랜도에서도 방출당한 아레나스는 멤피스에서 잠깐 백업멤버로 뛰다가 11-12 시즌이 끝나고 중국 CBA의 상하이 샤크스로 떠난다. 2라운드 출신 스타의 최후는 너무나도 허무했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폭발적인 득점력을 가진 듀얼 가드로, 득점력에 한해서라면 당대 최고수준의 가드였다.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지만 리딩보다는 득점에 주력하는 전형적인 스코어러 마인드의 선수였다. 폭발적인 스피드와 탄탄한 몸에서 비롯되는 돌파와 준수한 슈팅을 모두 겸비하였으며, 3점 라인에서 빠르게 던지는 묻지마 3점이나 짧은 돌파 후 던지는 미드레인지 점퍼 등도 훌륭했다. 굉장히 터프하고 공격적인 셀렉션을 가져감에도 높은 효율로 득점을 해내니 팬들도 할 말이 없던 선수. 패스는 돌파하면서 공간을 만든 후 비어있는 팀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주였고, 패싱이나 경기운영에 대한 감각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선패스 마인드는 아니었다. 잘 풀릴땐 전성기 코비같은 슈퍼스타들을 상대로 조금도 꿇림이 없는 활약을 펼치는가 하면, 슈팅 감각이 좋지 않은 날에는 무분별하게 난사하며 니갱망을 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비에서는 의지가 크지 않고 전술 이해도나 집중력도 낮아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다만 묵직한 근육질의 몸, 빠방한 운동능력, 신장대비 좋은 윙스팬 덕에 하드웨어는 당대 포인트 가드 중 최강급이었고, 작정하고 막는다면 꽤나 위협적인 대인 수비수로 변모하기도 했다. 떡대와 팔길이 덕에 스몰포워드를 막을 때도 그다지 미스매치라는 인상이 들지 않는 선수였다.


5.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기량발전상 (2003)
파일:NBA-Allstar2021.pngNBA 올스타 3회 (2005-2007)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세컨드 팀 (2007)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서드 팀 (2005, 2006)

파일:NBA 로고.svg NBA 라이징스타 챌린지 MVP (2003)


6. 기타[편집]


  • 길버트 아레나스가 워싱턴 위저즈로 이적하게 된 사건은 이후 길버트 아레나스 룰이라는 규정의 변화를 가져온다. 자세한 것은 샐러리 캡 문서 참조.


  • 현역시절 괴짜스런 언행으로 유명했던 아레나스답게 2007년 자신의 25번째 생일을 맞아 1백만달러짜리 생일 파티를 연 적도 있다. 워싱턴에 위치한 나이트클럽에서 열린 이날 파티의 진행은 힙합스타 P. Diddy가 맡았으며 수많은 유명인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 캘리포니아의 슈팅게임에서 하도 많이 양학을 해서 상품을 쓸어가는 바람에 참가금지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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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에 인터뷰에 따르면 르브론 제임스의 아들 브로니 제임스를 코치하고 있다고 한다. 르브론 본인에게 "내 아들좀 돌봐줘"라고 요청받고 몇 달째 농구를 교육시켜주는 중이다. 르브론은 아들의 장래를 걱정 중인데, 아레나스에 의하면 "걔는 너의 클론이라 걱정할 게 없다. 성장하면 6-9까지 클 것 같다" 라며 피지컬 적으론 문제 없을 것이라고 르브론을 안도시켰다고 한다.


7. 관련 문서[편집]



[1] NBA에서 2년밖에 뛰지 못하고 떠난 가드로, 2007년 살인죄로 기소 되었던 상황이였고, 2009년 NBA에서 퇴출 후 2011년 살인죄로 23년형을 선고받는다. 크립스의 멤버인 레알 갱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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