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영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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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영 전투
崎離營戰鬪

시기
246년 8월 이후[1]
장소
대방군 기리영[2]
원인
낙랑군의 분할 통치에 대한 신분활국의 반발
교전국



마한[3]
주요 인물
부종사 오림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
신분활국의 이아불예[4]
병력
불명
불명
피해규모
불명
불명
결과
신분활국 멸망, 마한의 임진강·북한강 상류 영향력 소멸
낙랑군의 약화
영향
백제의 급성장

1. 개요
2. 배경
3. 주체는 어디인가
4. 경과
5. 결과
6. 영향
7. 관련 기록



1. 개요[편집]


246년, 위나라에서 보낸 부종사 오림이 진한 8국의 땅을 떼어내어 낙랑군에 속하게 했으나, 통역하는 자가 이를 잘못 전하자[5] 마한의 어느 소국에서 반발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위나라에서는 대방군, 낙랑군이 연합해 마한을 공격했다.


2. 배경[편집]


삼국시대의 혼란으로 중국 본국의 한사군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자 237~239년 명제 조예는 태수들을 파견해서 과거 공손씨 동연의 영토였던 낙랑군대방군을 평정하고, 주변 한(韓) 세력에 회유책을 펼쳤다.

246년 8월, 위나라의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 공격에 나선 사이에 낙랑군의 관리였던 부종사 오림은 그때까지 마한을 거쳐 무역해오던 진한 8국을 따로 떼어 낙랑군과 직교역하게 하려고 했다. 이는 진한의 환심을 사고 마한도 견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위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통역에 차질이 생겨서[6] 임진강 유역 마한 소국들을 격분하게 하였다. 사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통역을 제대로 했어도 마한에서 분노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때까지 독점 무역 창구로 기능하던 마한의 권위와 영향력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진한을 마한과 동급으로 대우하겠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가뜩이나 고구려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중국계 유민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마한이 거슬렸던 위나라의 입장, 진한이 마한보다 문화 수준이 발달했으며 중국에 더 우호적이었던 상황[7] 등을 고려하면 나름 합리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기득권을 침해당하는 마한 소국들은 이러한 처사를 결코 납득할 수 없었다.


3. 주체는 어디인가[편집]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한 그 한(韓)의 신지가 한의 소국 중 어느 나라의 신지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이에 대해 크게 백제국설, 목지국설, 신분활국설로 3가지 견해가 있다. 과거에는 백제국설과 목지국설이 대립하는 양상이었으나, 최근에는 《통지(通志)》에 인용된 고문 《삼국지》에 기반해 신분활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우세한 상황이다.

이는 기존에 알려져 있었던 명나라 이후의 판본에서 "신지가 격분하고 한인들이 분노하여(臣智激韓忿)"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통지(通志)》에 인용된 보다 오래된 판본에서는 "신분고한이 분노하여(臣濆古韓憤)"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분활국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중 마한 54개국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백제국보다도 앞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 소국들의 위치는 대체로 뒤로 갈수록 남쪽으로 비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분활국은 황해도 지방의 대방군과 교전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같은 문헌에서 삼한의 신지들 중 특별히 우대되는 신지들의 칭호로 구야국의 진지렴(秦支廉), 안야국의 축지(踧支), 신운신국의 견지보(遣支報)와 함께 분신(濆臣)의 이아불예(離兒不例)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분신'은 '신분(臣濆)'을 잘못 기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신분활국금관국, 안라국침미다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당시 마한에서 유력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일개 소국이 위나라 관할 하에 놓인 대방군을 공격할 만한 세력을 거느릴 수 있었던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


4. 경과[편집]


마침 태수들이 고구려 원정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 틈을 노려서 신분활국으로 추정되는 어떤 한(韓)의 신지[8]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고, 백제고이왕낙랑군을 습격했다. 고구려를 공격하러 갔던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은 다시 돌아와서는 복수하겠다며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했던 그 한(韓)을 정벌했다.

이 전투는 일개 소국이 혼자서 대방군에게 도전했다기보다는, 마한 전체를 끌어들여서 결전을 벌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 고고학적으로 이 시기에 마한 전역의 무기 생산량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승리였다. 결국 신분활국의 세력은 위군에 의해 멸망했지만, 백제의 고이왕은 침공을 두려워해서 낙랑군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내며 낙랑군과 화친을 했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었다.


5. 결과[편집]


이로 인해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했던 신분활국은 멸망했고, 위나라의 국력을 체감한 임진강 및 북한강 상류 일대의 마한 구성국들이 모두 한군현에게 복속하는 바람에[9] 마한 맹주국인 목지국의 영향력은 임진강과 북한강 일대에서 완전히 없어졌다. 종전에는 마한의 영향력이 황해도 남부까지 미쳐 대방군과 갈등을 빚었고 강원도 서부와 경기도 동부도 마한의 영역이었으나, 이 전투로 인해 이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모두 잃은 것은 물론 백제국을 포함한 나머지 경기도 지역 소국들 앞에서도 얼굴을 들 수 없게 된 것이다.[10]

그러나 승전국인 위나라도 앞서 어떻게 봐도 명백한 위나라의 승리라고밖에 볼 수 없는 비류수 전투와는 달리, 궁준이 전사한 걸 보면 이 전투에서는 마한 못지 않게 꽤 손실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요동 공손씨 정권의 멸망 이후 사마의가 이쪽 인민들을 내지로 이주시키면서 요동군의 역량이 급격히 쇠퇴했는데, 이는 향후 낙랑, 대방군 일대에서 또 다시 무력 소요가 일어날 경우 위나라가 지원해줄 수 있는 여력이 충분치 않다는 얘기였다.[11] 때문에 이후 위나라 한군현에 충성을 맹세했던 마한 북부의 소국들이 백제국의 영토 확장에 휩쓸리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아주지는 못하게 되었다.[12] 오히려 제대로 된 고대 국가로 성장한 백제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던 정황이 나타난다.


6. 영향[편집]


백제국은 이때를 기점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여, 반 세기도 지나지 않아 기존 마한보다 더욱 응집력 있는 고대 국가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과정에서 한군현에게 복속한 옛 마한 소국들은 대부분 백제국의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목지국 또한 옛 제후에게 하극상을 당하면서 마한의 맹주 자격을 부정당하게 된다. 일종의 어부지리인 셈이다.

한편 한군현이 진한과 직접 교역하게 되면서 진한의 성장에도 이바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하튼 이 전투로 진한왕이 마한왕을 중간에 끼지 않고 한군현과 소통하는 관행이 정착되었으며, 이는 적어도 기원후290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진서를 보면 이후 3세기 중후반 경 한반도 정치체들과의 교섭에서 진한왕이 직접 서진 측에 조공하는 기사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백제국 거수가 마한왕이 되었다지만 그 이전 마한왕이었던 목지국 거수와는 달리, 진한왕보다 우위에 서지는 못했던 관행이 정착된 것.[13]


7. 관련 기록[편집]


경초 연간(237~239)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해서 바다를 건너가 2군을 평정하도록 했으며, 여러 한국의 신지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했고, 그 다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그 풍속에 옷 입고 책(幘) 쓰기를 좋아하여, 하호들도 군에 이르러 조알하면서 옷과 책을 빌려서, 스스로 인수와 옷과 책을 갖춰 입은 자가 1,000여 명이었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본래 낙랑이 한국을 통치해왔다며 진한의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고 했는데, 통역사가 말을 다르게 전하자 신지가 격분하고 한인들이 분노하여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벌했는데, 궁준이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한을 멸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


정시 6년(245년)에 낙랑태수 유무대방태수 궁준(領) 동쪽의 예(濊)가 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했는데, 불내후(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예조


고이왕 13년(246년)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貫丘儉)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태수 왕준[14]

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오게 했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했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걱정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정시 7년(246년)에 유주자사 관구검고구려를 토벌했다. 여름 5월에 예맥을 토벌하여 모두 격파했다. 한나해(韓那奚) 등 수십 국이 각기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삼국지》 〈위지〉 제왕기


《삼국지》와 《삼국사기》의 기록 모두 낙랑태수 유무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대방태수 궁준과 삭방태수 왕준은 동일인으로 추정되며, 삭방태수 왕준 쪽이 오기로 여겨진다. 낙랑태수 유무의 공통된 등장으로 인하여 네 기록은 크게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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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 언제 있었던 일인지는 기록에 없으나, 대방군 태수 궁준이 245년 동예 공격(《삼국지》 기록) 및 246년 고구려 공격(《삼국사기》 기록) 때는 살아 있었으므로 기리영 전투의 발생 연도는 246년 8월 이후의 어느 시점으로 파악된다.[2] 위치는 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인산면 기린리 일대로 추정된다. {이병도, 〈三韓問題의 新考察 4-辰國及三韓考〉 (《震檀學報》 5, 1936), p.116.}[3] 정확히 어떤 소국이 위나라를 먼저 공격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적으로는 신분활국이었을 것으로 비정되는 추세이다.[4]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언급된 신분활국의 지도자 칭호이다.[5] 진한과의 외교를 대방군(마한, 진한, 변한, 왜) 대신 낙랑군(동예, 진한)이 담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정까지 간섭해, 아예 삼한에서 진한을 분리해 동예와 함께 통치한다고 전달했을 것으로 보인다.[6] 직교역이 아닌, 그동안 마한을 상국으로 대접하던 진한을 낙랑군한테 넘기라는 식으로 전했을 수도 있겠다.[7] 목지국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고고학적으로 무덤의 철제 부장품류가 동시대 마한보다 더 많이 출토된다. 《삼국지》와 《후한서》 기록 상으로는 진한이 일찍이 중국과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마치 중국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8] 삼한의 군장을 의미한다.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삼한의 거수(渠帥)들 중 세력이 큰 자를 '신지(臣智)'라 불렀다고 한다.[9] 한국군사사 1권 참조. 이후 경기도의 남은 마한 소국들을 모두 병합하고 충청도 일대까지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입한 백제에게 4세기 초반까지 끝까지 항거하게 되는 '말갈'이 바로 이들이다.[10]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 중 온조왕이 대놓고 마한왕을 업신여기기 시작하는 부분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11] 관구검의 고구려 원정에서 위나라가 요동이 아닌 낙랑과 대방의 군사들을 동원한 것이 이런 이유 였다. 후일 사마의의 후예인 진무제가 옛 공손씨가 있던 곳을 유주에서 나누어서 평주와 동이교위를 설치하고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부여를 지원하며 동방을 부흥시키려는 정책을 핀 것도 같은 이유.[12] 단, 고고학적이나 문헌적으로 볼 때 낙랑-대방에게 붙은 옛 마한 거수국들이 백제에게 결국은 한 세대만에 쓸려나가는 국면이지만, 이들이 그냥 손놓고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낙랑-대방군은 간혹 임진강, 강원도 서부 옛 마한 소국들(=위말갈)에게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해주며 백제를 약탈 혹은 공격하도록 충동질했고, 책계왕이 친정했다가 전사했을 정도였다. 다만 중원 정권이 간접적인 지원만 해주고 관구검이나 궁준 마냥 직접 대규모 군대를 투입해가면서까지 도와주질 않았다는 것.[13] 이 시기에는 침미다례의 맹주 신운신국 혹은 신미국 또한 백제의 마한 맹주 자격을 부정하면서 독자적으로 마한왕 행세를 한데다, 충북 일대 마한 목지국 지지 세력이 거세게 백제에게 저항하고 있었으니 애초에 백제의 마한왕 위치도 견고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진한 맹주인 사로국 거수가 이 시기 백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문헌 근거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사로국 또한 백제를 마한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개연성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원래의 마한 수장국이었던 건마국 잔여 세력과, 백제의 협박 탓이었겠지만 천안 용원리 목지국 분가 세력이 백제를 지지한 것과는 별도로, 백제의 마한 맹주 자격은 적어도 372년 근초고왕의 침미다례 정벌 전까진 마한 내부에서도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4] 대방태수 궁준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