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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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
2. 역사
2.1. 초기 기독교 미술
3. 상징
3.3. 예수의 죽음


1. 정의[편집]


기독교[1]적 도상을 사용하며 기독교 관련 문서, 전승을 기반으로 한 것을 작품의 내용으로 사용하면서 기독교의 집단적 혹은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제작된 미술.

2. 역사[편집]



2.1. 초기 기독교 미술[편집]


초기 기독교 미술은 시기 상으로 기원후부터 이후 가톨릭정교회가 갈라서는 서기 500년 이전까지의 시기의 미술이다. 이 시기 미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기독교의 지하 매장소인 카타콤바에 장식된 채색 벽화를 통해서 이 시기 기독교 미술의 양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카타콤바의 천장화를 보았을 때 이 시기에는 초기 기독교의 도상들이 나타나는데,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어깨에 을 짊어진 양치기를 사용한 점. 물고기 등을 사용한 것은 기독교 초기 미술의 상징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본격적으로 기독교 미술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부터였다. 이 시기부터 로마 전역의 중요 도시에는 교회 건물이 들어서게 되고 이에 따라 기독교 미술이 꽃피게 된다. 라벤나 근처에 위치한 클라세의 성 아폴리나레 성당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인데, 비록 건축 시기는 기원후 6세기이지만 건축의 양식 상 전형적인 초기 기독교 건물인 바실리카 양식을 드러내고 있어 초기 기독교 미술의 건축 양식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준다.


3. 상징[편집]



3.1. 아담하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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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아담하와의 창조>, 1511~1512, 바티칸 미술관.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27절)


일찍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벽화 연작을 그리며 성경의 여러 사건들을 모티브로 작품을 제작했다. 그 중 아담의 창조라고 알려진 작품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유럽의 미술가들이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위 그림에서 고귀한 탄생의 순간을 조각적인 인물화로 묘사하고 있다. 미켈란젤로 그 자신이 항상 말했듯 자신의 전공 분야는 단연 조각이었다. 이미 피에타와 같은 작품들은 그가 제작한 여러 예술 장르 중 단연 조각이 으뜸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가 가진 이런 조각에 대한 자신감은 회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뚜렷한 윤곽선의 처리, 세밀한 근육의 묘사는 보는 이로 하여금 회화 속 인물이 아니라 조각의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조각적 표현에만 능숙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특히 아담의 탄생이라 불리는 위의 작품에서 그의 회화적인 능숙함은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다. 구도를 보았을때 그는 수동적 인간과 능동적 하느님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사선의 배경 속에 아담을 배치했다. 또한 전체적으로 뒤쪽으로 후퇴해있는 아담의 모습은 수동적으로 영혼을 받는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반면 좌측의 하느님은 쇄도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 아담과는 달리 능동적인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색감의 측면에서도 미켈란젤로는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가장 두드러지는 표현은 좌측의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원형으로 펄럭이는 망토는 배경의 밝은 하늘과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아담과 하느님의 손이 맞닿는 부분에서도 이러한 대비 효과가 잘 나타나는데 이는 창조의 순간을 강조하려는 미켈란젤로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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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팔리시, <하와의 창조>, 16세기경, 진흙에 유약, 아드리앙 뒤부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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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아담과 하와>, 1507년, 목판, 프라도 미술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창세기 2장 22절)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창세기 2장 25절)


흔히 서양 미술에서 하와에 대한 코드는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와의 탄생과 관련된 부분으로 그에 관한 부분은 위의 성경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부분은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부분으로 이 부분이 교훈적 측면과 사건의 극적인 전개로 인해 빈번히 회화의 주제가 되곤 했다. 특히 중세에 이르러서 하와는 타락한 인간의 상징으로서 또 악마의 꾀임에 넘어가 아담을 유혹하는 존재로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위의 그림에서 하와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오고 있다. 이렇듯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탄생하는 장면은 하와의 탄생 장면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구도인데 아래의 작품에서도 그런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아담과 하와의 창조에서 하와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암시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 그림에는 창세기의 다른 구절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창세기 2장 21절)."의 일부를 작품의 모티프로 삼은 듯 보인다.

아담과 하와를 테마로 한 그림을 볼 때 관람자들이 항상 주목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냐 느끼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약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면 이들은 널리 알려진 인류의 원죄를 이미 저지른 상태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아직 에덴동산의 유토피아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던 시절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차이는 그림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만약 전자의 아담하와라면 이것은 인류의 죄악을 상징한다. 이런 주제의 그림은 대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거나 교훈적인 목적을 위한것이다 만약 그 둘도 아니라면 제임스 앙소르처럼 그저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쪽이든지 그 주제 자체만을 따지고 보았을 때 결코 긍정적인 내용의 주제는 아니다. 반면 후자, 즉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아담과 하와라면 상황은 180도로 변한다. 물론 대개의 경우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라도 선악과를 먹고 원죄를 저지를거라는 암시를 내포한 경우가 많다.

상단에 게재된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에도 그런 암시들이 존재한다. 선악과로 추정할 수 있는 과일을 들고 있거나,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한 뱀의 존재가 그려진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아담하와의 존재는 결국 어떠한 문화적인 덧칠이 가해지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를 상징한다. 특히 이런 순수함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아담과 하와를 이용한 미술이 19세기 몇몇의 상징주의 작가들에게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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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초, <브란카치 경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연작, 베드로의 생애 : 낙원에서의 추방>, 1425~1428년,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

아담하와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인용되고 있는 모티브 중 하나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추방되는 부분이다. 교훈적인 측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류가 원죄를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기에, 화가들에게 이 사건은 수 많은 화가들이 미술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유행했던 11세기 같은 경우 아담하와의 죄악은 성당 건축에 빈번히 이용되었다. 당시 서유럽 민중들의 대부분은 문맹이었기 때문에, 그림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한 것이다. 특히나 로마네스크 양식은 그 특유의 적나라하고 그로테스크한 묘사때문에 종종 아담과 하와가 자살을 한다던가 악마에 홀려 황홀경에 빠진다던가 하는 묘사가 널리 쓰여졌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흔히 원죄로서 인류가 태어나자마다 지니고 있는 죄악으로 여겨진다. 이런 원죄라는 개념은 비단 아담과 하와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주제의 작품을 이해하는 해석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이 주제를 활용한 작가 중 한 명이 원근법을 활용한 투시도법을 처음으로 회화에 적용한 마사초다. 정확한 인체 비례를 기반으로 그려진 아담과 하와의 표정은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의 심정을 반영한다.

마사초의 작품들은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린 화가라는 명성을 가졌음에도 기독교적인 그림이 많다. 물론 기독교가 르네상스 시대에도 빼놓을 수 없는 회화 주제로서 사용되기는 하지만, 마사초는 그 시대를 보았을 때 중세와 르네상스의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이기에 중세적인 양식과 도상이 드러나기도 한다.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거의 모든 작품이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를 주제로 한 대부분의 작품이 성경을 근거로 하거나 성경에는 없지만 가톨릭에서 인정하고 있는 기독교 상징 등을 근거로 하기에 상징의 측면에서 차이를 내기란 쉽지 않다.


3.2. 성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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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 디 본도네, 그리스도의 탄생, 1304 ~ 1306, 프레스코, 스크로베니 성당.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루카 복음서 2장 9-11절)


성탄이라는 소재는 예수의 탄생이라는 중요한 순간을 담은 구절이기에 수없이 많이 활용된 신학적 소재였다. 그리고 성탄이라는 소재는 수 없이 많은 세월을 거치며 재구성되고 반복되어져 왔다. 교회의 힘이 강성했던 중세는 물론이거니와 19세기의 여러 화가들도 성탄이라는 주제를 활용했다.

위의 그림을 그린 지오토 디 본도네는 르네상스가 막 태동하려는 시기에 활약했던 예술가였다. 흔히 고딕과 르네상스의 분수령에 놓인 화가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며 그 이전의 중세 화가들과는 달리 자연주의적인 기법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미술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연주의적인 묘사에 충실했던 그에게도 성탄이 가지는 여러 상징적인 의미들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그림에서도 성탄의 상황을 묘사한 그림에서 등장하는 전형적인 상징들이 여럿 등장한다. 우선 살펴봐야 할 것은 광배다. 이는 지오토가 중세와의 접점을 가지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도 하는데 중세 때만 하더라도 작품의 재현 보다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더 중요시했기에 성인(聖人)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에게 광배의 묘사는 필수적이었다. 이런 경향은 사실 르네상스 시기에서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지오토의 광배 묘사는 르네상스의 광배묘사보다는 어색한 측면이 있다.

성탄의 장면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은 크게 3명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예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와 아버지인 나자렛의 성 요셉, 그리고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예수가 바로 그들이다. 여기에 동방박사가 추가되거나 천사, 시녀, 목동과 같은 인물들이 추가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많은 경우 이들은 마굿간이라는 공간 속에서 묘사되나 마굿간 이외에도 일반적인 실내 공간에서 성탄을 묘사한 경우도 존재한다. 조토 디 본도네의 그림을 통해 보았을 때 우선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마리아다. 그리고 그가 건네주고 있는 아기는 예수일 것이고, 광배가 없는 또 다른 여자는 시녀, 앞에 앉아서 누워 있는 남자는 예수의 (양)아버지인 나자렛의 요셉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나자렛의 요셉이다. 이 그림에서 요셉은 졸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성탄이라는 기독교 도상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모티프였다. 이러한 모티브가 사용된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나, 학자들은 "모든 인간들의 원죄를 짊어지게 될 예수하느님의 아들이기에 현세에서의 아버지 나자렛의 요셉은 졸음이라는 상징적인 제스처로써 아버지의 역할에서 물러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

나자렛의 성 요셉과 같은 특이한 상징 이외에도, 성탄의 모티브에는 다양한 상징들이 존재한다. 특히 성모 마리아성경에 따르면 마굿간에서 예수를 낳았기 때문에 동물에 관한 상징이 그림에 자주 등장하곤 하는데, 당장 맨 위의 지오토 그림만 보아도 당나귀황소가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그림들은 단지 사실성을 더하기 위해 그려졌다기 보다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황소의 경우 현명함을, 당나귀의 경우 무지와 죄악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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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 그리스도의 탄생, 1500 ~ 1501년, 패널에 템페라, 런던 내셔널 갤러리.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위의 그림에는 더 많은 상징들이 존재한다. 우선 맨 앞에 천사와 마주하고 있는 3명의 남자는 베들레헴의 별을 따라 왔다는 3명의 동방박사다. 보통의 경우 성탄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 3명의 남자가 보이면 동방 박사일 가능성이 높다. 단 동방박사의 모습은 그림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 어떤 그림은 그들이 동방에서 왔으므로 동방 풍의 복장을 입혀놓기도 하지만 몇몇 작품에서는 서방인에 서양식 복장을 한 3명의 사람을 그려넣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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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그리스도의 탄생, 1460 ~ 1475년, 패널에 유화, 런던 내셔널 갤러리.

성탄 하면 또 빼놓을수 없는 것이 목동이라는 소재다. 사실 맨 위의 지오토 그림도 전체 그림을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과 목동들의 경배라는 2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그림이었다. 그만큼 목동들의 존재는 성탄 모티브에 있어서 중요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성탄을 묘사한 몇몇 그림들에서는 목동들의 경배에 초점을 맞추어서 구도를 짜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목동이라는 소재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기독교의 관습적인 구절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데, 동물로서 을 이끄는 목동들과 양으로 상징되는 백성을 이끄는 예수의 이미지가 합치되기 때문이다. 특히 양에 대한 묘사는 성경 구절에서도 자주 나오게 되는데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마태오 복음서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덜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5장 31-33절)


이러한 성경의 묘사를 고려해 보았을 때, 성탄에 등장하는 양은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됨을 알 수 있다. 한편 성탄의 장면에 염소가 등장하는 경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 또한 알 수 있다.


3.3. 예수의 죽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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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5~1498,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예수 생애의 마지막 해. 예수는 베드로사도 요한에게 한 가정집을 빌리게 한다. 그날 예수는 2층의 큰 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의 만찬을 하게 되는데, 한참 제자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그 순간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요한 복음서 13장 21절)


흔히 최후의 만찬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 일화는 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기독교 미술의 주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여기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모티브는 비단 예수의 죽음 그 순간뿐 아니라 그의 죽기 전 행보들, 겟세마니 동산에서 잡혀 온갖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두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과정을 포함한다. 물론 예수의 죽음이라는 주제가 기독교 미술의 전 시대에 걸쳐서 그려진 것은 아니다. 특히 예수가 죽기 직전 받았던 고문 장면과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장면은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는 그리 자주 그려지는 주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당시에는 예수의 죽음보다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라는 주제가 더 널리 그려졌다. 하지만 중세로 넘어가며 예수의 죽음이라는 주제는 어린 양을 위해 몸을 바쳐 희생하는 숭고한 죽음으로 불리며 성화의 주요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에는 몇 가지 도식적인 특징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이야기하면, 항상 작품의 중심에는 예수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설사 그것이 그림 전체의 구도 속에서 중앙이 아니더라도 그림 속 인물들의 배치 상 중앙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은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에서 특히 명확히 드러나는데, 대부분의 경우 소실점을 예수의 머리나 머리 위에 놓기 때문이다. 소실점은 원근법적인 법칙으로 그림을 그릴 때 시점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되는 어떤 지점을 말한다. 특히 르네상스 이후 과학적 방법이 회화 제작에 사용되면서 원근법이 회화 제작의 주요한 방법으로 떠오르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위의 최후의 만찬에서도 예수의 머리 바로 위에 소실점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만약 감상자가 그림이 그려진 공간에 실재로 있고 소실점을 따라간다고 상상해보자. 아마 어떤 사람도 소실점이라는 것에 절대로 가까이 가지 못할 것이다. 소실점을 가까이 보려고 가면 기존에 있던 소실점은 사라지고 새로운 소실점이 저 멀리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실점은 그 상징적 의미를 보았을 때 무한을 내포하는 말이고, 기독교에서 이런 무한을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 그 자체인 예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러한 주제에서 굳이 형식적인 것 외에도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예수의 형상 주변에 소실점이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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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 <최후의 만찬>, 1596, 볼로냐 국립 미술관.

최후의 만찬에서 특징적인 상징 중 하나는 유다 이스카리옷에 관한 상징이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은전을 받고 예수를 팔아넘기기로 결심했으므로, 그가 돈주머니로 상징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몇몇 작품들에서는 그가 기도를 하기 위해 합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주머니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또 입은 옷의 색깔을 통해서도 유다를 판별할 수 있는데 주로 어둠을 의미하는 검은 계열의 옷이나 병, 부정함을 의미하는 노란색의 옷을 입은 경우가 많다. 또 유다의 모습은 전체 그림의 구도에서 많이 밀려나 있는 듯한 인상을 주거나 얼굴의 표정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긴장하거나 인상을 쓴 모습으로 등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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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안젤리코, 그리스도의 체포, 1437년경~1446년경, 프레스코, 산 마르코 미술관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바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마태오 복음서 26장 47절)


최후의 만찬 이후 예수겟세마니 동산에서 유대의 사제들이 동원한 무뢰배들에게 끌려가게 된다. 성경에 의하면 유다 이스카리옷는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그를 구분할 수 있도록 키스를 했다고 나와있다. 또한 예수가 잡혀갈때 베드로가 유대인 사제의 시종의 귀를 잘랐다고 한다. 프라 안젤리코는 그러한 기록을 충실히 옮기고 있는데, 그는 다른 그림과 달리 입맞춤을 하는 장면과 베드로가 시종의 귀를 자르는 장면이 한 화면에 표현했다.

끌려간 예수유대인들에게 심문을 받으나, 유대인들은 예수에게서 딱히 큰 죄목을 찾지 못하자 예수를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게 보낸다. 겟세마니 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예수의 수난은 이후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될 때까지 계속되는데, 이러한 수난을 회화에서는 아미고 피에타티스(imago pietatis). 즉 가여운 자의 초상이라는 주제로 부른다. 미술에서 이 도상은 대개의 경우 예수를 수난에 이르게 한 고문 도구들이 상징적으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묘사되는 상징적인 물건중에는 작게는 예수를 고문할 때 사용되었던 채찍부터 사다리, 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대부분 성경에서의 묘사에 근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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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만테냐, 골고다 언덕, 15세기경, 패널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마태오 복음서 27장 50절)


로마 총독이던 본시오 빌라도의 심문을 받은 이후 예수는 골고타 언덕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예수의 죽음이라는 주제에서도 몇 가지 전형적인 인물 배치 방식이 보이는데 가장 큰 특징은 성모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사도 요한의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관람자의 시점에서 보았을때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는 좌측, 사도 요한은 우측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또한 예수는 사지에 못이 박혀 손과 발에 상처가 나 있고, 오른쪽 옆구리는 창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다른 2명의 도둑들과 함께 죽은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일부 작품에서는 이 2명의 도둑이 등장하지 않는다. (회개한 죄수는 디스마,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죄수는 게스따스이다. 디스마는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축일은 3월 25일.) 예수가 죽은 십자가의 꼭대기에는 INRI라는 문자가 쓰여지는데, 이것은 "나자렛 예수, 유대인의 왕(Iesus Nazarenus Rex Iudaeorum)"라는 뜻의 라틴 문자 축약이다.


3.4. 예수부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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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히르 반 데르 바이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435년, 프라도미술관.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는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곳을 보아라. (마태오 복음서 28장 6절)


자신의 어머니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죽은 예수는, 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어린 양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예수가 죽던 날, 그는 사흘 뒤에 다시 부활할 것을 약속했다. 물론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예수의 12사도들마저도 이것을 믿지 못했는데, 이것은 예수가 부활한 이후 있었던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본시오 빌라도의 호의로 예수의 시신은 그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예수의 모습을 그린 반 데르 바이덴의 그림은 그 순간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여타 다른 모티프의 기독교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모티프가 존재한다. 우선 이 장면에서는 기본적으로 성모 마리아, 사도 요한, 마리아 막달레나가 등장한다. 이 인물들은 이 주제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도상에 빠짐 없이 등장한다. 이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선 위 그림의 경우 파란색 옷을 입은 여인이 성모 마리아다. 비탄에 잠긴 마리아의 표정은 이 주제에서 앙상한 아들 예수의 모습과 함께 핵심적인 표현으로 등장한다. 마리아를 표현한 다양한 주제의 종교화들 중 그녀가 가장 극적인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바로 이 장면이다.

성모 마리아의 바로 옆에는 사도 요한이 서 있다. 후일 4복음서의 저자 중 한 사람이 되는 사도 요한은 예수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베드로가 예수의 수난 와중에 스스로 자신을 부정한 와중에도 요한은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분명히 했고, 이것은 후일 많은 종교회화에서 요한을 다른 누구보다 성스럽게 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 인물은 마리아 막달레나로 알려진 인물로, 위 그림에서는 맨 왼쪽 한 쪽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여인으로 표현되어 있다. 예수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과 이후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장면들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 못지 않게 극적인 감정을 분출하는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는 석관에 안치되었는데 이때 바리사이파 유대인들이 "그가 부활할지도 모르니 석관을 안치한 곳을 돌로 막고 경비를 두어 지키게 하자"고 건의했고, 이 건의는 받아들여졌다. 안식일이 지나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무덤을 보기 위해 그가 묻힌 곳으로 찾아왔다. 그런데 석관이 열려 있고, 예수의 시신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석관을 부수고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들려왔다. 처음에 그는 단순히 무덤지기인 줄 알았지만, 그가 들었던 목소리는 예전에 자주 들었던 익숙한 히브리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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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부활>, 1460, 산 세폴크로 공립미술관

부활의 도상도 이전의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정형화된 인물들이 존재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경우, 석관을 박차고 나와 부활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표현했다.

사실 이 그림은 일반적인 부활의 도상과는 다소 맞지 않는다. 우선 성경의 묘사대로라면 석관은 동굴 안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데 그의 그림은 야외에 놓여져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부활의 도상에서 예수는 의복을 걸치지 않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 그림에서는 의복을 걸친 상태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몇몇 차이를 제외하면 자고 있는 경비병이나 허리와 손에 난 상처, 깃발 등은 부활 도상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들 중 하나다.

수 많은 그림들 중에서 이 그림이 유독 주목받는 이유는, 이 그림이 예수의 근엄한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르네상스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인 남성적인 문화가 예수의 모습을 통해 반영되어 있는데, 그의 모습은 온갖 수난을 당하고 죽은 사람이라기 보단 수년간 전쟁을 치룬 베테랑 군인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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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루벤스, <예수의 부활>, 1612, 앤트워프 성모 마리아 성당.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명작과 비견될 또 다른 그림이 하나 있다. 루벤스라는 바로크 시대 미술가가 그린 이 그림은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극적인 묘사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앞서 보았던 프란체스카의 그림이 정제된 몸짓으로 근엄함이 느껴졌다면 이 그림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의 석관을 지키던 경비병들 마저도 예수의 광휘에 놀라 자빠지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17세기에 이르면 기독교 종교화는 이제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닌 국가나 왕조의 위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특히 일련의 종교전쟁 이후 프로테스탄트(개신교)들은 종교화를 자신의 도시나 국가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여겼다. 설사 그런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부활하는 예수의 그림은 날개를 펴고 세계로 웅비하는 국가를 연상하기 충분했다. 이 그림이 위치한 네덜란드는 당시 독립국으로 인정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국이었지만 막대한 부를 축적한 강대국이었다. 스페인의 억압에서 벗어난 한 국가가 강대국으로 재탄생 하는 바로 이 시기, 루벤스가 그린 예수의 부활은 프란체스카의 정적인 그것보다 역동적인 움직임이 필요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주님의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에 다가와서, 그 돌을 굴려 내고, 그 돌 위에 앉았다.(마태오 복음서 28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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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 <무덤 위에 앉은 천사>, 1886, 브루클린 미술관.

제임스 티소의 이 그림은 예수부활과 관련해 또 다른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알려준 것은 사실 천사였다. 이 천사는 부활과 관련된 도상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비록 성경에 묘사된대로 앉아있지는 않더라도 하늘을 날면서 축복해 주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공중에 부양하고 있는 예수[2]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티소의 그림은 성경에 묘사된 천사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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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정교회+개신교[2] 르네상스 초기 부활 도상에서, 예수는 붕 떠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이후 트렌토 공의회에서 이러한 묘사법이 금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