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산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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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5~6세기 신라의 고총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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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북 의성 조문국 금성산 고분군.jpg
금성산 고분군

파일:조문국 박물관.jpg
조문국 박물관

1. 개요
2. 조사 내용
3. 여담
4. 관련 문서


義城 金城山 古墳群

1. 개요[편집]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탑리, 학미리에 걸쳐서 분포하고 있는 신라의 고분군으로, 신라의 5~6세기 지방 거점. 1998년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면서 금성산 고분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금성산 일대에 200여 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는데, 5~6세기경인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름 15~19m, 높이 3~4m의 대형분과 지름 10~15m, 높이 2~4m의 중형분, 지름 10m 미만의 소형분이 고루 밀집되었으며, 원형봉토분이 대부분이다.



2. 조사 내용[편집]






대구광역시 달성군성산리 고분군과는 달리 의성군은 비교적 관광사업이 필요한(?) 지역이다보니 사적 정비 사업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정비가 잘 되어 있는 편에 해당한다.[1]

1960년대에 국립중앙박물관에 탑리 1호분에 대한 조사가 첫 개시였으며 발굴관련 사업이 활발해지는 2000년대에 들어서 대리리 1, 2, 4호 조사가 이루어졌다. 한동안 뜸하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 조문국 박물관이 건립되면서 금성산 고분군에 대한 조사도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지표조사 및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대리리 44호분이 조사되었고, 박물관 관련 시설 부지 내에서도 봉토가 사라진 대형 고분들, 즉 고총이 확인되었다.

금성산 고분군의 3개 구역 중에서 대리리 고분군과 탑리리 고분군에 대형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학미리 고분군에는 상대적으로 소형의 고분들이 있으며 6세기보다 늦은 고분들도 많다. 지금의 사적공원은 대리리 고분군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탑리리와 학미리 고분군은 현재 대부분 과수원 및 그냥 산지에 해당한다.

내용을 요약하면 수도 경주에서 사용되던 적석목곽묘라는 상위 계층의 무덤을 "주 묘제로서' 채용하는 몇 안 되는 고분군이다. 이러한 양상이 보이는 곳은 경산의 임당동 고분군 정도이다.[2] 부장된 위세품의 내용도 면면히 살펴보면 금관 빼고는 거의 다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경주의 중심 고분군들의 출토양상과 같아서 금성산 고분군의 축조세력의 중요성을 대변해주고 있다. 참고로 탑리리 1호분에서는 고구려 계통의 금동관이 나온 바 있다.

한편, 이른바 의성양식토기라고 불리는 신라토기 아류 기형을 사용하던 집단의 가장 중심 고분군이기도 하다. 여느 신라의 각 지방에나 지역양식 토기는 꼭 하나씩은 다 있지만 의성양식토기는 다소 독특한 것이 마치 경주양식 토기처럼 경북 북부지역으로 널리 확산되고 영남을 넘어서서는 강원도 강릉의 초당동 고분군과 충청북도 청원 미천리 고분군에서까지 나타나는 등 여타의 지역양식 토기와는 다르게 확산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즉, 특정한 토기 생산망, 유통망의 중심세력, 경주의 최상층과 유사한 무덤들을 향유하였던 집단이라는 점에서 신라의 여러 거점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역사적 상황에 미루어보면 5세기 후반, 6세기 전반의 신라는 경상도 일대에 대한 패권을 확보하고 한강유역으로 진출을 준비하던 단계였다. 그 과정에서 대가야를 먼저 정벌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경상도 북부 지역에 대해서는 의성 금성산 고분군을 축조한 세력에게 어느 정도 권한을 일임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위와 같은 역사고고학적 가치로 인하여 지자체, 조문국박물관과 발굴기관의 협력 속에서 발굴이 이뤄지고 있으며 사적 지정을 위한 학술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3. 여담[편집]


어떤 논란의 서적에서 소문국(내지는 신라에 통합된 소문국)이 신라의 왕비를 배출하는 집단이었다는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 이러한 야사적 차원으로 다소간의 스토리가 있으면 좋겠으나 학술적으로는 발굴 조사 성과 자체가 왕비를 배출하는 집단이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방증하는 것은 아니다. 즉 화랑세기 필사본 자체에 대한 검증의 문제일 뿐이다.

의성군의 몇 안되는 관광지로 읍내에서는 꽤나 인기가 좋다. 무덤이라는 점만 빼면 풍경이 좋아서 나들이 오는 사람들도 많이 들르는 곳으로 경치 때문에 웨딩 촬영을 하는 장면도 많이 볼 수 있다. 잔디가 아주 잘 깔린 점 때문. 참고로 금성산 고분군 안에 현대의 무덤들도 같이 있는데 덕분에 따로 벌초를 안 해도 고분 공원을 관리하면서 같이 벌초를 해준다.

그래서인지 의성군이 주무대인 영화 감동주의보에서도 촬영지로 등장했다.

다소 아이러니라면 지자체 차원에서는 1~3세기 원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소문국(조문국)을 위시한 컨텐츠로 밀고 있고 옆에 군립박물관으로 조문국박물관까지 있지만 정작 금성산 고분군은 소문국이 독립적이던 시절 이후인 신라의 주요 거점 고분군으로 다소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는 신라 정복 이전 시기 관련 유적이 나올 가능성이 있고 주변에서 3세기대의 표지적 존재인 와질토기편이 채집되는 곳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28번 국도변의 주차장 인근에은 문익점 면작 기념비가 있으며 주차장에는 푸드카, 화장실이 있어 잠시 쉬어가는 휴게소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성토의 모양은 봉구를 중심으로 수평단축 상태로 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봉구를 조성하는 데 사용된 흙은 순수한 점토로서 그 양 또한 매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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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점은 의성뿐만 아니라 다른 상주의 병풍산 고분군이나 성주의 성산동 고분군 등이 해당한다. 다른 대부분 가야 문화권의 지자체들 또한 사정은 비슷하다. 다른 산업이 별로 없는 농어촌 지역이니까 있는 고대 고분군을 정비해 약간의 관광객이라도 유치해보려 하는 것.[2] 물론 조금씩 적석목곽묘를 채용하는 고분군들은 흔하다. 대부분의 고총 고분군들이 조금씩은 적석목곽묘를 채용한다. 경주에 가까울수록 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