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빌 철도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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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고 당시
3. 사고 이후

파일: 그랜빌 철도 참사.jpg

1. 개요[편집]


Granville Rail Disaster

1977년 1월 18일 오스트레일리아 그랜빌에서 일어난 열차 탈선사고.


2. 사고 당시[편집]


오전 6시 9분, 빅토리아 산에서 시드니로 향하는 8량의 열차에 469명의 승객이 탑승했다. 그렇게 패라마타(Parramatta)역을 지나고 그랜빌 역으로 들어갈 때였다. 하필이면 열차가 달리는 선로 상태가 매우 안좋았다. 조임이 강하지 않고, 선로가 나란히 있지도 않았고, 원래 선로 폭 보다 넓게 선로가 놓여져 있었다. 결국 이런 불안정한 선로를 달리던 열차는, 오전 8시 10분에 탈선했다. 기관차 왼쪽 바퀴가 안쪽으로 탈선하면서 열차는 시속 80km로, 위에 볼드 스트리트(Bold Street) 다리를 지지하던 기둥과 충돌했고, 기관차는 옆으로 넘어지면서 미끄러져 그대로 다리 밑으로 들어갔다. 열차가 부딪친 충격에 기둥은 버티다 못해 붕괴했고, 위에 있던 차량 4대와 470톤의 콘크리트가 열차로 떨어졌다. 콘크리트 더미에 깔린 차량은 하필이면 프레임을 나무로 만든지라 피해가 컸다. 60cm 두께로 찌그러진 열차도, 아예 납작해진 열차도 있었다.

얼마 안가 구조대들이 출동했다. 경찰과 응급요원, 의사, 간호사, 철도회사 직원, 자원봉사자들도 모여 구조를 도왔다. 사고 현장에서 구조하는데 무려 1,500명에 달하는 인원이 모였다. 공구를 가져와 열차 차체를 잘라내고, 크레인을 동원해 콘크리트 더미를 들어올려 사람들을 구조했다. 크레인이 들어오기 쉽게 몇몇 전선을 자르기도 했다. 구조하는 과정에서 몇몇 인원은 신체를 절단하고 빠져나와야 했다. 그 와중에 다리에서 2차 붕괴가 일어나면서 부상을 입은 구조자들도 나왔다. 마지막 생존자는 18시 15분 경 구조됐다. 하지만 결국 병원에서 사망했다. 마지막 시신은 사고 31시간이 지나서 수습됐다. 사고 48시간이 지나서야 구조 작업은 종료됐다.

결국 사고로 83명이 사망, 213명이 부상을 입었다.[1] 열차 첫번째 칸에서 사망자 8명, 3번째 칸에서 44명, 4번째 칸에서 64명이 나왔다. 그랜빌 철도 참사는 호주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철도 참사로 기록됐다.


3. 사고 이후[편집]


사고 당시 수많은 인원이 모여 구조를 한 것은 한동안 미담으로 남았으나, 이내 사람이 너무 모였던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당시 부상자 한명을 들것으로 이송하는데만 30명이 동원되기도 했고, 사람이 너무 많아 경찰이 사람들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사람은 많이 모였는데 심리치료사는 없어서 부상자들과 구조자들이 훗날 트라우마를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그랜빌 참사 구조작업에 참여한 인원 중 4분의 1이 불안증세와 불면증등으로 심리적 피해를 입은 것이 드러났다. 몇몇 사람은 사고 이후 아예 알콜 의존증에 빠지기도 했다.

사고가 일어난 다리는 과거 1967년에 기관차가, 1975년에 석탄 실은 화물차가 들이받는 사고가 있었음에도 바뀌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다리는 이후 재건됐는데, 재건하면서 기둥 없이 지어졌다.

2007년 사고 30주기를 맞아 추모공원이 만들어졌다.공원 안의 추모비에는 사망자 83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가 세워졌다.#

2017년엔 사고 40주기를 맞아 선로에 꽃을 헌화하는 추모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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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망자 중 임산부가 있어서 태아를 포함한 언론과 포함하지 않은 언론에 따라 생존자 수가 1씩 차이난다. 태아를 포함히 사망자 수는 84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