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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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천 권태호.jpg

권태호
權泰浩


소천(笑泉)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903년 9월 16일
경상북도 안동군 부내면 율세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율세동)[2]

사망
1972년 2월 29일 (향년 70세)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직업
성악가, 작곡가

1. 개요
2. 생애
3. 이야깃거리
3.1. 입에서 불이나오는 성악가
4. 작곡한 노래
5. 함께보기



1. 개요[편집]


"한 편의 노래가 한 민족을 흥하게 할 수도 있고, 한 민족을 망하게 할 수도 있다."

봄나들이를 작곡한 음악가다.[3] 본래 전공은 성악과 테너 분야지만 현재로는 작곡가로 알려져있다. 이는 성악이 녹음이 되어있지 않거나 녹음된 음반이 현존하지 않아 작곡가로 알려진 것.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권태희는 그의 남동생이다.

2. 생애[편집]


1903년 9월 16일 경상북도 안동군 부내면 율세리(현 안동시 율세동)에서 기독교 목사였던 아버지 권중한(權重漢, 1887 ~ 1938)[4]과 어머니 안동 김씨(? ~ 1957. 9. 19)[5]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부터 화성동 안동교회에서 선교사의 부인으로부터 피아노오르간을 배우며 서양음악에 입문하였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1927년 일본음악학교 성악과 테너 전공에 입학하였다. 일본음악학교 재학 중이던 1928년 잠시 귀국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대구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이어 경성부 YMCA회관에서 가진 독창회에서는 처음으로 프란츠 슈베르트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가곡을 소개하는 한편, 봄나들이, 눈·꽃·새 등 동요도 작곡하였다.

1930년 일본음악학교 졸업 후 도쿄 일본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어 성공한 이래 일본 각지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그 후 귀국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음악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31년 광성고등보통학교로 옮겨 교편을 잡았다. 또한 경성방송국에서 고전음악 프로그램을 담당하였고, 평양음악협회 설립을 주도하는 한편, 평양음악연구소를 개설하여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1939년 모교인 일본음악학교에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일제강점기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변절하지 않았다. 1944년 귀국하여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해방 후에는 부유한 일본인 상인의 별장을 인수하여 경주예술학교와 대구음악학원을 세우고 《국민가요집》을 펴내는 등 활동을 이어 나갔다. 6.25 전쟁 때에는 '승리의 노래' 등 군가를 작곡하였고, 이후 합창단을 조직하여 국민개창운동에 힘썼다.

그러나 경주예술학교가 1952년 폐교되었고, 대구음악학원 또한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6.25 전쟁 때 미군에 의해 징발되어 이때부터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폭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6년 상경하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상도동(현 동작구 상도동)에 체류하면서 당시 국립묘지관리소장을 지내던 음악가 이종태(李鍾泰), 이유선(李宥善) 등과 교유했으며, 1969년에는 고향 안동군으로 내려가 예안면 낙동강변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1972년 2월 29일 그곳에서 지병중풍으로 별세했다.#


3. 이야깃거리[편집]



3.1. 입에서 불이나오는 성악가[편집]


일본 명치청년회관에서 한국인 최초로 독창회를 열게된다. 이 당시 일본인 비평가 기무라 쇼지는 "동경 음악계에 혼란을 줄 무명의 성악가가 독창회를 열려고 하고있다."라며 비평을 가한다. 명치청년회관에서 1부를 마치고 쉬고 있는 권태호에게 한 사람이 접근하는데 이 사람은 기무라 쇼지. "자네 욕을 쓴게 나야, 내가 기무라 쇼지일세. 2부 공연까지 힘내게. 2부까지 내가 보고 가겠네"라고 한다. 이후 돈다발이 든 화환을 받는 등 상당한 인기를 끌게 된 권태호는 "입에서 불이나오는 성악가"로 알려지는데, 정확히 왜 이렇게 불려지는지는 미스테리.

하지만, 만주에서 독창회 할 때 입을 크게 노래부르다 모기를 삼켜가며 노래를 한 것을 보아, 입을 크게 벌리고 큰 목소리가 우렁차게 나오자 입에서 불이 나오는 성악가로 알려진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3.2. 대구광역시 향촌동 이야기[편집]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백조다방에서 늦게 까지 술을 먹다가 통금시간에 걸린 권태호가 경찰과 맞딱뜨린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경찰이 "누구냐!"하고 물어보자 갑자기 네 발로 기어가는 시늉을 하고선 "나는 개다!"라고 하거나, 술을 먹고 이불에 누워있는 줄 알았는데 미나리 밭이었다거나 만취한 상태에서 하수구에 빠졌다가 나왔는데 경찰과 또 맞딱뜨려 줄에 널리는 시늉하고서는 "나는 빨래다."라고 했다.

능금노래가 대구시에서 공식적으로 채택 된 이후 마땅한 보상이 없자 대구시 내무국장을 찾아가 "내가 능금노래를 만들었고 나는 지금 추위에 떨고 있다. 너네가 나에게 능금이라도 주었느냐? 대체 나한테 무얼 해주었느냐?"하고 따졌고 이에 놀란 대구시 내무극장은 연탄 한 소쿠리를 챙겨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은다방에서 메기의 추억을 자주불렀고 술에 좀 취하면 항구의 노래를 음란하게 바꾸어 불렀다. 그래서 사람들을 웃기게 만들었다는 일례도 있고, 유치환 선생과 사돈 관계가 되었을 때 "둘 중 하나는 속았다"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그의 호, 소천은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보면 웃음이 샘처럼 나온다하여 붙여주었다고 한다.

4. 작곡한 노래[편집]


  • 봄나들이
  • 눈·꽃·새
  • 9사단
  • 승리의 노래
  • 보병의 노래
  • 능금노래
  • 사향가(思鄕歌)
  • 봄 오는 소리
  • 결혼축하의 노래
  • 백합
  • 대한아기행진곡
  • 대구시민행진곡
  • 교가(안동중학교 등 다수)
  • 기정아, 승룡아 너를 보내고[6]


5. 함께보기[편집]


소천 권태호 음악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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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정공파 복대(復大)계 33세 태(泰) 항렬.[2] #[3] 나리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로 시작하는 노래[4] 초명 권준하(權準河).[5] 김대현(金大鉉)의 딸이다.[6] 이 노래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베를린 올림픽에 참여했던 손기정선수와 남승룡선수를 독려하던 노래로 보인다. 이 노래를 작곡한 이유로 권태호는 일본 경찰에 의해 구금을 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