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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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권병호
權炳瑚[* 權炳
, 權秉鎬 등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경팔(敬八)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885년 8월 2일
경상도 경산현 남면 석두리
(현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협석리)
사망
사망일 미상
사망지 미상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2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85년 8월 2일 경상도 경산현 남면 석두리(현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협석리)에서 아버지 권재모(權在模, 1854 ~ 1896)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2]

그는 1908년 1월 초 동지 손석태(孫石泰)와 함께 부하 80여 명을 이끌고 전라남도 장성군 용강사(龍江寺)로 가서 의병을 일으키고, 스스로를 의병대장(義兵大將)이라 칭한 뒤 손석태를 일초장(一哨長)에 선임해 의병진을 조직했다. 그 뒤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해 순사 4명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일대를 전전하다가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후퇴했고, 이후에도 두 차례 더 습격을 받은 끝에 의병진이 와해되고 말았다.

그 뒤 권병호는 각지를 전전하다가 마침 와해된 의병진 중 한 부대가 경상북도 청도군 이위면 운문사로 도피해 잠복해 있다가 현재 경주군 산내면 산저동(현 경주시 산내면 내칠2리 상·하산저) 일대에 격문을 배포하며 의병진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에 호응하기 위해 손석태와 함께 운문사를 향하다가 4월 10일 산내면 수피동(현 산내면 우라리 수피마을)에서 하루 전인 9일 청도군 이위면 공암동에서 의병 소모장(召募將) 구성립(具成立)[3]을 체포하고 경주군으로 향하던 대구경찰서 파견 제1변장대를 우연히 만났다.

권병호 등은 이 변장한 경찰들에게 쫓아가 먼저 목적지를 물어봤고, 당시 의병으로 변장하고 있던 제1변장대 소속 경찰들은 권병호에게 '우리 일행은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패주 도중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이들을 믿고 앞서 언급한 사실들을 상세히 언급했다. 그는 결국 본 모습을 드러낸 경찰들에게 체포되었고, 이어 경주군 산내면 산저동 김 아무개 집에 잠복해 있던 의병 종사(從事) 유진삼(兪進三)[4] 또한 체포되었다.

그 뒤 경주군에서 당시 압수된 화승총 7정을 비롯해 유진삼, 구성립 등과 함께 대구경찰서 경주분서에 인계되었고, 이후 불기소처분을 받아 출옥했다.

출옥한 뒤의 행적, 사망년월일 등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비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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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야공파(僕射公派) 처형(處衡)계 32세 병(炳) 항렬.[2] 아버지 권재모의 정실 부인 동래 정씨 정내원(鄭來原)의 딸은 족보상 1880년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고, 다른 부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3] 당시 거주지는 경상북도 청도군 읍내.[4] 당시 거주지는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오이동(梧耳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