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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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1.jpg

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 신라의 제46대 문성왕이 재위 17년(855)에 경주 창림사에서 왕명으로 석탑을 조성한 후 황금으로 도금한 동판에 그 내력을 기록하게 한 기록물. 현재 수원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소장되었다.


2. 내용[편집]


파일: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2.jpg
가로 38.2 cm × 세로 22.4 cm

창림사무구정탑지(昌林寺無垢淨塔誌), 창림사무구정광탑원기(昌林寺無垢淨塔願記) 등으로도 부른다.

신라 문성왕 17년(855)에 왕명으로 만든 한국의 황금 도금 기록물로, 왕명으로 무구정탑을 만든 후 한림랑이자 추성군 태수 김입지에게 그 바람을 기록하여 남기게 한 것이다. '경응'은 문성왕의 이름이다.

이후 천 년이 지나 조선 순조 24년(1824) 어떤 놈이 경주 남산 창림사 삼층석탑을 도괴했는데, 이 과정에서 신라시대에 만든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부와 이 기록물이 발견되었다. 이때 당시 금석학에 조예가 깊던 추사 김정희가 그 내용을 모사해 두었으나 원본은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런데 2012년 불교문화재연구소가 '한국의 사찰문화재 일제조사 사업'을 진행하던 중 용주사 효행박물관의 수장고에 이 탑지의 원본이 보관되었음을 확인하여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구소는 1800년대 탑이 무너졌을 때 이를 손에 넣은 추사 김정희가 자신과 친분이 깊던 안동 김씨 김조순 일가가 시주해 세운 경기도 이천 영원사(靈源寺)에 맡겼던 것이 다시 용주사로 전해졌다고 추정했다.

파일: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3.png

한편 이 황금 탑지가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아니라 인근의 다른 탑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탑원기의 출토지로 논문을 쓴 신용철 통도사 성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현존하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탑의 양식으로 볼 때 문성왕대보다 100여년 앞선 8세기에 세워진 것이라서 이번에 나온 탑지와 연대가 어긋나 보인다.'고 주장했다.

원래는 2015년 2월에 보물 지정이 예고되었지만매일신문 이런 문제제기 이후 출토지가 아직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지정이 보류되었다.연합뉴스 현재 정확한 출토지점을 파악하고자 연주 중이다.

이 탑지가 중요한 이유는 문성왕의 사촌동생 김예(金銳)라는 인물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김예는 헌안왕의 사위이자 다음 왕인 경문왕때에 반란을 일으키려다 처형되었다고 하지만, 헌안왕[1]의 아들로 기록된 궁예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대가 좀 맞지 않긴 하나 궁예는 생년을 알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만약 김예가 정말로 궁예라면, 탑원기에 따라 따지면 궁예의 출생년은 문성왕 7년(845) 즈음일 것이다. 궁예가 918년 왕건의 쿠데타로 인해 사망했고 이를 감안하면 74세에 생을 마감한 것이 되는데, 아예 불가능한 나이도 아니다.


3.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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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성왕의 숙부이다. 따라서 헌안왕의 서자인 궁예문성왕은 정확히 4촌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