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 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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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교동 금관1.jpg

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校洞 金冠.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4번지의 폐고분(廢古墳)에서 도굴되었다가 국가에서 압수한 신라금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었다.


2. 내용[편집]


파일:교동 금관2.jpg

지름 14 cm, 높이 12.8 cm.

최종호라는 한 도굴꾼이 경주시 교동의 한 폐고분에서 도굴했다가 1972년 국가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신라시대 금관이다. 증언에 따르면 최종호는 1969년부터 3년에 걸쳐 그 고분을 도굴하였는데, 특히 도굴을 위해 고분 바로 근처에 미리 세를 든 뒤, 남 모르게 담장 밑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 이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을 도굴하는 교묘한 방법을 썼다고 한다.

고분발굴에서 출토유물의 연대를 추정하려면 출토정황과 공반유물, 고분 구조와의 관계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데, 교동 금관은 도굴품이기 때문에 도굴자의 증언에 의존하여 분석할 수밖에 없다. 또한 도굴꾼의 증언에 의존해야 하는 유물을 학술적 자료로 삼을 수 있느냐 하는 논쟁도 다소간 있다. 현재도 학술적 자료로 적극 활용하는 연구자와 간단히 참고자료로만 활용하는 연구자로 나뉜다.

같이 도굴당한 다른 유물들은 이미 최종호가 세상 곳곳에 팔아넘겨 흩어졌기 때문에 연대판단의 근거가 다소 불확실하다. 하지만 대도 손잡이, 금제완(金制碗)과 곡옥 몇 점 등이 교동 금관과 함께 회수되었고 도굴꾼이 증언하여 공반유물로 인정되었다. 유물 구성이 대릉원의 여러 대형 고분들과 유사하기 때문에 대략적인 연대는 5세기라고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한다. 세부적으로는 금관의 형태적인 측면에서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이전의 초기형태라고 여긴다. 호림 금관, 부산 복천동 출토 금동관과 양식이 비슷한데 형태로 보아 마립간 시기 초기에 만든 이른 시기의 금관으로 추정한다.

한편 여태 확인된 금동관이나 금관을 통틀어서 작은 편이다. 금관의 대륜 지름이 14 cm에 불과하여 금령총 금관처럼 어린 아이의 것으로 본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교동 64번지 고분을 어린 왕족의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재질을 조사한 결과 순도 88.8%의 순금이었다.


3.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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