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조선백자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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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광주 조선백자 요지 1.jpg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314호
광주 조선백자 요지
廣州 朝鮮白磁 窯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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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광주읍, 초월면, 도척면, 실촌면, 남종면
분류
유적건조물 / 산업생산 / 요업 / 도자기가마
면적
407\,660㎡
지정연도
1985년 11월 7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위치



1. 개요
2. 내용
3.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계획
4. 기타
5. 외부 링크
6. 사적 제314호


1. 개요[편집]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에 왕의 명으로 처음 만들어져 이후 약 500여년을 이어져내려온 한국의 백자 가마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넓은 크기의 백자도요지로 유명하다. 현재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314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편집]


파일:광주 조선백자 요지 2.jpg

조선 세조 재위 시기인 1467년에 왕의 명으로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司甕院)의 분원(分院)으로 설치한 것이 최초다. 이후 영조 28년(1752)에 다시 한번 지정되었으며, 1886년 일종의 민영화를 단행한 뒤[1] 일제강점기 시대까지도 존속하였다.

1400년대 중반부터 조선백자 중 가장 우수한 백자를 구워냈으며, 382,738㎡에 이르는 면적에 300여개의 가마터가 남아있어[2]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넓은 크기의 백자도요지로 알려져 있다. 이보다 오래된 청자도요지는 있으나 백자도요지로는 시설⋅규모⋅도자기 형태⋅생산기술에서 국내외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는다.

기록(육전조례)에 따르면 광주 분원에서는 1년마다 1만 4천여문에 이르는 최상급 자기를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왕실에 진상하였다고 한다. 현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백자들이 지층을 이루며 묻혀 있다.


3.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계획[편집]


경기도 광주시에서는 광주 조선백자 요지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 중이다.경기 연구원: 광주 조선백자요지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대응전략

밝혀진 세계유산적 가치는 다음과 같다.

1. 조선 세조 때 처음 만들어진 후 국가에서 500여 년 동안 관요를 운영하였고, 이렇게 넓은 지역에 300여개 가마터가 존재하는 유산은 연대적으로나 크기적으로나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다.
2.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백자도요지로 고고학적 유산이라는 유형적 가치와 조선백자 생산기술의 무형적 가치를 동시에 지닌 문화유산이다.
3. 500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전 세계적 규모의 작업터에서 최상급 관요백자만을 생산해온 백자가마터로 시설⋅규모⋅도자기 형태⋅생산기술 면에서 축적된 자료가 동아시아 도자사를 대표할 만하다.


4. 기타[편집]


주변에 광주도자마을과 경기도자박물관, 분원백자자료관 등이 건립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매년마다 광주왕실도자기축제(廣州王室陶瓷器祝祭)를 열고 있다.

2019년 3월 15일, 이곳에서 1884년 분원 폐지 이후 133년 만에 한국의 백토가 다시 발견되었다.중앙일보: 맥 끊긴 조선백자···사라졌던 백토 133년 만에 찾았다 조사 결과 외국의 다른 도자기용 흙과는 달리 카올린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섭씨 1500도~1700도 가량의 고온에도 버티는 유일한 백토라고 한다. 조선백자 특유의 우유빗 옥색의 비밀이 반쯤은 밝혀진 셈.


5. 외부 링크[편집]




6. 사적 제314호[편집]



도요지는 그릇이나 자기를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남종면·중부면·퇴촌면 등 광주시 일대에는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흙이 나오며, 나무와 물이 풍부하다. 제품의 공급지인 서울과 가깝고 한강을 이용한 운반의 편리성으로 인해, 조선 영조 28년(1752) 궁중음식을 담당하던 사옹원의 분원으로 지정됐다. 그 후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130여 년 동안 285개소의 가마터가 이 일대에서 번창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국가 사정이 어려워지자, 분원리 가마터는 개인에게 경영권을 주게 되었다. 그 후 여러 계층의 수요와 요구에 따라 자기의 모양과 무늬가 다양해졌으며, 청화백자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가마터의 구조는 오름가마이며, 계단식가마도 확인되었다. 여러 모양과 무늬를 새긴 자기들이 출토되었고, 글씨가 새겨진 도자기를 통해 제작시기도 알 수 있다.

이 일대는 조선 전기에서 후기까지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내던 중심지였기에 조선 도자사 연구에 기반이 되는 곳으로서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광주조선백자도요지 → 광주 조선백자 요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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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간인에게 소유권을 넘겼다.[2] 물론 이 수백개의 가마터를 동시에 다 쓴 건 아니다. 한곳에 자리잡으면 그 주변 나무들이 순식간에 고갈되기 때문에 이리저리 가마를 옮기다 보니 저리 가마가 많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