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 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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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산(広武山)의 유적 터.[1]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항우와 유방의 패드립 대결
3.2. 나랑 한 판 뜨자!
3.3. 아가리 파이트
3.4. 저격
4. 결과


1. 개요[편집]


광무산은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높은 봉우리라(三尺寒流數仞網).

두 영웅이 이곳에서 흥망을 논하였구나(兩雄曾此話興亡).

명나라(明) 고대무(顧大武), 登廣武岡漢高數項羽處

중국 초한쟁패기 당시 초나라(楚)와 전한(漢)이 기원전 203년경 지금의 하남성 정저우 시 싱양 시 동북의 광무(廣武)에서 군사 대치한 사건. 초한전쟁 내내 수세에 몰려 있던 유방이 형양 · 성고 전역을 버티며 확실히 우세를 가져온 무렵이자, 중국 전역을 나눠 거대한 전쟁을 치루는 두 명이 서로 얼굴 마주보며 아가리 파이터가 되어 욕지거리를 퍼부었던 괴이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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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편집]


거록대전(巨鹿之戰)에서 승리를 거둔 항우(秦) 말기의 대혼란에서 순식간에 최강자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이 전력을 바탕으로 항우는 당초에 관중왕(關中王)이 될 수 있었던 유방(劉邦)을 굴복시켰고, 홍문연(鴻門宴) 이후 벽지인 파촉(巴蜀)에 처박아 두었다. 그러나 유방은 소하(蕭何)와 한신(韓信)의 도움을 바탕으로 재기에 성공했고, 항우는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등의 실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를 틈타 유방은 대번에 삼진을 평정하고 중원으로 진출, 초나라의 본거지 팽성(彭城)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이후 유방은 역습을 펼치는 항우에 당하여 팽성전투(彭城之戰)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으나, 경색전투(京索之戰)에서 적을 저지한 후 형양 · 성고 전역에서 항우와 치열하게 맞서게 된다.

그동안 안읍전투(安邑之戰)에서 후방의 위협인 위표(魏豹)를 물리친 한신은 이후 별도로 북상을 감행, 한신의 북벌이 시작되었다. 이후 곧바로 대나라를 공격해 멸망시킨 한신은 조나라를 공격했고 최대 고비였던 정형전투(井陘之戰)에서 경이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승리를 거두며 순식간에 조나라(趙), 연나라(燕) 등을 복속시키며 북방에서 세력을 자리잡은 한신은 엄청난 속도로 세력을 넓혀 나가 초한전쟁의 향방은 크게 뒤흔들어졌다.

그러나 항우는 팽월(彭越)의 엄청난 유격전으로 인해 도저히 눈 앞의 유방을 밀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유방에게 탈취한 형양(滎陽)과 성고(成皋)을 고스란히 내주는 피해만을 입어야 했다. 항우는 사수전투에서 대사마 조구(曹咎)가 대패하자 서둘러 귀환하여 형양 동쪽에서 포위된 종리말(鍾離眜)을 구원하였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심하게 약화된 지 오래였다.

한편 유방은 비록 형양과 성고를 회복하긴 했지만 이 두 성은 이미 항우의 공격을 받아 성벽이 많이 상해서 제 역할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두 성을 버리는 편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관중으로 수비선을 후퇴할 것도 고려했지만 역이기로부터 오창을 끼고 싸우지 않으면 불리할 거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어서 이는 포기하였다. 그리고 장량으로부터 성이 아닌 광무산을 거점으로 삼아 항우와 대치하는 계략을 받아들여 광무산을 점거하게 되었다.

3. 전개[편집]


이후 유방과 항우는 광무(広武)를 사이에 두고 주둔하여 서로 지리한 대치를 보였다. 대치는 몇 달 동안 이어졌다. 당시 이미 꾸준히 이어지던 전투로 인해 양군 모두 지쳐 있었다. 고조본기에서는 '젊은이들은 오랜 종군 생활에 고달파했고 노약자들은 군량 운반에 지쳐 있었다'(丁壯苦軍旅, 老弱罷轉饟.)는 기록이 있고, 항우본기에서는 장정들은 군역(軍役)에 시달리고 노약자들은 전조(轉漕)에 지치게 되었다.(丁壯苦軍旅, 老弱罷轉漕.)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나마 유방은 오창의 양식을 확보한 반면, 항우는 팽월 때문에 후방이 난장판이 되어서 아마도 항우측의 상황이 훨씬 더 나빴을 것이다. 이미 형양 · 성고 전역에서 두 번이나 항우를 동쪽으로 되돌아오게 만들었던 팽월은 이 무렵 또 다시 유격전을 다시 재개한 것으로 보이는데, 항우가 팽월이 여러 차례 양나라 땅에서 일으키는 반란으로 근심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매번 보급로를 차단하고 성을 빼앗고 후방을 교란시키니 항우로서는 정말 찢어죽이고 싶은 원수가 따로 없을 듯. 어찌되었건 군량의 부족, 그리고 심지어 후방의 안전조차 확실치 않았던 항우로서는 계속해서 대치를 유지할 만한 힘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난국을 돌파해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3.1. 항우와 유방의 패드립 대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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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항우의 처지가 급하다 보니, 항우는 급하게 마련했는지 심히 조악스러운 방법으로 대응했다. 항우는 난데없이 한군의 진영에서도 잘 보일 높은 단을 하나 마련하더니, 그 위에 팽성대전 이후 사로잡은 유방의 아버지 유태공(劉太公)을 올려놓고는 너 빨리 항복 안 하면 네 아버지 확 삶아서 죽여 버린다 하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항우의 막장짓을 본 유방은 불안함에 어쩔 줄 몰라했지만, 장량(張良)은 "항우의 곁에 항백이 있는 것을 보니 태공은 괜찮을 것이다. 오히려 항우를 약올리는 게 이득"이라고 귀띔했다. 이에 유방은 앞으로 나서더니…….

"진짜 우리 아버지를 삶겠다고?"

"그래. 네가 항복하지 않으면!"

"삶거든 나한테도 국물 한 그릇을 나누어 주게!"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우리가 북면(北面)하여 초회왕을 섬길 적에 의형제가 되기로 하지 않았던가?"

"?"

"그러니까 나의 부친은 곧 너의 부친이기도 하다. 굳이 니 애비를 삶겠다면 나도 국물 한 그릇 맛 좀 보겠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막말로 유명한 유방이 이런 소리를 점잖게 했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 충분히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욕설과 조롱이 더 있었을 법한데, 저게 필터링을 거친 거면 대체…제 아비를 삶아 죽이겠다는 말에 당황하기는커녕 도리어 조소를 퍼붓는 걸 보자 항우의 어이가 먼저 퇴갤하고 만다. 조선 효종은 주강(晝講)에서 이 떡밥이 나오자 우와 지린다 이게 사람이 할 소리냐는 감상을 남겼다[2]. 유학자들 입장에서는 효를 도전받는 이 상황에 여기 애비 삶은 국물 한 그릇 추가요라는 발언에 경악을 할 법하다. 현대에도 제정신으로는 절대 안 나올 말인데 예의를 더 차렸던 과거라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분개한 항우는 진짜로 태공을 잡아들고 솥단지 앞까지 걸어갔는데, 과연 항백이 나서서 "천하의 일이란 아직 알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천하를 도모하는 자는 자신의 집을 돌보지 않는 법이니, 그를 죽인다고 한들 유익함이 없고 그저 화를 더하게 될 뿐이오." 하며 만류했다. 이 시점에서 항우의 악명에 노인 살해 전적 하나쯤 추가된다고 티가 날지도 의문이며 항백의 행적을 생각하면 의도가 굉장히 수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항우는 그 말을 듣고 태공을 내려놓았다.[3]

그리고 여기에서 항우가 진짜로 유태공을 죽였어도 유방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수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는 주군이 개인의 가족 때문에 항복하는 것도 결국 보기 좋지 않은 모양새고, 그냥 무시하기에도 아버지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도덕적 리스크를 감수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설령 항복한다 하더라도 항우 입장에서는 후환을 두려워해서 일가족을 다 죽여버릴 가능성이 크므로 정말로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오히려 다른 가족까지 위험에 처할게 뻔하다. 그러니 유방의 패드립은 이러한 도덕적 난제를 항우에게 되돌리는 것이며, 항우가 도덕적 명분을 중시할 경우 유태공을 살릴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유태공이 살해당하더라도 항우 역시 도덕적 오명을 같이 뒤집어쓰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방이 패륜적인 욕설을 뱉으며 강하게 나온 게 오히려 아버지를 죽여봤자 항우도 이득 볼 것이 없다는 점을 확실히 주지시켜서 결과적으로는 아버지를 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또 유방이라고 좋아서 저런 말을 한 것도 아닐 테고, 이게 그나마 자기 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해 나온 계산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도 그리 되었고. 유방은 나중에 한을 건국한 뒤 부친인 태공을 극진하게 모셨고 황제의 몸인데도 단순한 자식으로서 꼬박꼬박 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올리러 간 사람인 만큼 저 말이 본심일 리 만무하다. 일설에도 유방의 상상을 초월한 패드립을 들은 유태공도 아들을 원망하긴커녕 큰 소리로 웃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어쩌면 유태공도 아들의 패드립의 저의를 눈치챘을지도 모를 일.

초한전기 작가도 그리 생각했는지 저 대목에서 유방이 앞에서는 저런 패드립을 태연히 뱉고 군영에 돌아와서는 아버지를 걱정하며 펑펑 우는 장면이 나온다. 효심이 나름 깊었다는 건 정사에도 나오는 내용이고 인간성의 한계를 경험하는 힘든 순간이었으니 딱히 이상할 거 없는 해석.

3.2. 나랑 한 판 뜨자![편집]


붙잡고 있는 인질이 거의 소용이 없게 되자, 애가 탄 항우는 "천하가 여러 해 동안 혼란스러웠던 것은 오로지 우리 두 사람 때문이다. 원컨대 한왕과 겨루어 자웅을 가리고, 애꿎은 천하의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지 말기로 하자." 라며 항우와 유방, 두 사람이 결투 한판 떠서 전쟁 끝내자. 라는 제안을 했다. 물론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유방은 그저 웃어넘기면서 "나는 지혜로 싸우길 원하지 힘으로 싸우길 원하질 않는다." 며 거절했다.

그러자 항우는 힘 좀 쓴다는 장사(壯士)를 보내 계속해서 유방을 세 번이나 도발케 했는데, 한군에서 활을 잘 쏘는 누번(樓煩)[4]이 나서 활을 쏘아 초나라군의 장사를 쏘아 죽였다.

이미 심기가 답답한 상황에서 그 광경을 본 항우는 갑자기 열불이 나는지 대뜸 갑옷 입고 창을 들며 뛰어 나섰고 당초에 누번은 이게 웬 떡이냐는 듯 활을 쏘아 항우를 죽이려고 했으나 노한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대갈(大喝)을 퍼붓자패기에 지린 누번은 감히 항우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활을 쏘지도 못한 채 달아나버리고 만다. 유방은 사람을 시켜 대체 저 괴물이 누구인지 알아 보게 했는데, 그 상대가 초나라군의 지도자 항우라는 사실을 알자 소름이 끼쳐 기겁했다.[5]

3.3. 아가리 파이트[편집]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누번을 쫓아버린 항우는 단기로 유방의 가까운 곳으로 다가와 광무산 계곡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 중국 천하를 두고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전을 벌이는 최고 지도자들끼리 얼굴 마주보며 소리치는 묘한 광경이 펼쳐진 것. 물론 고대에는 저격 수단이 백미터 남짓인 활 뿐인데, 그나마도 최대 사거리에서 정확하게 쏘아 맞추는 명궁은 흔치 않았고, 갑옷까지 갖춰 입으면 어지간히 운이 없지 않은 이상 저격으로 죽기 쉽지 않아 가능한 일이다.

이 당시 항우가 꺼낸 이야기는 고조본기의 늬앙스에 따르면 이전에 말한 "우리 두 사람이 맞짱 한번 뜨자!"라는 이야기였던 듯 싶다. 허나 유방은 그런 제안에 동의하는 미친 짓은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쪽에서 항우의 죄상을 줄줄이 언급하며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다.

"당초에 나와 그대는 함께 회왕(懷王)의 명을 받들어서 먼저 관중에 진입해 평정하는 자가 왕이 되기로 했거늘, 그대는 약속을 어기고 나를 촉한(蜀漢)의 왕으로 봉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죄이며,[6]

그대는 왕명을 사칭해 경자관군(卿子冠軍) 송의(宋義)를 죽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이로다.[7]

또 그대는 조나라를 구원한 후, 마땅히 회왕께 보고를 해야 하거늘 멋대로 제후군을 위협해 관중에 진입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이며,

회왕께서 약조하시길 진(秦)에 들어가 폭행과 노략질은 하지 말라고 하셨거늘 그대는 진의 궁궐을 불사르고 시황제의 묘를 파헤쳤으며[8]

진나라의 재물을 사사로이 착취했으니 이것이 네 번째의 죄이다.

또 항복한 진왕(秦王) 자영(子嬰)을 이유 없이 죽였으니 이것이 다섯 번째 죄이로다."

"속임수를 써서 진나라의 젊은이 20만 명을 신안(新安)에서 생매장하고 그 장수를 왕으로 봉했으니 이것이 여섯 번째 죄이며,

그대는 각 제후의 장수들을 좋은 지방의 왕으로 삼고 원래의 제후 왕들은 다른 곳으로 쫓아내 그들의 신하들로 하여금 다투어 모반케 했으니 이것이 일곱 번째의 죄이로다.

또 그대는 의제를 팽성에서 쫓아내고 스스로 그곳에 도읍했으며 한왕(韓王)의 봉지를 빼앗고 양(梁), 초(楚) 나라를 겸병해 자신의 땅을 넓혔으니 이것이 여덟 번째의 죄이며,

사람을 보내어 강남에서 의제를 암살했으니 이것이 아홉 번째 죄이다.

신하된 자로서 그 군주를 시해하고 이미 항복한 자를 죽였으며, 공정하게 정사를 행하지 않고 약속을 어기어 신의를 저버린 것은 천하에 용납되지 않을 대역무도함이니 이것이 열 번째의 죄이로다."

항우를 팩트로 신랄하게 디스한 유방은 그래도 속이 덜 풀리는지 여기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정의로운 군대를 거느리고 제후군과 함께 잔악한 도적을 토벌코자 함이니, 너 같은 작자는 (내가 직접 나설 것도 아니라)형벌을 받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대를 죽이게 하면 될 것이거늘[9]

내 어찌 수고롭게 그대와 싸울 필요가 있으랴?"


3.4. 저격[편집]


여기까지 듣자 분노한 항우는 숨겨두었던 쇠뇌를 쏘아 유방을 저격했다. 아무래도 쇠뇌를 숨겨두었던 부분을 보자면 유방의 디스가 아니더라도 암살하려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방은 쇠뇌에 당해 가슴에 상처를 입는 중상을 당한 그 급박한 순간,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갑자기 발을 더듬으며 "아이고, 저 역적 놈이 어르신의 발가락을 쏘네!" 라고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러나는 패기를 선보였다.

이렇게 유방은 항우의 앞에서는 저격을 당하고도 당당하게 물러났지만, 사실은 부상이 대단히 심해 군영에 들어서자 자리 보전하고 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량(張良)은 죽을 지경인 유방을 억지로 일으키고는, 유방이 저격을 당해 마음이 뒤숭숭할 병사들을 위문하게 했다. 이 때문에 유방은 중상을 입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호기롭게 군졸들을 위로했고 한나라군의 사기는 계속해서 유지되어 초나라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다만 이미 중상을 입은 몸으로 말을 타고 찬바람 맞으며 돌아다닌 유방은 병세가 심하게 악화되는 바람에 성고로 급하게 이동해서 요양을 해야만 했다.

4. 결과[편집]


이후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유방은 관중으로 들어가 병력을 수습했으며, 역양(櫟陽, 약양)에서 주연을 베풀어 주변에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사수 전투에서 죽인 사마흔의 머리를 전시했다. 그 후 지원군을 이끌고 광무로 귀환하자, 한군은 군세가 크게 불어나 사기가 올랐다.

반면에 항우는 유방이 병력을 지원하는 동안 광무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유방의 부모를 가지고 협박을 일삼거나, 유방과의 일대일 대결로서 모든 것을 결정짓자고 제안하거나, 숨겨둔 쇠뇌를 꺼내 기습적으로 저격을 하거나 등등의 행동에서 항우가 조급해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즉, 당시의 초나라 군대의 상황은 꼼수라도 써야 할 정도로 곤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팽월은 계속해서 초나라의 후방을 유린하였으며, 제나라의 후손 전횡(田橫)이 제나라 멸망 이후 남은 세력을 이끌고 팽월에게 의지해 팽월과 함께 초나라 북쪽 국경 지대를 계속 위협했다. 항우는 화북 지역을 휩쓸고 있는 한신을 깨뜨리기 위해 용저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보냈으나 오히려 한신은 유수 전투에서 용저를 물리치며 대승을 거둔다. 결국 한신은 북방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버리고 엄청난 세력을 떨친다. 화북 지역을 장악한 한신의 세력은 유방과 항우를 동시에 상대할 수도 있는 거대 세력이었다. 유수전투 이후 항우는 사방에서 압박을 당하기 시작했으며, 어쩔 수 없이 홍구(鴻溝)에서 맺은 조약을 통해 한군과 휴전협정을 맺게 된다.

그러나 양군이 협정 이후 귀환을 시작했을때, 장량진평의 조언을 들은 유방은 항우의 뒤치기를 시도했고, 이를 항우가 저지하며 고릉 전투에서 이겼으나 이후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한 한신, 팽월, 영포 등 당대의 영웅들이 모두 모여 해하 전투가 전개되었으며 항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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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왼편이 한왕성(漢王城), 오른편이 패왕성(覇王城). 두 왕성은 멀리서 마주보고 있고, 북쪽으로는 황하가 흐르며 중간에는 광무 계곡이 있다. 중국 허난성 정저우시 싱양 시(滎陽) 광무진 소재. 광무산 위치, 좌측 한왕성(汉王城), 우측 회색옅은폰트로 패왕성(霸王城) [2] 조선왕조실록 효종대왕 행장 中. 효종 6년(1655년) 겨울(음력 10월) 주강에서 고사의 여러 군주들을 논하다가 광무 대치가 나오자 남긴 평이었다.[3] 사실 항우 입장에서도 항백의 말에 딱히 틀린 건 없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방은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던 데다가 포악한 항우가 설사 항복한다 하더라도 자신, 부하, 심지어 아버지인 태공의 목숨도 보장해준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 항우가 포악하고 악랄한 자라는 악평이 자자했지만, 이런 상황에 이용 가치도 별로 없을 적수의 아버지를 대놓고 삶아죽여버리면 안 그래도 나쁜 평판이 더 무너졌을 것이라 이쪽의 모양새만 나빠지니 말리는 게 맞다. 주군의 아버지가 끔찍하게 죽는 걸 보고 경악한 한군의 분노 버프를 항우 본인은 몰라도 부하들이 무슨 명분으로 막겠는가.[4] 누번은 춘추전국시대 소수민족의 하나이므로, 이 병사의 이름이 누번인 것이 아니라 활을 잘 쏘는 인물이라 누번이라 불렀거나 누번 출신의 장사였을 가능성이 높다.[5] 항량 밑에서 같이 일했고 의형제도 맺은 유방이 항우를 못 알아본다는 건 말이 안 되는만큼, 사후 보고를 받았거나 갑주를 갖춰입은 항우를 멀찍이서 본지라 분간이 안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상식적으로 왕이 죽으면 다 끝인데 아무리 자신감이 넘쳐도 주변에 넘치는 장수들 놔두고 총사령관이 설마 직접 일기토하러 나왔겠느냐 생각하는 게 정상이고.[6] 당시 항우는 파촉도 관중이다. 라는 논리로 유방을 파촉에 처넣었는데, 말할 것도 없는 왕명 위반이다. 사실 항우가 멋대로 분봉한 것부터가 문제투성이겠지만.[7] 거록대전 전 본래 항우의 상관이었던 송의를 살해하고 지휘권을 장악한 일을 말한다.[8] 함양에서 엄청난 약탈을 벌였다는것은 항우본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진시황릉을 도굴했다는 언급은 여기에서만 보인다.[9] 사형집행인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적 지위나 세간의 인식이 바닥을 기는 직업이었다. 선뜻 하겠다는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보니, 사형판결을 받은 사형수가 대신 나서서 다른 죄수들의 처형을 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사형 면제나 연기를 대가로 얻곤 한다. 조선시대의 경우는 이런 죄수들을 '회자수'라고 불렀다. 시바 료타로는 저 부분을 경형을 받은 죄인, 즉 영포로 하여금 목을 치게 하겠다로 해석하였다. 영포에 대한 리스펙이 전혀 없는 해석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