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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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만족 토벌
2.3. 수주 할양 반대
2.5. 만년과 사후
3. 기타
4. 평가
5. 주요 작품


1. 개요[편집]


郭逵, 1022~1088
북송의 명장. 자는 중통(仲通)이며, 낙양 출신. 조적은 거록 지역이었고[1] 적청과 함께 서하 전선에서 활동한 명장이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022년 출생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호탕하여 병법을 즐겨 공부하였는데, 처음에는 아버지 곽빈의 은혜로 북반전시에 보임되었다.

송 인종 보원[2] 연간과 강정[3] 연간 사이에 서하와의 전쟁이 발발하자[4] 그의 형 곽준이 연주서로도순검사로서 전투에 나서지만 서하군에게 살해당하자 조정에 의해 삼반봉직으로 임명된다. 당시 범중엄[5]이 섬서경략사로 있던 중 곽규가 그 부하로 있었는데, 범중엄이 그의 총명함을 보고 병법을 공부하게 하여 이후 그가 큰 공을 세웠다.

곽규는 서하 전선에 있을 때 몇 가지 문제에 대한 견해가 매우 전략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탄복을 받았다. 먼저 한기[6]가 서하를 공격하여 영무를 얻자고 의논하나, 곽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영무는 땅이 멀어도 먹을 것이 없고, 성이 크지만 병사가 많지 않아 이익을 보지 못합니다.

범중엄은 한기의 계획을 부정하였고 결국 출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복의 군대가 전멸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곽규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두 번째로 대장 갈회민에 대한 것이다. 모두가 갈회민을 공천하나 곽규는 갈회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갈회민이 공은 기뻐하고 용맹만 꾀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반드시 조정의 일을 망칠 것이옵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에 분노해 곽규를 무시했으나 곽규는 이를 웃어 넘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갈회민이 패사하였다. 이로써 곽규는 지병자로 칭송되었다.

1044년 8월, 북송과 요나라의 국경인 보주에 주둔하던 운익군이 격변하여 관리를 죽이고 성을 점령하여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곽규가 자진해서 조서를 가지고 성으로 들어가 안부를 물었다. 이후 성 안에서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반군을 설득했다. 그에 대한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곽규는 스스로를 인질로 삼은 뒤 결국 저항세력 429명을 제외한 2000여 명의 반군이 투항해 하북 각주로 보내졌다.


2.2. 만족 토벌[편집]


가우 초년[7]에 호북에서 만족인 팽사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형호북로 병마감관 겸 지예주가 되었다. 그는 먼저 팽사희의 측근을 붙잡아 자신의 곁에 두고 소사로 삼았으며, 팽사희의 측근은 그곳 산천의 지형과 방어의 허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1058년 사로잡은 팽사희의 측근을 길잡이로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나성통과 하부 등 20여 곳의 요충지를 연파하고 신주를 공격하여 밤을 틈타 팽사희의 근거지인 도화주로 진격하자 팽사희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나머지는 모두 항복했다.


2.3. 수주 할양 반대[편집]


1065년 검교태보, 동서추밀원사로 승진하여 섬서선무사를 영령하고 위주를 판시하였다.

1067년 송 신종 조욱이 즉위하자 정난군 유후가 된 후, 선휘남원사로 고치고 판운주로 있다가 충악[8]서하의 장군인 외명산을 압박하여 그를 투항시켰고, 계속해서 수주를 공격하여 접수하였다. 그러나 서하는 오히려 보안군을 공격해 양정을 살해하는 등 북송에 상당한 피해를 입힌 것으로 인해 북송 조정의 여론은 수주를 포기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송 신종도 수주를 불살라 버린 후 포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에 곽규가 수주는 불태울 수 없다고 결단코 반대하였고, 또한 포기할 수 도 없으며 마땅히 지켜내야 한다고 하면서 외명산이 데리고 온 13,000명을 여기에 안치시켰고, 그는 신종의 조서를 은닉한다.

얼마 뒤 서하가 안원과 새문 두 개의 요새를 수주와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곽규는 이것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는 먼저 새문채와 안원채를 북송 정권에 넘겨야 서하에 수주를 넘길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곽규가 보낸 사자는 서하 서평왕이 상부간에 쓴 편지로 새문, 안원 두 곳의 경계가 장성령 아래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서하 사신은 반박할 수 없었고, 이 일은 송나라가 수주를 보유하는 것으로 끝났다. 송 신종은 조서를 내려 그를 검교태위, 웅무군유후를 더하였다.

수상 한기는 영흥군 겸 섬서사로경략사에 있을 때, 외명산 부락에 식량을 주지 못하게 하고 수주를 지키던 송군으로 하여금 회군할 것을 명하나 곽규는 반대한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항복한 강족[9]

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고 모두 궤멸될 것입니다.


한기는 그의 설득에 넘어가 얼마 후 단주의 속을 서하의 항복한 군대로 보냈고 곽규는 이 중 건장한 2천여 명을 병사로 뽑았고, 나머지 남성들은 모두 손에 '충용'이라는 글자를 새겨 달아나지 못하게 했으며 버려진 밭을 나누어 경작하게 했다.


2.4. 송월희녕전쟁 참전[편집]


1075년 베트남 리 왕조가 광서 지역에 공격을 가하자[10] 이에 연달과 함께[11] 1076년 안남도행영 마보군도총관, 경략초토사, 형호남북로, 광남동서로 선무사로 임명되어 부연, 하동에 재직할 때의 옛 부대를 거느리고 베트남과 인접한 잔성, 진랍 등과 연합하여 출격한다.

담주[12], 계주[13]에서 옹주로 진군한 뒤 파죽지세로 옹주와 염주를 차례로 탈환하고 광원주에 이르렀다.

그는 광원주를 요충지로 여겼고, 군사들이 정예하여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광원주 수장 유응기가 이 왕조 측 모주로, 유응기를 먼저 잡지 않으면 군성이 크게 떨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고 이에 따라 공격 방침을 정한 뒤 승리하자 유응기는 항복하였다.

이어 결리애에서 리 왕조의 코끼리 부대와 마주하나 그가 이끄는 군대는 화살을 발사하고 코끼리 코를 베어 가는 등 분전하자 리 왕조의 군대가 후퇴하고 만다.

그 여세를 몰아 실랑·문주 등을 공략했다. 12월, 곽규와 이상걸이 부량강에서 결전하여 베트남군을 대파하고 수천 명을 사살하였다. 리 왕조의 홍진태자, 소문왕자는 전사하고 좌랑장 완근은 포로로 잡혔다.[14]

얼마 뒤 리 왕조의 인종 이건덕이 항복을 청했다. 이때 곽규의 원래 30만 대군은 엄청난 더위와 풍토병으로 인해 사상자가 절반이 넘었고[15] 군량미도 바닥난 상황이었다. 곽규는 철군에 동의했고, 북송과 리 왕조가 화해한 뒤, 부상병을 철수시킨 후에야 조정으로 군대를 옮긴다.

여기서 그는 철군 전 이렇게 한탄하였다.

나는 결국 적의 소굴을 뒤엎고 이건덕을 포로로 잡지 못한 채 되돌아간다. 이는 하늘의 뜻이다. 내 일신으로 모든 전쟁의 책임을 지고 10여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싶다.


또한 이건덕은 자신의 책임을 덜기 위하여, 서백상을 송나라 측에 넘겨주고자 하였다. 그는 서백상의 편지를 물증으로 송나라 측에 제출한 뒤 곽규는 편지를 보자마자 즉시 송나라 지방관에게 전달하고 서백상을 체포하였다.

서백상의 편지 한 통에 적힌 수 십 글자로 두 나라 사이에는 대전(大戰)이 일어나 58,000여 명이 죽었는데, 이 숫자에는 양측의 교전 부상자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서백상은 자신의 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2.5. 만년과 사후[편집]


그로 인해 은청광록태부로 좌천된 이후 10년 동안 서경에 안치되었다.

1085년 송 신종이 승하하고[16] 송 철종 조후가 즉위 후 곽규에게 좌둔위대장군의 직책으로 벼슬에 오르게 하였다.

1087년 광주관찰사, 지중부로 임명되었다. 조서를 들은 후, 그는 곧장 낙양으로 돌아와 늙어 은퇴할 것을 극구 청했고, 조정의 허락을 받아 좌무위 대장군으로 치사한다.

1088년 12월 14일(12월 29일) 낙양 가경리의 집에서 67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송 철종은 소식을 듣고 조회를 그만두고 곽규를 웅무군 절도사와 사공으로 추증했다.


3. 기타[편집]


  • 재상 한강[17]충악으로 하여금 횡산을 탈취하고자 하였으나 이에 반대했다. 한강은 듣지 않고 곽규를 강등시킨 뒤 이를 강행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 왕소가 희하를 개척하자고 주장하나[18] 이에 반대하여 왕소를 탄핵하였고, 이에 분노한 송 신종에 의해 좌천당한다.[19]

  • 후손들은 또 당나라의 명장들인 곽원진곽자의에 곽규를 붙여 삼곽이라 부르며 일대의 종신이라고 칭했다.


4. 평가[편집]


송 인종에 이르기까지 승평 백 년, 무부가 맹졸을 만났을 때 높은 자리에 오른 자는 있었지만, 건강한 병사를 일으켜 정부에 이르렀고 은연중에 명장이 된 이는 오직 적청과 곽규 두 사람뿐이었다. ..(중략).. 곽규가 갈회민의 패배를 헤아린 것은 촛불이 거북을 비추는 것처럼 일시에 군사를 잘 아는 것이다. 비록 남정하여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지만, 그 장점을 거역한다면 또 무슨 죄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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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



5. 주요 작품[편집]


  • 《대경도역》,《오원집》,《절제집》,《주의》,《한강집》이 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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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송 초 그의 선조는 경사에 이주하였다가 이후 낙양에서 정주하였다.[2] 1038년-1040년[3] 1040년-1041[4] 이원호가 하서주랑 일대에서 서하를 건국해 세력을 뻗는다.[5] 중국의 유명한 산문 중 하나인 악양루기로 유명하다.[6] 남송의 권신인 한탁주의 증조부이다.[7] 1056년[8] 청간성을 쌓아 서하를 방어한 충세형의 아들로, 그의 연줄로 청간성을 수비했다. 아버지 충세형과 아들 충사도와 함께 충가장의 일원.[9] 외명산 부락.[10] 당시 재상 왕안석이 광서 일대에 군사력을 증대시키자, 리 왕조의 리트엉끼엣이 선제 공격을 가한다.[11] 연달은 그의 부장으로 출전했다.[12] 지금의 후난성 창사시[13] 지금의 광시좡족자치주 계림[14] 여기서 베트남 측 기록과 중국 측 기록이 다르다.[15] 북송 군대는 대부분이 북방 출신이었다.[16] 서하와의 영락성 전투에서 송군이 패한 뒤 3년 만이었다.[17] 왕안석여혜경과 함께 신법당의 일원이었다.[18] 평융책 3편을 올렸다. 내용은 서하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하, 황 두개의 주를 탈취해야 한다는 내용이다.[19] 곽규는 경원 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