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안 카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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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아리아인-이란계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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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인도이란어파
사상
범이란주의 | 범아리아주의
신화
페르시아 신화 | 인도 신화 | 오세트 신화





파일:Goan Christians.jpg

1. 개요
2. 기원
3. 종교
4. 해외 진출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고안 가톨릭은 인도의 서쪽에 있는 고아에 거주하는 천주교인도인들이다. 인도유럽어족 인도아리아어군 콘칸어를 사용하되 여타 콘칸인들과 구별되는 가톨릭 신도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2. 기원[편집]


콘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 중 하나인 고아는 16세기부로 포르투갈식민지가 되었고, 다른 포르투갈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반강제적인 가톨릭 개종 정책이 시행되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체계적인 해외 식민지 주민 통치 노하우가 부족했고 현지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후 선원이나 군인 등 식민지 운영 인력으로 징집하는 방식으로 식민지를 운영하였다. 상당수의 포르투갈인들이 현지 고안 가톨릭 여성들과 결혼하였고 이러한 연유로 이들은 이름을 지을 때 포르투갈식으로 작명한다.

남아시아에는 고아 이외에도 포르투갈인들이 건설한 해안 식민지가 적지 않았으나, 뭄바이의 경우 1661년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공주가 영국의 찰스 2세와 결혼하는 과정에서 지참금으로 넘겨주었고, 후술하는 말라바르(케랄라)의 식민지들의 경우 네덜란드가 현지 기독교인들과 포르투갈 가톨릭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여 분리시켰으며, 스리랑카 역시 네덜란드가 집어삼켰다.[1] 포르투갈의 구자라트 지역 식민지들(다만, 디우, 다드라, 나가르하벨리)은 구자라트 내 다른 항구 도시들에 밀려서 비중이 적었고, 결국 남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이 전해준 가톨릭 정체성을 보존한 집단으로는 고아의 가톨릭 신도들이 남게 되었다.

3. 종교[편집]


비교하자면 인도 케랄라 지방의 기독교인들은 포르투갈인들의 유입 이전 페르시아인이나 그리스인들에 의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나서도 오리엔트 정교회의 전례를 유지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 혹은 오리엔트 정교회에 속해있다면,[2] 이들 고아의 가톨릭 신도들은 동방 가톨릭교회가 아닌 일반적인 가톨릭 신도로서 로마 전례를 공유하는 편이다.

4. 해외 진출[편집]


비교하자면 스페인의 필리핀 도독령이 실질적으로 중국계 필리핀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들 역시 고안 가톨릭 같은 인도 현지 기독교인들이 식민지 운영 인력의 핵심이었다. 근세 포르투갈이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있던 것도 아니고, 포르투갈 식민제국 입장에서는 머나먼 인도양 식민지에서 믿을 사람들이라고는 유럽 본토에서 파견한 소수의 포르투갈인 병력과 현지인 가톨릭 신도들밖에 없었다. 고아는 포르투갈이 점령하기 이전부터 아라비아 반도에서 수입한 말을 남인도로 공급하는 창구 역할을 맡았고, 숙련된 뱃사람들이 적지 않았다.[3] 고아의 가톨릭 신도들은 선원 혹은 군인으로 징집되어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 각지로 파견되었고, 이 외에도 적지 않은 수가 아프리카 혹은 아소르스 제도나 포르투갈 본토에 정착하였다.

5. 여담[편집]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이후 고아가 인도 공화국 영토로 귀속된 이후에는 힌두교나 무슬림들도 고아에 많이 들어오고, 가톨릭교도들도 힌디어를 생활어로 많이 배우긴 한다. 현재 포어 사용자는 포르투갈 식민 시대에 살던 노인들이나 하지 대다수의 카톨릭교도들도 영어나 힌디어를 더 많이 쓴다.

에어 아시아를 설립한걸로 유명한 말레이시아의 기업인 토니 페르난데스가 아버지로 부터 고아인 혈통을 불려받았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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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으로 네덜란드는 스리랑카를 점령한 이후 현지 불교도나 무슬림들과 힌두교도들은 관용하되, 상술한 이유로 친포르투갈파로 여겨지는 가톨릭교도들만 집중 탄압하였다.대항해시대 유럽인 맞나?[2] 자세한 내용은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시로말랑카라 가톨릭,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등 문서 참조[3] 케랄라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 역시 남인도에서 향신료 무역을 하던 뱃사람들이었다. 문제는 대항해시대 당시 가톨릭 교조주의 성향이 강했던 포르투갈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인정하지 않고 이들을 이단이라고 탄압함과 동시에 돈도 안주는 주제에 군인이나 선원으로 마구 징집했던 것. 결국 포르투갈의 압제에 분노한 케랄라의 기독교인들은 (포르투갈을 견제하려는) 네덜란드의 주선 하에 이라크와 시리아의 다른 오리엔트 기독교인들과 연락을 회복하고 포르투갈과 절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