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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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48년 12월 28일
사망
1979년 5월 29일 (향년 30세)
본관
제주 고씨
가족
1남 4녀 중 다섯째
배우자 이희수, [1]

1. 개요
3. 사망
4. 기타



1. 개요[편집]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

고상돈(高相敦)은 1948년 제주도(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에서 태어난 산악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본관과 같은 제주도 제주시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성장하여 청주상업고등학교(현 청주대성고등학교), 청주대학교를 졸업하였다.


2. 에베레스트산 등정[편집]


1977년 9월 15일 대장 김영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등과 함께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오르는 대기록을 남겼다.

해발 8,000m 지점까지는 다 같이 등반했다. 하지만 그 이후는 1명씩 등반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등반자를 결정해야 했는데 원래 박상열이 정규 등반자, 고상돈은 후보였다. 박상열이 셰르파인 앙 푸르바를 데리고 먼저 출발했다가 산소 부족 문제로 인해[2] 정상을 100m 남겨둔 지점에서 연락이 끊겼다가, 구사일생하여 돌아오는 길에 마중을 나갔던 대원들과 합류해 무사히 귀환했다. 그로 인해 고상돈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

당시 고상돈은 힘이 장사라서 다른 대원들의 2배나 많은 짐을 짊어질 수 있었기에 더 많은 산소통을 가져갔다. 덕분에 정상 정복에 성공하게 된다. 고상돈은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정상을 향해 출발하는데 김영도 등반대장은 셰르파로 펨바 노르부와 펨바 체링을 붙여줬다. 아침 9시 고상돈은 남봉에 도착했으며, 남봉에 있는 칼날 능선을 통과했다. 칼날 능선을 통과하자 직벽에 가까운 9m 빙벽 '힐러리 스텝'이 나왔는데[3] 고상돈은 이를 2시간 30분동안 건너가서 12시 50분에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정상에 도착한 고상돈의 발에는 정체 불명의 삼각대가 채였다. 이 삼각대는 김영도 대장의 말에 의하면 1975년에 중국팀이 정상 정복한 이후 놓고 간 물건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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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등정 당시. 마지막 사진에 찍힌 사진첩은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작하기 이전에 설악산에서 동계 훈련을 할 때 눈사태에 휩쓸려 사망한 대원 3명의 사진이다.[4] 이 때문에 에베레스트 등정 도전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많았으나 더욱 매진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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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직후의 모습. 빨간 옷을 입은 이유는 사진 촬영을 할 때 사진에 잘 찍히게 하려고 입은 것이다. 이 사진은 셰르파인 펨바 노르부가 촬영했다. 태극기만 들고 두 팔을 든 사진도 알려져 있는데, 그쪽은 원정에 동행했던 김운영(당시 한국일보 사진부장)이 촬영했다.#

이후 유명인사가 되어 청와대에도 초청받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간략한 일대기가 포함된 한라일보 기사

3. 사망[편집]


1979년 5월 알래스카데날리 산[5] 등정 일정을 잡아, 정부 관계자들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장비와 자금을 든든하게 갖추어 등반, 정상 등정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하산 도중 극심한 체력 소모로 인해 웨스턴리 800m 빙벽에서 자일 사고로 동료 대원 이일교(1956~1979)와 함께 추락사했고, 베이스 캠프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외국 등반대원들이 추락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신고하여 시신을 수습했다. 발견했을 당시 고상돈과 동료 대원 이일교는 이미 숨져 있었고 박훈규(1948~ )는 심한 동상으로 인해 발가락 10개 전부와 손가락 8개를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살았다고 한다.사건 당시의 신문 기사[* 앞에 시신 2구가 있는데 앞쪽 시신이 이일교 뒤쪽 시신이 고상돈 그리고 뒤에 있는 사람들은 시신을 수습하는 미국 '지네트' 등반 팀이다.]

이후 고상돈과 동갑인 박훈규는 은퇴한 뒤인 2004년부터 2018년까지 고상돈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6][7] 2019년 기사[8]


4. 기타[편집]


  • 웅진출판사(현 웅진씽크빅)에서 만든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 중 30권[9]이 고상돈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읽어볼 만하다. 상술한 에베레스트 등정의 자잘한 에피소드부터 매킨리 산에서의 추락사까지 자세하게 만화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위에 언급된 김운영이 감수를 맡았기 때문에 고증도 좋은 편.

  • 힘이 좋고 하체가 매우 탄탄하여 가득 채운 등산짐 2개를 짊어지고도 거뜬히 산행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위에 말한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의 고상돈 편에서 대학교 등산반 활동 당시 훈련이랍시고 돌을 가득 채운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는 걸로 묘사되었다.

  • 제주도에서는 1100도로의 일부 구간[10]고상돈로라 명명해 기리고 있으며, 그의 묘소는 기념비, 동상 등과 함께 고상돈로의 중간인 1100고지 휴게소에 위치하고 있다.

  • 부인은 패션사업을 하고 있고 친딸이 이화여자대학교를 나왔다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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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망 이후 태어난 유복녀이다.[2] 산소를 아끼겠다고 체크포인트를 예정보다 무리하게 앞당겨서 올라가는 바람에 회복하느라 산소를 더 쓰고 말았다.[3] 에베레스트 최초의 등반자 에드먼드 힐러리의 이름을 딴, 엄청난 경사로 악명높은 구간이다. 위키백과[4] 1976년 2월에 일어난 사고로, 최수남 정찰대장을 필두로 전재운, 송준송, 이기용, 김호진과 하술할 박훈규 대원이 1275m봉 안부 중간 지점에서 눈사태에 휘말려 최수남 대장과 전재운, 송준송 대원이 희생됐다. 이들을 마중나오던 고상돈 역시 나중에 눈사태에 휘말려서 위험할 뻔했다고 한다. 눈사태에 휘말린 일행들 중 제일 먼저 빠져나온 사람이 박훈규 대원이었다.[5] 등반 난도가 14좌 버금가는 산이라고 한다. 자세한 부분은 항목 참조.[6] 현재의 고상돈기념사업회는 재창립된 재단이며 1985년에 1차 창립되어 10년간 운영하다 전국 단위로 규모를 키우자며 서울로 옮겨갔지만 문화체육부의 인가를 받지 못해 흐지부지 해체되었다. 이후 2004년에 제주도 출신 산악인들이 뜻을 모아서 재창립한 것이 현재의 고상돈기념사업회다.[7] 사족으로, 박훈규는 집안 사정 때문에 에베레스트 최종 대원에 선발됐지만 고사했다고 하는데, 고상돈이 박훈규를 대신해서 보결로 참여하게 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다.[8] 맨 위의 사진은 2017년 산악인의 날 행사에서 고상돈기념사업회 주관인 고상돈특별상을 김홍빈 대장이 수상한 모습이다.[9] 마지막 권[10] 제주시 노형동 어승생 삼거리에서 서귀포시 중문동 구 탐라대학교 사거리까지의 구간으로 다른 지방도와 겹치지 않는 1100도로의 고유한 구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