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요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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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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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
생애 및 업적 | 평가 | 여요전쟁
관련 문서
선릉 | 김훈·최질의 난
기타
여담



여요전쟁
麗遼戰爭
고려-거란 전쟁 | 高麗-契丹戰爭
시기
993년 (고려 성종 12년) ~ 1019년 (고려 현종 10년)
전투 경과도
장소
한반도 북부 및 중부 전역
원인
고려의 관계 악화
의 예방전쟁
교전 세력
고려
(수비)



(공격)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왕치 (고려 성종)[1]
파일:고려 의장기.svg 왕순 (고려 현종)[2]
파일:고려 의장기.svg 박양유
파일:고려 의장기.svg 서희[3]
파일:고려 의장기.svg 최량
파일:고려 의장기.svg 최사위
파일:고려 의장기.svg 대도수
파일:고려 의장기.svg 유방
파일:고려 의장기.svg 강조[4]
파일:고려 의장기.svg 양규[5]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숙흥
파일:고려 의장기.svg 정성
파일:고려 의장기.svg 지채문
파일:고려 의장기.svg 강감찬[6]
파일:고려 의장기.svg 강민첨
파일:고려 의장기.svg 이현운
파일:고려 의장기.svg 하공진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훈[주살]
파일:고려 의장기.svg 최질[주살]
파일:고려 의장기.svg 탁사정
파일:고려 의장기.svg 조원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종현
지휘관

[[요나라|
]] 야율융서 (요 성종(聖宗))[7]
[[요나라|

]] 소손녕[8]
[[요나라|

]] 소배압[9]
[[요나라|

]] 야율적로
[[요나라|

]] 야율분노
[[요나라|

]] 야율팔가
[[요나라|

]] 야율홍고
[[요나라|

]] 야율세량
[[요나라|

]] 야율호덕
[[요나라|

]] 한기
[[요나라|

]] 을름
[[요나라|

]] 소굴렬
[[요나라|

]] 소요지
[[요나라|

]] 소합탁
[[요나라|

]] 해리
[[요나라|

]] 고청명
[[요나라|

]] 아과달
[[요나라|

]] 작고
[[요나라|

]] 마수
병력
1차 : 병력 규모 불명[10]
2차 : 약 300,000명[11]
3차 : 약 200,000명[12]
1차 : 약 800,000명[13]
2차 : 약 400,000명[14]
3차 : 약 100,000명
피해
총 피해 규모 불명[15]
총 피해 규모 불명[16]
결과
1차 : 강동 6주 획득
2차 : 개경 함락과 현종의 몽진
3차 : 거란의 완전 종속 시도 분쇄
1차 : 내원성·보주 획득
2차 : 개경 점령과 성종의 권위 확립[17]
3차 : 고려에 대한 완전 종속 시도 실패
영향
고려--의 세력 균형 체제 구축[18]
1. 개요
1.1. 영향
1.2. 명칭
2. 목록
3. 대중매체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여요전쟁(麗遼戰爭) 또는 고려-거란 전쟁(高麗-契丹戰爭, Goryeo-Khitan Wars)은 993년(성종 12년)부터 1019년(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26년간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 전쟁을 가리킨다.


1.1. 영향[편집]


서희, 양규, 김숙흥, 강감찬 등 여러 인물들이 활약한 전쟁이지만, 요나라의 주류 민족이었던 거란족은 오늘날 중국몽골에 흡수되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이나 고려시대여몽전쟁[19], 조선시대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다른 주요 전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묻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원된 군인의 수만 봐도 상기된 전란들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큰 규모의 전란이었으며, 후일 고려 및 동아시아를 1세기 이상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전쟁인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망국 발해의 유민들은 요나라군으로 참전한 고청명, 고려군으로 참전한 대도수처럼 옛 발해인끼리 서로 싸우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았다. 이후 발해인들은 여·요 각국에 동화되어 사라지게 된다.[20]

거대 유목 제국을 패퇴시킨 대규모의 전투임에도, 세계사적인 인지도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고려는 승전 이후에도 보주 문제로 요나라에게 소극적으로 굽히는 형국이 계속되었고, 거란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건재했기 때문이다. 세계사적으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사에서도 이웃국가인 중국과 일본에서조차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 여요전쟁이다. 위키피디아의 문서의 양적 측면에서도 한국사의 다른 전쟁들보다 인지도가 많이 떨어진다. 그러나 전근대 정주문명 국가에게 있어서 100,000명 단위의 유목민 침공은 거의 신의 채찍이나 다름 없는 대재앙이었고, 그걸 이토록 완벽하게 분쇄한 전투는 세계사를 찾아봐도 사례가 많지 않다.

한민족이라는 개념에도 상당히 중요한 전쟁인데, 발해가 멸망해 만주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 후 중원 왕조의 도움 없이 한반도와 만주 유목 제국이 붙은 첫 대규모 전쟁이자 전면전으로 2차,3차 전쟁은 말그대로 고려의 국운을 건 총력전이었다. 때문에 이전까지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되지 않아 신라 호족,후백제 호족,태봉 호족,고구려 유민등 지방 호족들의 연합체처럼 엉성한 체제였던 고려는 국가 존립의 위기에서 그야말로 과거 내전 전력은 묻지 않고 모두가 총동원되어 거란의 침공을 막아냈다. 이 과정에서 고려의 지휘자 현종은 이전부터 행했던 삼국 능묘의 정비를 통한 정서적 단결 유도는 물론, 전쟁에 참전한 모든 백성을 위해 전사자 가족지원, 유해발굴사업등을 시행해 한반도의 모든 사람들을 처음으로 고려 사람으로 단결하게 했다. 그로 인해 전쟁 승리후 더이상 왕조부흥운동등이 일어나지 않고 고려는 단일민족으로써 안정적인 중앙집권국가로의 변모에 성공한다.

1.2. 명칭[편집]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신편) 한국사》 등의 서적, 공무원시험 등 주요 공식 시험 및 학술 논문 등에서는 '여요전쟁'으로 칭하고 있다. 일부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거란의 침입'이라는 단어로 통용된다.

거란이 처음으로 고려에 침입한 993년부터 귀주대첩으로 전쟁이 끝나는 1019년 당시까지 사용한 이름은 '거란'이었다. 당시 거란인들은 자신들이 세운 국가의 명칭을 두고 민족명에서 유래한 '거란'과 요태종 시기 명명한 '(遼)'를 혼용했는데, 《요사》 성종 2년(983년)에는 '국호를 다시 거란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거란이라는 국호를 다시 '요'로 되돌린 건 1066년 도종 때인데, 그나마 요가 국호이던 시절에도 귀족들은 거란어를 사용했기에, 한자로는 '요'라고 표기해도 거란어로는 '모스 키탄(대거란)'이라고 칭했다. 따라서 정작 전쟁 중에는 '요'라는 국호를 사용한 적이 없다(거란이나 요나라 문서 참고).[21][22]

한국에서도 고려-거란 전쟁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일부 쓰이기도 한다. 예로 안주섭명지대 박사 논문 제목은 〈고려-거란 전쟁사 연구〉이다.

위키백과 한국어판에서는 '고려-요 전쟁'과 '고려-거란 전쟁'이 같이 쓰이며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Goryeo-Khitan Wars(고려-거란 전쟁)'라고 표기하고 있다.[23][24]


2. 목록[편집]



2.1. 제1차 여요전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1차 여요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93년의 침공은 일종의 무력시위였고, 서희강동 6주를 받은 외교 담판으로 유명하다.


2.2. 제2차 여요전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여요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10년의 침공은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요 성종이 친정을 나서 강조가 이끌던 30만 고려군이 통주 전투에서 대파되고 그 여파로 개경까지 함락당하고 고려 현종이 몽진하는 등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갔다.


2.3. 제3차 여요전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3차 여요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14~1017년, 거란은 국지 도발을 했으며, 1018년에 본격적인 대군이 침공했다. 강감찬귀주 대첩으로 유명하다.


2.4. 이후[편집]


이 세 번의 전쟁을 여요전쟁으로 보고, 이후에 발생한 거란의 침입은 국지전 수준으로 본다.

1029년, 요나라의 동경요양부에 발해부흥운동의 하나로 대연림이 난을 일으키고 고려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해 곽원이 거란으로 출정하였으나 두세달 만에 실패했다.

1033년, 덕종천리장성 구축의 일환으로, 압록강 하류의 인주(麟州)와 위원진(威遠鎭) 사이에 새로 정주(靜州)성을 쌓자, 이를 명분으로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으나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1037년 10월, 정종 대에 거란이 해군으로 압록강을 침입했으나 별 성과 없이 돌아갔다.

1125년 요나라금나라에 의해 진작 망했으나, 한참 뒤 1216년에 그 유민들이 터전을 갖고자 절박한 발악으로 압록강 일대에 영토를 가지려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이 발생했다. 쉽게 격퇴되지 않자 몽골이 군사개입을 했고, 고려와 몽골의 우호적이지 않은 첫 접촉이 되었다.

3. 대중매체[편집]


  • 1973년에 방영한 드라마 강감찬에서 1차부터 3차까지 모두 다루었다고 하지만, 필름이 소실되어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 KBS 드라마 <천추태후>가 1차부터 3차까지의 여요전쟁 전체를 다루었으나 드라마의 특성상 각색이 많이 되었다. 특히 1차(드라마 22회~35회(후속 과정 포함))와 2차(72회~78회 초반)에 비해 3차는 드라마 최종회(78회)의 중후반 5분 정도로 짧게 표현했다. 1차 및 2차 사이사이만 빼면 전체적으로 실망적인 묘사였는데 양규김숙흥의 경우, 그들의 최후 전투라 볼 수 있는 애전 전투에서의 비장함은 잘 살렸다.
  • 정확하게 제대로 여요전쟁을 다룬 미디어는 JTBC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로, 역사학자들의 자문을 얻어 제2차, 제3차 여요전쟁의 전반적인 흐름을 잘 다루었다.
  • 2023년 11월 11일 첫방송하는 <고려거란전쟁>이 2차, 3차 여요전쟁 부분을 다루고 있다.


4. 관련 문서[편집]



[1] 1차 여요전쟁[2] 2~3차 여요전쟁[3] 1차 여요전쟁[4] 2차 여요전쟁(통주 전투)[5] 2차 여요전쟁[6] 3차 여요전쟁(귀주대첩)[주살] A B [7] 2차 여요전쟁(친정)[8] 1차 여요전쟁[9] 2~3차 여요전쟁[10] 안융진 전투같은 소규모 국지전이 있었으나 대규모 전면전 없이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끝났다.[11] 통주 전투 동원 병력을 중심으로 집계한 수치.[12] 귀주 대첩 동원 병력 208,300명을 중심으로 집계한 수치.[13] 기록에 과장해서 서술하는 호왈의 일종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 병력은 6만 정도로 추정하기도 한다.[14] 이것도 과장으로 보고 있다.[15] 다만 2차 여요전쟁 당시 통주 전투 한곳에서만 고려군 전사자가 3만명이나 발생하였음이 확인된다.[16] 다만 3차 여요전쟁 당시 귀주대첩에서 10만의 거란군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음이 확인된다.[17] 거란 성종의 고려 친정(親征) 배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 거란의 정세 분석을 중심으로 (권용철, 동방학지, 2021, vol., no.197, pp. 1-25 (25 pages))[18] 1109년 고려의 여진 정벌 및 1125년 금나라-송나라 연합에 의한 요나라 멸망까지 100년 간 힘의 균형에 의한 평화. 동시기 유럽에서 인도까지 세계는 소국으로 쪼개진 전쟁의 시기였음과 대조된다.[19] 이쪽도 사실 좀 묻히는 경향은 있다.[20] 정확히는 만주 일대에 남은 발해인의 정체성이 발해부흥운동을 통해 이후 건국되는 금나라 때만 해도 살아 있었지만, 원명시대를 거치면서 한화 내지 소멸되었다.[21] 다만, 하나의 국체를 끊임없이 유지한 나라의 국호가 여러 번 바뀌었을 때,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름이 그 국체의 전(全) 시기를 대표하게 되는 경우는 흔하다. 대표적으로 고구려만 해도 장수왕 때부터 국호가 고려로 바뀌게 되었는데, 후의 왕건의 고려와 따로 구별하기 위해 이름 변경 이후도 고구려라고 총칭하고 있다. 백제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했다는 기사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백제라고 불린다(물론 이는 남부여라는 명칭이 당대에도 잘 정착하지 못했던 탓도 있다).[22] 비슷하게 당대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명칭임에도 후대인들의 편의를 위한 통용명칭이 역사용어로써는 정식명칭으로 자리잡는 경우 또한 흔하다. 예를 들자면 일본 전국시대부터 영주들이 다스리던 영지를 일컫는 (藩)도 당대에는 쓰이지 않았지만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편의를 위해 통용하던 명칭이 정식 용어로 자리잡게 된 경우이며, 중국사의 수많은 국호들도 당대에는 전혀 쓰이지 않았지만 후대인들의 편의를 위해 통용된 명칭이 정식명칭으로 자리잡았다(북연, 후연, 전진, 서진 등). 한국사에서도 물론 예외는 아니라 고조선, 북부여, 동부여, 후백제 같은 정식명칭으로 자리잡은 통용명칭이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여요전쟁 또한 특별히 혼동을 유발하는 게 아닌 이상 후대인들의 역사용어로써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23] 전쟁의 형식이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침략 전쟁이므로 영어식으론 Khitan Invasion of Goryeo(거란의 고려 침공, 내지 거란의 고려 침략이란 의미)가 돼야겠지만, 한국에서 여요전쟁이라 하는 것을 감안해서 Goryeo-Khitan Wars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보통, Wars는 영토 분쟁, 정치·이념적 분쟁(베트남전 등), 계승권 분쟁 등, 특정 국가를 완전 장악하기 위한 것이 아닌 전쟁에 붙는 명칭이다. Invasion이 특정 국가의 완전 장악을 위한 전쟁, 즉 침략 전쟁을 의미한다. Invasion 형태의 전쟁이 격 있게 명명되면, 혹은 그 규모가 국가 하나 단위급으로 크지 않은 몇몇 지역에 국한된다면 Conquest(정복)가 된다.[24] 한편 위키백과 일본어판에서는 '契丹の高麗侵攻(きったんのこうらいしんこう,거란의 고려 침공)'이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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