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사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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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개요[편집]


옛날 열국(列國)에는 제각기 사관(史官)을 두고 그때 일을 맡아 기록하는데 잘하고 잘못한 것을 자세히 드러내어 권장하고 징계하는 자료로 삼았으니, 진(晉) 나라의 승(乘)과 초(楚) 나라의 도올(檮杌)과 노(魯) 나라의 춘추(春秋)가 바로 이것이다. 고려씨(高麗氏)가 그 시조 때부터 역대로 모두 실록(實錄)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글이 전쟁을 거친 뒤에 나와 없어지고 잘못된 곳이 많았다. 공민왕 때에 와서 시중(侍中)으로 치사(致仕)한 이제현(李齊賢)이 사략(史略)을 짓는데 숙왕(肅王)에서 끝냈고,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과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금경록(金鏡錄)》을 짓는데 정왕(靖王)에서 끝냈으니, 모두 너무 소략하였고 그 외에는 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없다. 우리 국왕 전하가 즉위하신 처음에 판삼사사(判三司事) 신(臣) 정도전(鄭道傳)과 신(臣) 정총(鄭摠) 등에게 명령하여 고려국사를 찬술하라고 하였다. 신 등이 이 명령을 받고 몹시 걱정이 되어서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본래 자질이 용렬하고 못났으며 재주도 삼장(三長)이 없는데다가 기록되어 있는 것도 완전하지 않으니, 아무리 연구하여 잘 절충하려하나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치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 다를 것이 없으니, 다 없어지지 않고 다행히 남아 있는 것을 가지고 의리(義理)로 따져서 이끌어 펴고 비슷한 일을 확충시키면 그 시비득실을 대부분 다 알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재주도 없고 학문도 변변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곧 착수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왕(元王) 이상은 참람한 기록이 많으니 지금 그전에 종(宗)이라 했던 것은 왕(王)으로 하고, 절일(節日)이라 했던 것은 생일(生日)로 하고, 조(詔)는 교(敎)로 하고, 짐(朕)은 여(予)로 한 것은 명분을 바르게 한 것이요, 조회와 제사는 보통 일이기 때문에 조회에 연고가 있으면 기록하고 임금이 친히 제사지내는 것을 기록하는 것은 예(禮)에서 삼가는 것이요, 재상의 제배(除拜)를 기록한 것은 그 책임을 중하게 여긴 것이요,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 뽑은 것을 기록한 것은 어진 사람을 찾는 것을 중하게 여긴 것이요, 대간(臺諫)이 복합(伏閤)한 것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이 빠졌어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충신을 나타낸 것이요, 상국(上國)의 사신이 왕래한 것은 아무리 자주 있어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천왕(天王)을 높인 것이요, 천재지변과 수해와 한해(旱害)는 아무리 피해가 작아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하늘의 꾸짖음을 근신한 것이요, 사냥하고 잔치한 것은 아무리 자주 있어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멋대로 노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삼가 생각해 보건대, 국왕 전하는 성스럽고 슬기로운 자질과 높고 밝은 학식으로 옛 전적을 강구하고 연마하여 행동이 예전 명철한 제왕을 본받으시는데 이 책이 유실되고 소략한 속에서 뽑아낸 것이니, 임금과 신하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과, 정치 교화의 득실과 예악의 연혁과 풍속의 좋고 나쁜 것을 구비하여 기록하지는 못하였으나, 《시경(詩經)》에 ‘은나라의 거울이 멀지 않다. 하후(夏后) 시대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귀와 눈으로 듣고 본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중요한 정무를 보시는 여가에 보시면 선악취사의 단서와 정사를 하며 백성 다스리는 도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있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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