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화

덤프버전 : r20210301


성명
계화(桂和)
이명
계활(桂活)

백연(白淵)
생몰
1885년 10월 7일 ~ 1921년
출생지
평안북도 선천군
본관
수안 계씨
사망지
중국 지린성 영안현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계화는 1885년 10월 7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했고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9년 만주 용정촌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서일 등과 함께 중광단(重光團)을 토대로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기 위하여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했다. 그는 애국청년을 포섭하여 독립군을 편성하고 <일민보(一民報)>, <한국보(韓國報)> 등 독립운동신문을 발행했다.

하지만 무기를 준비하지 못해 고심하던 중 김좌진이 만주로 오자 그를 맞이하여 1919년 8월 7일 서일, 현천묵, 이장녕(李章寧) 등과 함께 정의단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했다. 군정부는 본영을 지린성 왕청현 서대파구에 두고 시베리아에 출병한 체코 군대에 교섭하여 노령 해삼위(海蔘威)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경무장(輕武裝)을 구축했다.

1919년 12월, 군정부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되고 계화는 경리부장에 취임하여 일본군에 대항할 양곡과 장비를 갖추는 데 힘썼다. 또한 간도 북부 총판재무관서의 재무관에 취임하여 동북만주 교민과 자치 및 경제력 향상을 위하여 활약했으며,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했다. 이후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로 망명하여 소련군과 협정을 맺고 독립군을 양성하려 했지만, 소련이 일본과 갈등을 빛고 싶지 않아 독립군의 무장을 헤제시키자 김좌진과 함께 만주로 되돌아오다가 1921년경 중국 지린성 영안현 부근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계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