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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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桂亨淳
북한의 정치인, 기계공업 테크노크라트.

무려 3번이나 혁명화를 다녀오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끝내 재기하는데 성공한 나름 북한판 인간승리의 표본이다.

2. 생애[편집]


1927년 5월 7일,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어서 가정형편이 어렵게되는 바람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14살부터 공장에서 막노동을하면서 살았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무장자위대에 입대하여 공장을 지켰고, 1945년 9월말 남포시의 당조직 사업을 맡고 있던 김경석의 눈에 띠어 그의 후원으로 남포중학교에 편입하여 다시 공부를 하게 되었다.

1946년에 북조선로동당에 입당, 김일성의 도움으로 1948년에 김일성종합대학 특설학부 졸업 이후 1950년, 스베들롭스크의 우랄 공과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왔다. 1952년에 귀국, 희천기계공장 야금부장으로 배치되어 이후 룡성기계공장 기사장으로 승진했다. 희천기계공장 재직 시절에 소련 고문이 자신의 아내를 유혹하려 하자 열받아서 소련 고문을 두들겨팼다가 철직된 사건도 있었다. 7월에 평양시 인민위원회 농업부 부부장, 1962년 7월, 2차 내각의 농업성 부상에 임명, 1962년 10월에 출범한 3차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1963년 2월, 농업성이 농업위원회로 개편되자 농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재직했다.

1963년 12월, 기계공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이임했으며 1965년 2월, 기계공업위원회가 기계공업성으로 개편되자 기계공업성 부상으로 유임되었다. 1965년 2월, 동독 라이프치히로 파견되었으며 1966년 12월, 용접협회 위원장을 겸하게 되었다. 1969년 12월에 제1기계공업상에 임명되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기계공업성들이 중공업위원회로 통폐합되면서 내각 중공업위원회 산하 정밀기계공업관리국장에 임명되어 사업하였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북한 선전에 따르면 뭔가 사고를 치고 말았다는데 이 때문에 금성뜨락또르 공장으로 하방되어 혁명화를 당했다. 하지만 거기서 일을 열심히 하여 1973년 7월 26일에 리자방, 조세웅과 함께 김일성훈장을 수훈받게 되었다. 이에 김일성은 그를 크게 칭찬하면서 다음날로 즉각 기계공업위원장으로 승진시켜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사고를 쳤다고 하며 이 때문에 김일성에게 불려가서 쪼인트를 까인 후 희천공장긱계공장 주물공으로 혁명화를 갔으나 1976년 12월에 용서를 받고 복권된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예산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는 한편 정무원 기계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978년 5월에 또 사고를 치고(...) 2번이나 혁명화를 다녀왔는데 이젠 정치적으로 끝장났다고 여겨 반쯤 미쳐버렸다고 하는데 김일성이 사람은 고칠 수 있다고 하면서 3차 혁명화를 보내고 1979년 6월에 많이 고쳐졌다고 여겨 대안중기계공장 지배인으로 임명하였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그러던 1986년 11월 2일, 김일성이 신임 금속 및 기계공업위원장으로 계형순을 추천하게 되면서 신임 금속 및 기계공업위원장에 임명, 1986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12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으며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에서 금속 및 기계공업위원장에 유임되었다. 북한 선전에 따르면 1987년 5월에 그가 환갑을 맞이하자 김정일이 환갑상을 내려주었다 카더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금속 및 기계공업위원회가 금속공업부와 기계공업부로 나뉘면서 1987년 10월 14일, 기계공업부장에 유임,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에 당선, 정무원 기계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런데 1993년 2월 1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기계공업부장에서 해임, 곽범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해임당한 충격이 컸던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해임당한 것이 건강상의 문제였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1년도 안된 1993년 11월 30일 5시 20분에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와 정무원은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다년간 중앙과 지방의 여러 단위의 중요한 직책에서 사업하면서 우리 당이 제시한 경제정책을 관철하기 위하여 자기의 정력과 지혜를 다 바쳤으며 나라의 기계공업을 발전시키며 자립적 민족경제의 토대를 강화하는데 적극 공헌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사망 시에 중앙위원회 위원 및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 즉시 부고가 나왔다는 점 등을 미루어 봤을 때 건강상의 문제로 해임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후 김정일의 지시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1994년 12월 26일자 로동신문은 <한 일군의 혁명화에 깃든 숭고한 사랑: 계형순 동지가 받아안은 높은 신임과 크나큰 은정>이라는 기사를 송고하여 그의 일생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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