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엘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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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게오르크 엘저.jpg

요한 게오르크 엘저
Johann Georg Elser
1903.1.4 ~ 1945.4.9

1. 개요
2. 생애
2.1. 평범한 목수
2.2. 히틀러 암살 시도, 그리고 최후
3. 추모
4.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나치 독일총통 아돌프 히틀러 암살을 꾀한 인물.


2. 생애[편집]



2.1. 평범한 목수[편집]


1903년 1월 4일 뷔르템베르크 왕국 헤르마링겐에서 루트비히 엘저와 마리아 뮐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목공이었고, 어머니는 농장에서 일했는데, 게오르크가 태어난지 1년 후에 결혼했다. 게오르크에게는 프레데리크, 마리아, 안나, 루트비히, 안나, 그리고 레오나르드 등 다섯 동생이 있었다. 1910년부터 1917년까지 초등학교에 다녔고, 이후엔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목공으로 일했다.

게오르크는 숱이 많은 머리를 뒤로 단정히 빗어 넘긴 아담한 몸집의 사내였다.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 친구 없이 외롭게 지냈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매사에 성실한 친구라며 호감을 표했다. 그는 조용하고 과묵하고 부지런했으며, 일터에서는 완벽주의자였다. 초등학교만 다녀서 아는 게 별로 없었고, 책도 안 읽었으며, 신문도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다.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정치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정치 토론을 벌인 적도 없었고, 이념에도 어두웠다. 공산주의적색투쟁전선동맹에 가담한 적도 있고, 목공 노조에도 들어갔지만, 당원 이름만 올렸을 뿐 군중 대회에 참석한 적은 별로 없었다. 훗날, 게오르크는 게슈타포에게 "내가 지금까지 집회에 참석한 적은 딱 3번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구경 좀 하고 금방 돌아갔다."라고 밝혔다. 1933년까지 독일공산당에게 투표했고, 노동자 단체에 이름을 올렸으나, 그것은 노동자 형편이 좋아지려면 이들을 투표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해서가 아니었다.

게오르크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등극하고 나치 독일이 집권한 이래,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계속 떨어지고 자유도 줄어드는 상황을 목격했다. 또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체제에 대한 분노가 터져나왔다. 그는 동료들의 대화에 끼여들지 않았지만, 대화를 묵묵히 엿들으면서 나치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라디오로 방송되는 히틀러의 연설을 듣지 않았으며, 1938년 나치 당원들의 행진이 쾨니히스브론에서 진행될 때, 주변 사람들이 히틀러에게 나치식 경례를 하는 와중에도 팔짱을 끼고 있기만 했다. 한 이웃이 그에게 순응하는 것이 현명할 거라고 상기하자, 그는 "차라리 내 엉덩이에 키스하겠어."라고 답했다고 한다.[1]

1938년 가을 체코 위기가 진행되다가 뮌헨 협정이 체결되면서 주데텐란트가 독일에게 귀속되었다. 대다수 독일 국민은 히틀러에게 찬사를 보냈지만, 게오르크는 히틀러의 행보를 볼 때 조만간 다시 다른 나라 땅을 차지하려 들 것이고, 따라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확신을 품었다. 그는 전쟁을 막기 위해 히틀러, 괴링, 괴벨스 같은 정권 수뇌부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암살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2.2. 히틀러 암살 시도, 그리고 최후[편집]


1938년 11월 8일, 게오르크가 설치한 폭탄이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에서 폭발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폭탄이 터지기 13분 전에 맥주홀을 떠나서,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자세한 내용은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 폭파 사건 참조.

폭탄이 터져서 맥주홀이 아수라장이 되었을 무렵, 게오르크는 콘스탄츠에서 스위스 국경을 몰래 넘으려다 체포되어 콘스탄츠 부근의 세관에 잡혔다. 처음에는 특별한 의심을 받지 않았지만, 폭발이 일어나고 몇 시간 뒤 출입국 관리들이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 사진이 들어간 그림 엽서를 게오르크의 호주머니에서 찾아내면서, 그는 히틀러 암살 시도범으로 지목되었다. 11월 14일, 게오르크는 게슈타포에게 자신이 암살을 시도한 게 맞다고 밝혔고, 사건의 전모와 동기를 털어놓았다.

이후 작센하우젠수용소에 끌려간 그는 뜻밖에도 특별대우를 받았다. 아마도 게오르크의 배후에 국제적 음모가 있다고 여긴 히틀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여론 조작을 위한 공개 재판을 벌여서 영국 첩보부에 먹칠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1944년 말에서 1945년 초 다하우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다하우 수용소 경비를 맡았던 슈츠슈타펠 장교 레흐너는 훗날 게오르크가 수용소에서 자신의 암살 시도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진술했다.

"전 생애를 통틀어 히틀러는 독일의 몰락을 상징합니다. 제가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전 그렇지 않습니다. 에른스트 텔만에게 동정심을 느끼지만, 히틀러를 제거하는 건 저만의 독창적인 발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들켜버렸고, 이제 대가를 치러야겠지요. 그들이 날 즉시 처형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미군이 다하우로 진입하기 일보 직전이던 1945년 4월 9일, 엘저는 총살되었다. 향년 42세.


3. 추모[편집]


  • 2003년 1월, 독일 우편국은 게오르크 엘저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특별 우표를 발행했다.
  • 2008년 10월 24일, 베를린 시는 게오르크 엘저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발표했다.#
  • 2015년 그의 히틀러 암살 시도를 다룬 영화 <13분>(독일어: 엘저)가 개봉되었다. 올리버 허쉬비겔(Oliver Hirschbiegel) 감독.#


4.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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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슈나이트하임 출신의 공산주의자이자 게오르크와 면식이 있던 요제프 슈러(Josef Schurr)가 1947년 울름의 한 신문사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게오르크는 항상 히틀러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폭력성에 극도로 반감을 품었으며, 히틀러를 항상 '집시'라고 불렀고, 그의 얼굴은 전형적인 범죄인 상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