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도 게르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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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도 게르마니아
Welthauptstadt Ger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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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아 조형도
국가
[[나치 독일|

나치 독일
display: none; display: 나치 독일"
행정구
]]

계획자
아돌프 히틀러
책임자
알베르트 슈페어
건설 기간
1938년 ~ 1943년
진행 상태
계획 중단 및 무산

1. 개요
2. 특징
3. 문제점과 계획 중단
4.1. 현존 건축물
5. 브루탈리즘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파일:Volkshalle_germania.jpg
높은 성의 사나이 드라마판에 묘사된 게르마니아
베를린 시내를 완전히 재건축해 유럽을 지배하는 새로운 대게르만국의 수도로서의 위용을 갖추겠다는 아돌프 히틀러의 계획. 세계수도 게르마니아(Welthauptstadt Germania)[1]라는 프로젝트명을 가지고 있었고 총괄 책임자는 히틀러가 총애하던 건축가였던 알베르트 슈페어였다.


2. 특징[편집]


시작은 1938년 베를린의 재건축 계획이었다. 이후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한 히틀러는 1945년까지 자신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2] 세계수도 건설을 마친 후 베를린에서 1950년 세계 박람회를 개최하리라는 아주 야심찬 포부에 의해 게르마니아 계획으로 확장되었다. 초반에는 '독일국 수도 종합건설계획(Gesamtbauplan für die Reichshauptstadt)'이었지만 베를린을 점점 런던, 파리, 로마 등 세계적인 수도를 뛰어넘은 거대 도시로 만들고 싶었던 야망이 점점 커져서, 계획이 시작된 이듬해인 1942년에 히틀러가 베를린을 새로운 건물들로 완전히 싹 갈아엎고 게르마니아(Germania)라는 이름으로 바꿔 대게르만국의 명확한 중심으로 자리잡게 할 것이라는 대안을 언급해 도시 계획이 더욱 확장되었다.

게르마니아는 8호 전차 마우스P.1000 라테처럼 거대하게 짓는 것을 선호했던 히틀러의 취향이 짙게 반영된 도시가 될 예정이었다. 히틀러는 파리의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나 로마판테온 등을 의식하였다. 지어질 건물들 하나하나가 전체적으로 수직적이고 균형적이었으며, '국민대회당'이나 '나치전당대회장'처럼 규모가 압도적으로 거대한 건물들도 세워질 예정이었다. 게르마니아 계획에 필요한 자재나 노동력 충원은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인력을 활용하기로 계획되었고, 실제로 일부 수용소에서는 이러한 건축물을 지을 때 쓰일 벽돌이 생산되고 있었다.


3. 문제점과 계획 중단[편집]


그러나 게르마니아 계획은 시작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거대한 건축물을 지탱하기에는 베를린의 지반이 너무 물렀기 때문이다. 애초에 늪지대였기에 지반이 약하기도 하고[3], 게르마니아 계획대로라면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국민대회당은 베를린의 슈프레 강 위나 근방에 지어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기초 공사가 필요했을 것이다. 슈페어도 이 부분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우선 파리 개선문의 몇 배나 되는 게르마니아 개선문을 짓기 전에 '슈베르벨라스퉁스쾨르퍼(Schwerbelastungskörper; 고중량 지탱체)'라고 불리우는 침하 시험용 건물을 지었으나 결론은 토질이 너무 무르다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어떻게든 지으라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슈페어는 지반을 강화할 방법을 연구했으나, 결국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여 계획은 영구히 무산되었다.

현대의 토목 기술을 고려했을 때 만약 나치가 전쟁에서 이겼다면 어떻게든 지반을 적절한 수준으로 강화할 수는 있었겠지만, 결코 쉽진 않았을 것이며 이러한 대규모 지반 공사는 한두해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독일이 전쟁에서 이겨서 게르마니아를 완성했더라도 도시 전체가 통째로 가라앉는 대참사가 나거나, 게르마니아 지반공사하는 것만 보다가 히틀러가 먼저 늙어 죽었을 수도 있었다.[4]

사실 이 계획이 그나마 경제적으로 실현되려면 아예 게르마니아를 베를린보다 훨씬 지반이 단단한 곳에 신도시로 건설하는 게 답이었겠지만, 베를린의 상징성이 상징성인지라 그런 방안은 채택될 수 없었을 것이다.


4. 건축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세계수도 게르마니아/건축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1. 현존 건축물[편집]


1938년부터 1943년까지의 공사 기간 동안 완공된 건축물은 매우 적었다. 완공되었더라도 이후 파괴되었거나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게 된 건물도 부지기수이다. 게르마니아 계획 중 거의 유일하다시피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축물은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이다. 게르마니아 계획이 얼마나 크고[5] 아름다웠는지 그 일면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지에 비해 활주로가 너무 짧아서 운항하는데 한계가 있자 신공항으로 이전하고 폐항했다. 폐항 당시 나치의 잔재라는 의견과 해당 부지를 철거하고 재개발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굶어죽을 뻔한 베를린을 살린 공로가 인정되어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공원으로 사용되었고, 유럽 난민 사태 이후부터는 난민캠프로 사용중이다. 한편 템벨호프 공항 이외에는 게르마니아 계획의 일부로 계획되어 건설이 진행되던 지하차도와 지하철 터널의 일부가 베를린 지하에 방치되어 있다.


5. 브루탈리즘[편집]


이처럼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의 건축물들은 1970년대까지 유행한 브루탈리즘으로 불리며,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미국이나 1950년대 소련에서 많이 건설되었다. 소련의 브루탈리즘 건축물은 스탈린 양식으로 분류된다. 소련은 한 술 더 떠서 스탈린의 명령으로 소비에트 궁전이라는 거대한 건물을 구상하였다. 소비에트 궁전의 경우는 게르마니아처럼 설계만으로 끝난 게 아니라 실제로 공사에 착수했으나 전쟁 때문에 결과적으로 공사 중단되었다. 또한 당시 모스크바에 지어진 7자매로 불리는 거대 건축물들은 현재도 모스크바의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나치 독일의 2차 대전 패배로 게르마니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나치 독일이 승전한 여러 대체역사물에서 등장한다.


6.1. 다운폴[편집]


초반부에 모형으로만 등장한다.


6.2. 당신들의 조국[편집]


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 완성된 게르마니아의 모습이 글로서 표현되어 있는데 책 부록으로 게르마니아의 지도가 나와있다.

파일:external/i215.photobucket.com/Fatherland3.jpg

파일:external/i1245.photobucket.com/Volkshalle.png

또한 이 소설을 TV단막극으로 만든 당신들의 조국(Fatherland, 1994)에서도 게르마니아의 웅장한 모습이 등장한다. 다양한 인종들이 자유롭게 다니고 90년대 미국풍 느낌의 건물들과 외벽이 유리로 된 모습이 조화로운 것이 특징.


6.3.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편집]


고대부터 내려온 과학기술 연구 집단 다트 이슈드의 비밀을 손에 넣은 나치가 결국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래를 나타낸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는 1960년대 게르마니아의 건설이 완료된 베를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제 역사의 설계보다 더 미래적이며 시내에 고층빌딩이 즐비하다. 국민대회당은 존재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도시의 모습은 게르마니아의 실제 계획과는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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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아의 건설에도 나치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다트 이슈드의 기술이 사용되었다. 바로 위버 콘크리트(Über Concrete)라고 불리는 슈퍼 콘크리트. 이 콘크리트는 기존의 그것보다 더 견고하고 더 빠르게 건조되어 대형, 고층 건물 건설을 안전하고 신속하게 완료할 수 있게 해준다. 나치는 이 콘크리트를 이용해 유럽 각지에 자신들의 도시를 빠르게 완성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게임을 진행하다보면 이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에서 부식이 생긴다던지, 이상한 곰팡이가 생긴다던지, 콘크리트가 부스러지며 폐에 문제가 생긴다는 기묘한 증언과 증거가 속속 나타난다. 심지어 나치가 파리에 추진 중이던 초고층 빌딩 프로젝트에서 붕괴 사고가 일어나 건축가가 처형되는 일까지 생겼다고.

그 원인은 다름아닌 다트 이슈드의 일원, 세트 로스가 우버 콘크리트 생산 시설에 수감되어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가 생산 과정에 몰래 사보타주를 가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나치의 우버 콘크리트는 처음에는 멀쩡하지만 갈수록 서서히 부식되어 결국 파괴된다. 나치는 승전 이후 기세등등하게 각지에 우버 콘크리트로 대도시를 건설했는데, 언젠가 우버 콘크리트의 결함으로 도시 전체가 폭삭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우버 콘크리트의 결함은 자칭 위대한 게르만 문명의 형편없는 몰골을 상징한다. 우수하며 위대한 게르만 민족이 뛰어난 능력과 기술로 열등한 족속들을 정복하고 세계의 평화를 가져왔다고 선전하지만 실상은 다트 이슈드의 기술 보관소를 몇 개 찾아내 기술을 훔친 것에 불과한 것. 나치는 우버 콘크리트의 결함도 눈치채지 못하고 붕괴 사고가 벌어져도 콘크리트의 문제가 있다는건 알지 못한 채[6] 게르만 도시를 계속 만들어나가고 있다.

다만 나치도 콘크리트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보수를 지속했는지 아니면 결함을 발견하고 이를 개선했는지 그것도 아니면 유대인인 세트 로스가 거짓말을 했던지 도시가 전면 붕괴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6.4. 높은 성의 사나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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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드라마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도 자세하게 나온다. 특히 시즌 2에서의 비중이 커졌다. 건물의 재현 면에서 위의 두 사례보다 더 정밀하게 게르마니아를 구현했다. 참고. 다만 외부 전경과 도시 계획은 역시나 실제 계획과는 좀 다르다. 외부 풍경에서 보이는 작고 오래된 건물은 독일 국회의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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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벨트하웁트슈타트 게르마니아.[2] 물론 히틀러가 너무 기고만장한 나머지 지나치게 앞서간 것은 사실이며 이미 역사적 결과가 나와있는 그 이후 시점에서는 당연히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1941년 여름 당시의 히틀러는 충분히 1940년대 중반에 전쟁이 독일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볼만한 상황이었다. 이미 프랑스도 항복하고 유럽 대륙 전체를 장악해 이탈리아를 비롯한 동맹국, 중립국 외에는 전부 다 점령지였고 독일과 맞서볼만한 나라는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과 소련 밖에 없었으며 영국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 침공 후 난항을 겪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승장구하며 쭉쭉 밀고 들어갔기 때문에 당시 상황만 봐서는 누가 봐도 히틀러의 승리가 사실상 이미 결정 난 상황이었는데 패전 직전까지도 아직 지지 않았다는 망상에 빠진 히틀러가 이 때 승리를 예상하지 못한다는 게 더 이상하다.[3] 베를린은 과거 습지 지역이었다. 실제로 독일어 학자 대다수는 폴라브어로 "늪지"를 의미하는 어근 *berl- 혹은 *birl-에서 "베를린"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베를린은 2차대전 때 비슷하게 도시가 완파된 프랑크푸르트에 비해 눈에 띄게 마천루의 숫자가 적다.[4] 전쟁이 터지고 난 후 히틀러의 불규칙적인 생활습관과, 전쟁 이후의 격무, 각종 약물에 의존하는 상황, 게르마니아 건설 외에도 승전 후 전후처리도 해야 함을 고려해 보면 독일이 이겼어도 건강을 해친 히틀러가 그리 오래 살진 못했을 수도 있었다. 거기에 히틀러는 이 때에 이미 50대에 접어들었다. 이런 이유로 대다수 대체역사에선 히틀러는 오래 살아봐야 1960년대까지 사는 걸로 나온다.[5] 주기장이 실제로 포뮬러 E 서킷으로 사용되고 있다.[6] 파리에서의 사고도 콘크리트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으나 나치는 일언지하에 이를 묵살하고 모든 책임을 건축가에게 덮어씌워 처형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