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사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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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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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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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673
한성고구려국
검모잠 / 고연무 / 안승
실패
681
안동도호부에서의 보장왕#항복 이후의 모반
보장왕
무산
684
금마저에서의 보덕국의 반란
대문
실패
696~698
요동 일대의 반당전쟁
걸걸중상 / 걸사비우 / 대조영
발해
897~901
송악의 궁예 정권
궁예
후고구려
918
왕건의 역성혁명
왕건
고려
1217
최광수의 난
최광수
실패





말갈족 추장
乞四比羽 | 걸사비우

작위
허국공(許國公)
성씨
걸사(乞四)(?)

비우(比羽)
생몰연도
? ~ 698년
재위
말갈족 추장
696년 ~ 698년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3.1. 소설 대조영
3.2. 드라마 대조영


1. 개요[편집]


말갈의 추장.


2. 생애[편집]


696년 여름 5월에 조문홰의 잘못된 정치로 인해 거란인들이 영주에서 봉기하면서 대조영, 걸걸중상과 함께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요수를 건너 오루하에 성을 쌓고 머물러 견고하게 지켰는데, 당나라는 걸걸중상을 진국공에,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봉해서 사면하려고 했지만 걸사비우는 이를 거절했고 698년에 이해고의 추격을 받아 격파된 후에 참수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3.1. 소설 대조영[편집]


매일경제에 연재된 소설 대조영에서는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대조영의 군사와 싸우다가 생포되면서 대조영에게 굽히지 않아 당당한 태도를 보였고 대조영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대조영, 흑수돌과 함께 결의형제를 맺는다.


3.2. 드라마 대조영[편집]


파일:걸사비우.jpg

배우 최철호가 연기했다. 처음에는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 수하 말갈족 장수로 등장했으며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국때 대조영, 흑수돌과 결의형제를 맺었으며[1] 고구려 멸망 이후 대조영을 도우며 고구려 부흥 운동에 힘썼고 초린을 구하려고 백수성에 초린을 구하려다가 설인귀의 부하들(사부구)을 공격하던 도중 지쳐 포로가 되어 잠시 설인귀의 부하가 되었다가 이해고에게 공격당했던 대조영이 살아 있던 걸 알고 그렇게 되돌아가며[2]나중엔 그가 포로로 잡혀 가자 귀부산 수용소로 직접 들어가서 당나라 장수들이 몰래 수용된 다른 죄인들을 이용해 대조영을 없애려던 걸 수포로 해버리고 대조영을 포함해 다른 노예들을 전부 인간 사냥 하려던 이문의 당나라 군에 저항해 같이 싸우기도 했다.[3]

후반부에는 거란과 동맹때 성질이 급한 장수들을 조절하는 역할로 신홍이 대조영을 암살하려고 하거나 모함해서 죽이려는 사건이 벌어지자 대조영 휘하의 장수들이 영주성을 뒤집자는 이야기를 하자 말조심하라고 호통치는 모습을 보였다. 대조영 다음가는 서열답게 무장들중에서는 그나마 흑수돌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에게 딴지를 걸지 못한다. 거기다가 무력으로는 서로 진검으로 칼을 섞은적은 없지만, 대조영과 자웅을 겨룰만한 실력으로 추정된다.

막판 미모사의 부하 금란과 사랑을 했지만 당군과의 전투에서 금란이 부상을 입자 등에 업고 싸웠는데 결국 금란은 화살을 맞는 치명상을 입고 사망하여 이뤄지지 못한다.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아예 발해 건국 이후까지 살아 남아서 발해의 개국공신이 되는 등 이름만 걸사비우이지 행적이나 포지션이 사실상 친동생 대야발에 가깝다. 오히려 흑수돌이 이해고군에게 잡혀 처형당해 실제 걸사비우 포지션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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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적으로는 '비우', '비우 형'이라 불렸다.[2] 이 부분은 삼국지 연의의 관우가 조조의 항장이 되었다가 다시 유비에게 돌아간 행적을 작가가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3] 실제 기록에서 당의 포섭 시도를 보면 대조영보다는 걸걸중상과 더 가까운 위상과 연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