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점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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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2. 고종의 인아거청
3. 경과
4. 영향
5. 후일담
6. 거문도의 사정
7. 여담



1. 개요[편집]


북경(北京)주재 영국 서리흠차대신(署理欽差大臣)이 교섭통상사무아문(交涉通商事務衙門)의 독판(督辦)에게 조회(照會)하였는데, 조회 내용에, "대영국의 서리편의행사대신(署理便宜行事大臣)으로서 조선과 교섭하는 일을 맡은 1등 참찬(一等參贊) 오코나〔歐致〕는 대조선 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 대신(督辦大臣)에게 조회를 보냅니다. 본 대신은 지금 본국에서 온 자문(咨文)을 받았는데, ‘뜻밖의 일에 대응 방비하기 위하여 본국의 수사관(水師官)에게 대조선국 남쪽의 작은 섬인 영어(英語)로 해밀톤〔哈米𥫱〕이라고 하는 섬을 얼마동안 차지하고 대조선국 정부에 비밀리에 이러한 내용을 통지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위에서 제기한 사유를 서로 공문으로 알려야 하겠기에 통지하는 바이니 잘 알 것입니다."

고종 22년(1885년) 3월 10일, 고종실록 22권

거문도 점령 사건(Geomun Island incident / Port Hamilton incident)은 1885년, 영국러시아 제국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조선거문도를 점령한 사건이다.


2. 배경[편집]



2.1. 영국러시아 제국의 '그레이트 게임'[편집]


프랑스 제2제국미국이 각각 병인양요신미양요로 조선의 문을 두드렸던 것과 달리, 인도 제국 경영과 청나라에서의 상업적 이익에 더 관심이 많았던 영국조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1876년 조선이 개항하고 1882년 미국과 조선이 수교하자 뒤를 이어 영국이 1883년 구미 열강 중 2번째로 수교하여 어느 정도 관심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거문도 점령은 영국이 느닷없이 조선을 침탈하려는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강대국 러시아 제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면서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일어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국이 보기에 거문도 점령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크림 전쟁, 영일동맹과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거문도의 점령에는 조선의 의중은 반영되지는 않았다.

1853년 이래 1907년까지 무려 50년 동안 영국은 러시아 제국의 남하에 맞서 냉전에 버금가는, 전 지구적 규모의 대치 상태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발칸 반도로의 남하가 좌절된 러시아 제국(1878)은 중앙아시아동아시아에서의 남하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영국으로서는 묵과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2차례의 아프가니스탄 전쟁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방파제를 확보하려는 영국의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2.2. 고종의 인아거청[편집]


1884년 7월 7일, 러시아 제국과 조선이 직접 수교를 하고(조러 수호 조약), 동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청군이 진압하였다. 이에 청의 내정 간섭이 증가하자 조선 조정이 러시아와 힘을 합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의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어느 정도의 근거는 있었다. 당시 고종은 인아거청(), 즉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의 영향력을 줄이려 하였다.[1]

고종은 김용원(金鏞元)·권동수(權東壽) 등을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해 러시아 관리와 약정을 맺었다. 그 내용은 김옥균(金玉均)이 러시아 영토에 가면 압송해줄 것, 일본의 보상금 요구를 파기시켜줄 것, 조속히 조약을 비준하고 육로 통상을 체결할 것, 러시아 군함이 한국 연해를 보호해줄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보호 약속보다는 통상 조약 추인과 육로 통상, 안전에 관한 토론 용의 등에 대해서만 회답했다.

한편 해가 바뀌어 1885년, 갑신정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서상우(徐相雨)·묄렌도르프는 비밀리에 주일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와 만나 러시아 훈련 교관의 초빙과 영흥만 조차에 관해 협의했다. 묄렌도르프는 귀국하여 비밀 교섭의 경위를 고종에게 보고하여 윤허받았고 이에 정부간 정식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주일 러시아 공사관의 스페이에르가 입국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외아문독판 김윤식(金允植)은 청의 총판상무(總辦常務) 진수당(陳樹棠)과 일본 대리 공사 곤도 신스케(近藤眞鋤)에게 밀약 사실을 알리는 한편, 스페이에르에게 현재 미국 교관의 초빙 교섭을 진행하고 있기에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통고했다. 1885년 7월 묄렌도르프는 이런 행보가 들통나자 청의 압력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과 러시아의 연대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를 확인한 영국은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러시아의 행보는 영국에게 조선을 통해 극동 -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행보로 여겨졌다.[2] 깜짝 놀란 영국이 러시아 해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유사시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막기 위한 일종의 중간 보급 기지 및 해안포 진지로서, 자기들이 명명하기로는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 해밀턴 항), 바로 거문도를 골라 점령했다. 이 때가 1885년 음력 3월, 양력으로는 4월 27일, 조러 수호 조약 체결로부터 1년이 안 되는 시점이었다.


3. 경과[편집]


조선은 관련 당사국[3] 중에서 가장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이는 전신선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청에서 정보가 건너오느라 직통으로도 6일 차이가 있었다. 양력 4월 28일 조선으로 전문이 갔지만, 조선이 전문을 받아본 때는 주 조선 영국 대사관의 직원 스콧이 전달한 양력 5월 16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기준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파쇼다 사건 당시 프랑스군은 직접 본국의 의사를 물어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무려 그들과 대치 중인 영국군에게 부탁해서 개전 여부를 영국이 이집트에 가설한 해저 전신망으로 런던에 연락한 뒤 런던에서 파리에 해당 메시지를 전달하고 회신을 받아서 다시 프랑스군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본국의 명령을 받았다. 물론 프랑스 본국으로서는 횡단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4]

조선은 뒤늦게 항의를 했지만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거문도'라는 엄연한 명칭을 두고(혹은 의식조차 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붙인 해밀턴(Hamilton), 즉 합미돈(哈米𥫱)이라는 명칭을 들이밀었으니 조선으로서는 상황 판단이 더 늦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제일 먼저 소식을 접한 것은 청나라였다. 영국은 청나라의 도움을 받으려고 청의 조선 종주권을 지지한다는 유화적 제스쳐에 나섰으나, 청의 이홍장 역시 조선에게 '한번 조차시켜 주면 끝이 없다.'며 영국의 조차를 막으려 나섰다.

귀국의 제주도 동북쪽으로 100여 리 떨어진 곳에 거마도(巨磨島)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문도입니다. 바다 가운데 외로이 솟아 있으며 서양 이름으로는 해밀톤(哈米敦)섬이라고 부릅니다.[5]

요즘 영국러시아아프가니스탄(阿富汗) 경계 문제를 가지고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군함을 블라디보스토크(海蔘葳)에 집결시키므로 영국인들은 그들이 남하하여 홍콩을 침략할까 봐 거마도에 군사와 군함을 주둔시키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이 섬은 조선의 영토에 속한 것으로서 영국 사신이 귀국과 토의하여 수군(水軍)을 주둔시킬 장소로 빌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빌려서 군함을 정박하였다가 예정된 날짜에 나간다면 혹시 참작해서 융통해줄 수도 있겠지만 만일 오랫동안 빌리고 돌아가지 않으면서 사거나 조차지(租借地)로 만들려고 한다면 단연코 경솔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구라파(歐羅巴) 사람들이 남양(南洋)을 잠식할 때에도 처음에는 다 비싼 값으로 땅을 빌렸다가 뒤에 그만 빼앗아서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거마도는 듣건대 황폐한 섬이라 하니, 귀국에서 혹시 그다지 아깝지 않은 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홍콩 지구 같은 것도 영국인들이 차지하기 전에는 남방 종족 몇 집이 거기에 초가집을 짓고 산 데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점차 경영하여 중요한 진영(鎭營)이 되었고 남양의 관문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섬은 동해의 요충지로서 중국 위해(威海)의 지부(之罘),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귀국의 부산(釜山)과 다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영국인들이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어찌 그들의 생각이 따로 있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

이토 히로부미는 이전에 나와의 담화에서 영국이 만약 오랫동안 거마도를 차지한다면 일본에 더욱 불리하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귀국이 영국에 빌려준다면 반드시 일본인들의 추궁을 받을 것이며, 러시아도 곧 징벌하기 위한 군사를 출동시키지는 않더라도 역시 부근의 다른 섬을 꼭 차지하려고 할 것이니 귀국이 무슨 말로 반대하겠습니까? 이것은 도적을 안내하여 문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이웃 나라에 대하여 다시 죄를 짓게 되며 더욱이 큰 실책으로 됩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 정세로 보아서도 큰 관계가 있으니, 바라건대, 전하는 일정한 주견을 견지하여 그들의 많은 선물과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말기 바랍니다. 이제 정 제독(丁提督)에게 군함을 주어서 이 섬에 보내어 정형(情形)을 조사하게 하는 동시에 귀 정부와 함께 진지하게 토의하게 하니, 잘 생각해서 처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편 흥양(興陽)에 파견되어 갔던 엄세영(嚴世永)과 묄렌도르프(목인덕穆麟德) 역시 영국의 수군 제독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나라 대군주(大君主)께서는 아세아(亞細亞) 동부 해상에 주둔하고 있는 귀국의 병선이 우연히 우리 나라 거문도(巨文島)에 이르렀다는 소식과 아울러 귀 제독이 해도(해당 섬, 該島)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대군주께서는 중국의 제독 군문(軍門) 정여창(丁汝昌)이 2척의 군함을 가지고 바다를 순찰하다가 마산포(馬山浦)에 이르렀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나라 대군주께서는 군문 정여창에게 우리 나라에 특파한 관원들을 데리고 섬에 가서 정형(情形)을 조사하여 보라고 특별히 청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해도에 당도하여 즉시 귀국의 병함(兵艦) 6척과 상선 2척이 해도 안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동시에 해도의 높은 산꼭대기에 귀국의 깃발이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본관들이 곧 귀국의 비어선(飛魚船)에 가서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선주(船主)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귀 제독의 명령을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귀 제독이 현재 일본 장기도(長崎島)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관들은 다시 군문 정여창과 가부를 토의하고 장기도에 가기로 하였는데 다행히 임금의 윤허를 받아 이달 5일 아침에 장기도에 도착하였고, 본관들은 그 즉시로 귀 제독을 면회하였습니다. 면담한 여러 가지 건은 다 주상의 명령을 받은 것이므로 귀 제독의 대답을 청합니다. 이미 우의(友誼)를 맺은 나라인데 벗이 된 나라의 땅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명령에서 나왔으며,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본관들은 귀 제독이 즉시 처리하여 조약 관계가 있는 각 나라들로 하여금 해도가 본국의 땅이라는 것을 모두 알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살펴보고 회답해 주기 바랍니다.


5월 조선의 사신이 거문도에 도착했을 때, 영국 해군은 외교 교섭과는 별도로 거문도 기항(임차) 대가 연간 5천 파운드를 지급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조선 측으로부터 명분 상 조선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거문도 기항을 정식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이었지만, 조선은 일단 영토 점령(임차) 자체가 부당한 일이므로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은 이에 대해 조선의 항의에 동의하였으며, 독일은 영국의 자유당 정부와의 관계가 안 좋았지만 당시 영사였던 젬브쉬는 본국 훈령과 함께 개인적인 동정시선을 보냈다. 미국은 조선을 이해하는 동시에 러시아와의 예방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였다.

극동에서 영-러의 긴장이 고조되자 부담을 느낀 것은 청이었다. 청의 북양 대신 이홍장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을 내심 지지했지만, 청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 있는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영국의 편을 드는 것도 무리한 일이었다. 그래서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서서, 러시아의 남하는 없을 것이며 러시아와 조선의 밀약도 헛소문이라고 확인시켜줘서 영국을 안심시키려 했다. 영국은 조선 측이 보낸 속국 인정 전문을 받아들여, 청을 통해 러시아에게 조선을 점령하지 않을 것과 조선의 현상 유지를 요구했다.

한편 청은 러시아에게 영국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위장하며 두만강 하류, 즉 연해주 끄트머리의 영유권을 회복하려고 들었고,[6] 그 덤으로 자그만치 '청한 종속 관계'를 러시아에게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무시했다. 이렇게 청이 두 열강 사이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사이 거문도 점령은 1886년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은 그해 7월에 러시아에게 다시 보호를 요청했으며,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폐위하려는 건의까지 올린 상황이었다. 청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 조선이 속국이므로 외교권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회답하는 나라는 없었지만 거꾸로 이를 반대하는 나라도 없었다.

영국이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동북아의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서구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거문도로 군함을 파견했는데 이 때문에 거문도는 흡사 세계 각국의 군함 전시장처럼 변했다고 한다.

결국 1886년 12월에야 협상이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조선을 보호국화하지 않는데 동의했으나, 청과 영국 역시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확인했다.

2년의 점령 끝에, 영국은 러시아가 남하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어느 정도 얻고, 동시에 거문도가 생각보다 요새화하기 어려워서 이를 시행하려면 꽤나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랬기에 청의 중재를 담보로 합의 3개월, 점령 22개월만인 1887년 2월 5일 거문도를 말그대로 도로 뱉어내고 철수했다. 또한 점령 시작 때처럼, 조선 정부는 영국 해군의 철수 소식을 가장 늦게 접했다.


4. 영향[편집]


이 사건으로 조선이 세계 열강의 분쟁에 편입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에 조선에서는 열강의 대립으로 인한 불똥을 피하기 위해 영세 중립국론이 1885년 조선 주재 독일부 영사 부들러(H. Budler)에 의한 것과 개화파 계열의 소장 관료인 유길준에 의한 것의 두 가지가 서로 관계없이 구상되었으나 주변 열강들의 이해 관계 때문에 호응은 받지 못했다.[7] 또한 이 사건으로 러시아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반발하여 제주도를 점령하려고 하였으며, 이 때문에 제주성 위협사건이 일어났다.


5. 후일담[편집]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점차 일본을 압도해갔으나,[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진다.

한편 영국은 거문도가 별로 쓸모없다고 판단해 물러나기는 했지만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 여전히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한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며, 이는 러시아에 부담이 되었다. 한편 러시아는 거문도 점령으로 말미암아 태평양 함대가 대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목이 차단되어 극동에서 러시아 해군의 움직임이 제한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육군을 극동에 보내 세력을 확장하기로 마음 먹었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공을 위해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확보한 랴오둥 반도를 토해내도록 한 뒤, 1896년 만주에서 동청 철도 부설권을 따냈다. 1897년 을미사변이 일어났으나 아관파천으로 러시아는 고종의 영향력을 활용, 절영도 조차 시도도 있었다.

러시아 제국은 또한 1900년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 뒤 만주에서 철수하지 않고 점령을 지속하여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고 더 나아가 대한제국의 용암포를 점령, 조차, 개항함으로써 한국 역시 영향권 하의 완충국이나 보호국으로 만들 의향을 보였다(1903년의 용암포 사건).[9]

러시아의 이런 움직임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와 팽창을 경계하던 영국과, 신흥국으로 부상한 일본에게 커다란 부담거리가 되었고, 두 국가는 서로 간 이해관계가 들어맞아 1902년 동맹을 맺기에 이른다(영일동맹). 그리고 2년 뒤인 1904년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의 극동에서의 남하는 완전히 좌절되었으며, 러시아는 현실을 인정하여 영국, 미국과 협상을 맺고 '그레이트 게임'을 끝내게 된다.


6. 거문도의 사정[편집]


파일:8677_1.jpg
영국 군인들이 거문도 주민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런저런 복잡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사실 거문도 사람들은 오히려 영국 해군을 환영했다. 일단 영국 해군은 이전에도 여러 번 조선에 상륙하여 서로 대접을 해 주고 간 적이 있어서, 거문도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국 해군은 아예 낯선 상대가 아니었다. 또한 영국 해군은 진지 보수나 포대 설치 작업 시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거문도 주민들을 '고용'하여 작업에 동원했다. 그것도 조선인들에게 쓸모가 없는 파운드 스털링 대신 곡식, 염장고기, 통조림이나 술 등의 보다 실용적인 물건으로 보상했으며, 식량 배급과 군의관의 의료 혜택까지 무료로 베풀었다. 나중에는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화폐를 따로 조달하기까지 했다. 이러니 거문도 주민들도 영국 해군을 물심양면 도와줬다고 한다.

몇몇 커뮤니티에서는 조선의 탐관오리에게 세금을 뜯기던 거문도 주민들이 영국군을 만나 오히려 좋아했다는 내용이 돌기도 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내용이다. 애초에 거문도는 너무 외딴 곳이라 조선에서 세금도 거두지 않고, 관리를 파견하는 대신 촌주가 자치적으로 운영하도록 두던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영국군이 점령했을 때 조선이 가장 늦게 알아차린 것도 관리가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관리를 파견하고 거문도를 적극적으로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물러난 후 거문도를 거문도진이라는 일종의 군사기지로 만들면서다. 그리고 이 때도 주민들은 관리 파견을 환영했고 주변 지역에서도 자기들을 거문도진에 편입시켜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자치로 굴러갈 때도 지역 유지들에게 빼앗겼으니 그럴 바에야 나라에서 관리하는 게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쨌든, 영국 해군은 정부에서 보기에는 침략군으로 들어왔지만 거문도 주민들과는 마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대민 물의를 최소화하려는 지휘관의 명령으로 주민들 거주 구역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특히 여자들과의 충돌이 있을까 봐 빨래터 근처를 지날 때는 각별히 주의를 가해 여자들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물가에서 물 한 모금을 떠마실 때에도 반드시 동전 한 닢을 두고 갔다는 회고도 있다. 자세한 기사는 여기에.

야사에 따르면, 거문도에 살던 젊은 여자 무당에게 반한 한 영국 수병이 몰래 수영을 해서 만나다가 바다에 빠지거나 중간에 쓰러져 죽었다는 이야가기 전해진다. 물론 실제로 그런 사건은 없었다는 것이 연구 결과이나 이런 야사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영국군과 거문도의 백성들이 친밀했다는 이야기의 반영이라는 평가가 많다. 10여 년 전 방영했던 거문도 점령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는 거문도 주민이 전혀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줬는데, 당시 영국 수병이 무당 혹은 과부를 밤에 몰래 몇 번 찾아갔다가 발각되었고 조선의 남녀 유별 전통을 잘 아는 지휘관이 장병들과 거문도 주민이 보는 앞에서 강도 높은 처벌을 했다. 수병을 뱃머리에 세워두고 걷어차서 수병을 바다에 빠뜨리면 수병이 헤엄쳐서 배에 오르고 배에 오르면 다시 뱃머리에 세운 뒤 걷어차서 바다에 빠뜨리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해서 거의 반죽음 상태에 이르러서야 처벌을 그쳤다고 한다. 아마 이 에피소드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강도 높은 처벌이 본보기가 되어 특별히 알려진 대민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또 다른 일화가 나왔다. 당시 영국군이 장병들의 식량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소를 상당수 구입해서 거문도 산간에 방목했는데, 특별히 지키는 사람을 두지 않았다. 이를 보고 동네에 살던 점잖아 보이는 노인 한 명이 매일 한 마리씩 훔쳐갔다고 한다. 영국군은 소가 한 마리씩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자 몰래 숨어서 훔쳐가는 사람의 사진을 찍은 뒤, 소가 사라진 다음날 노인을 붙잡고 훔쳐간 소를 돌려달라고 했다. 노인은 딱 잡아떼었지만 영국군이 노인이 소를 몰고가는 사진을 증거로 내밀자 결국 훔쳐갔음을 시인하고 소를 돌려줬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거문도 사람들은 사진이란 것을 몰랐는데 실물과 똑같은 모습이 종이 안에 있음을 보고 다들 놀라며 신기하게 여겼다 한다. 그러나 이 일화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19세기까지 정확한 사진촬영을 위해서는 피사체가 고정 된 상태로 10여초 정도 있어야 했다. 그나마 이것도 코닥사의 최신 필름을 썼을 때의 이야기다. 소를 훔치는 사람의 움직임을 사진으로 담을 정도가 되려면 근거리에서 그 사람에게 일정한 동작별로 정지 자세를 요구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10]

한번은 빅토리아 여왕[11]의 생일날에 축포를 쏘기로 했는데, 영국군은 사전에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함포 소리에 놀라지 말라고 미리 당부를 해뒀다. 주민들은 대포 터지는 것을 구경하러 나갔는데 문제는 이때 개들이 포 소리에 놀라 다 산으로 도망갔고, 영국 해군에서는 외교 문제를 고려하여 영국 해병대원들을 풀어 개 수색에 나섰다.[12] 그 밖에도 조선에서 최초로 테니스를 했다고 알려졌고,[13] 통조림을 먹었다거나 하는 일화도 있다.[14]

영국군이 이렇게 거문도 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살았던 것은, 영국군이 특별히 선한 이들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쪽이 영국 입장에서도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식민지가 펼쳐져 있는 영국의 입장에서는, 태평양 건너는 데 한 달이 걸리는 시대에 지구 반바퀴를 돌아 본국에서 물자를 보급하는 것보다, 점령지에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여 물자를 구하는 것이 민심을 얻으면서 작전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거문도 사건의 경우에도, 영국군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조선의 침탈이 아니라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는 것이었기에 굳이 현지인과 충돌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이전보다 양적 규모를 줄이는 대신 질을 높이고자 했고, 여기엔 수병들의 봉급 향상과 같은 복지 개편 및 해군 예비역 제도 도입을 통한 수병들의 질적 수준 향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제로 시민들을 납치해서 수병으로 징발하는 프레스 갱도 사실상 사라지고 해군 본부의 인사 부처에서 체계적으로 모병하여 충분한 훈련 후 배치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수병들의 군기 및 사기는 이전보다 더욱 향상되었고 따라서 민간인과의 관계도 큰 말썽 없이 이뤄질 수 있던 것.

오히려 영국 해군을 경계하기 위해 들어왔던 다른 나라의 군대들이 대체로 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 해군은 군기가 문란하고 기강이 무너져 있어 행패를 자주 부렸으며 군사들이 죄다 술에 쩔어 사는 알코올 중독자다 보니 현지 주민과 마찰이 특히 심각했고, 프랑스 해군은 가는 곳마다 측량을 하겠답시고 지붕 위로 뛰어다녀서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그나마 네덜란드 해군은 곱게 테를 두른 모자가 인상적이었으며, 가는 곳마다 깃발을 많이 휘날렸다는 것 정도만 회고했다. 당시 네덜란드 해군의 복장에 대해서는 이 링크 참조.[15]

거문도에 영국군이 있을때, 젊고 똑똑한 청년 10명을 골라서 일본으로 보냈서 근대 학문교육을 하였다고 한다. 이중 한명은 서양법학을 공부하고, 서울로 귀국후 양반 사랑방에서 살다가 전주에 관료로 파견보내지었다. 동학혁명 후에 상당한 재산을 갖고 거문도에서 육지로 나오는 가까운곳인 전남 장흥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들 10명이 근대사에 끼친 영향이 궁금하다.

1960년대에 정부에서 그때까지 살아있던 거문도의 90대, 100대 노인들[16]에게서 영국군의 지배가 어땠는지를 묻는 설문 조사가 있었다. 노인들은 영국 해군들에게 배운 영어와 요들송을 그때까지 기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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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에 머물 당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수병들의 묘가 아직 2기 있고, 1900년대에 이 근방을 항해하던 영국 전함에서 사망한 수병 한 명의 묘도 있다. 영국과 영연방에 속하는 국가(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경우 해외 출정이나 주둔 중 전사한 군인은 그 땅에 묻는 전통이 있는 반면[17]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고국에 묻힘을 당연히 여겨 왔기 때문에, 당시 주민들이 '시신을 고향 땅에 묻어야지, 왜 그냥 두고 가냐.'고 일종의 문화충격을 경험했다고 전한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한 당시 거문도를 방문하여 묘소를 참배하고 가려고 했지만 일정이 바뀌어 오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종종 주한 영국 대사가 와서 참배하곤 한다.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불법 점령군을 추모하는 웃긴 상황이지만, 2년간의 단기간 점거, 영국군의 신사적인 행동과 현지 주민과의 우호적 공존, 사건 자체에 대한 낮은 인식 등으로 한국에서도 이 사건이 별로 주목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는 딱히 없다.

거문도에 남은 묘의 비명들은 다음과 같다. 화강암 비석이 거문도 사건 당시 사망한 영국 수병의 묘이며, 흰 나무 십자가는 그로부터 시간이 약간 흐른 1903년 세워진 묘이다.

거문도 사건 당시 사망한 영국 병사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1886년 3월 알바트로스(Albatross) 함의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 사고로 죽다.

윌리엄 J. 머레이(William J. Murray)와 17세 소년 찰스 데일(Charles Dale).


십자가에 새겨진 문구는 다음과 같다.

1903년 10월 3일 알비온 함 승무원 알렉스 우드(Alex Wood) 잠들다.


게다가 2년의 짧은 점령기간이었지만, 영국 해군은 해저 케이블까지 설치하여 상하이를 통해 본국과의 연락을 주고 받았다. 조선 정부가 이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정부는 청나라 조정을 통해 빙빙 돌아 영국으로 거문도 점령 사건에 대한 항의 서한을 보낸다. 영국군이 설치한 케이블은 현재 고도 해안가에 그 일부가 남아있다. #

또한 영국 해군 동양함대는 1930년대까지 비정기적으로 거문도에 기항했으며, 2005년부터 주한영국대사관 명의로 거문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관련 기사

홍콩처럼 조차지로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홍콩과는 달리 거문도는 면적도 너무 작고 정주여건이 열악한 편이라 결국 거문도가 별로 쓸모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물러났다. 사실 영국령이 쭉 유지되었다고 해도 2차 세계대전 이후 대영제국이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반환했거나 섬 자체의 여건상 영국령 해외 속령처럼 크게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7. 여담[편집]


잠시나마 조선 정부의 지배에서 벗어났던 시기였기 때문인지 영연방을 이르는 커먼웰스에 빗대 '거문웰스' 라고 우스갯소리로 일컫기도 한다.
[1] 미국, 영국과 조선의 수교는 청의 알선(조선책략)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싶은 청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청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지자 조선이 다른 국가와 연대하려 하니 당연히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2] 정작 러시아는 일관되게 조선의 요구에 시큰둥했고, 조선 방면 부동항보다는 만주의 패권에 더 관심이 있었다. 부동항이야 만주를 장악하면 뤼순을 얻어서 해결할 수도 있고. 물론 떡을 준다는 데 싫다는 측이야 없으니 받아들인 거지만.[3] 러시아, 청, 일본, 조선[4] 다만 영국 입장에서도 현지 프랑스군이 상부의 생각과 달리 엉뚱한 짓을 해서 일이 커지면 좋을게 없기 때문에 불확실성 제거를 위해 대치 중이라도 돕는게 나았다.[5] 합미돈(哈米𥫱)이 아니라 합미돈(哈米敦)라고 썼다.[6] 이때 훈춘에 8만 대군으로 무력 시위를 했으나 러시아는 씹었다.[7] 독일 영사 부들러의 중립화론은 유길준보다 1년 전인 1884년 갑신정변 직후 제시되었다.[8] 경제 면에서는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먼저 진출한 일본이 우위에 있었으나 청나라가 임오군란을 계기로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바탕으로 쫓아오고 있던 상황이었다.[9] 이는 고종황제 역시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 영, 일의 반대로 조차를 개항으로 변경했다.[10] 신기한 정도를 넘어 당시에는 너무 비슷한 그림 때문에 혼이 빠져나간다느니, 현상액이 사람 죽여서 만들었다느니 하는 괴담이 있었다. 단발령 때문에 겨우 사진이 대중화되었고, 그 전까지는 기피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실 다른 비문명 민족들도 사진을 비슷하게 받아들였고, 아메리카나 유럽에서도 시골지역 사람들이 사진을 보면서 두려워했다는 반응을 보였다거나 일본의 메이지 덴노(단, 이쪽은 천연두 자국 때문에 그런 영향이 컸다)나 오스만 제국의 압뒬 메지트 1세도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다는 일화가 있는 것도 보면, 딱히 조선인만 유별난 반응을 보인건 아니다.[11] 주민들의 진술은 "자기네 여자 임금".[12] 거문도 주민들도 영국 함포가 "댕구(대완구) 소리"라며 조선 화포와 달랐다고 진술했는데, 이를 감안하면 거문도 주민들도 조선의 화포 소리는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과 별 연이 없었을 섬의 개들은 당연히 크게 놀랐을 것이다.[13] 1885년에 설립되었다고도 한다. 당시 테니스장이 건설된 위치로 추정되는 고도의 거문초등학교 인근에 해밀턴 테니스장이 건설되었다.[14] 물론 조선 최초의 통조림 시식자는 신미양요 때나 그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15] 네덜란드는 이미 예전부터 일본 막부와 정규 거래를 해온 만큼 아시아인들을 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서 가능한 현상이다. 당장 그 유명한 박연하멜 표류기의 주인공 하멜만 해도 일본으로 가려다가 좌초해서 제주도로 표류한 케이스였다.[16] 1870년대에서 1850년대까지.[17] 영국은 워낙 식민지가 많다보니 자신들의 점령지 또한 엄연히 영국 본토와 같은 여왕의 영토 취급이었고, 이 때문에 현지에서 매장하는 것도 본국에 매장하는 것과 같은 취급이었다. 함상에서 전사 혹은 사망할 경우 수장했으며, 시신을 본토까지 가져온 호레이쇼 넬슨 제독 같은 경우도 있지만 이 쪽이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다. 또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영연방 국가 군인들의 유해도 대부분 부산의 재한유엔기념공원에 묻힌 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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