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네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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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네빌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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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클럽
파일:발렌시아 CF 로고.svg

75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주장

로이 킨
(1997~2005)

게리 네빌
(2005~2010)


네마냐 비디치
(2010~2014)


게리 네빌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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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PFA_UK_logo.png

1995-96 · 1996-97 · 1997-98 · 1998-99 · 2004-05 · 2006-07
파일:European_Sports_Media_logo.png






게리 네빌의 기타 정보




스카이 스포츠
Sky Sports

파일:external/www.footballparadise.org/Gary-Neville-Pundit.jpg

이름
게리 네빌
Gary Neville
본명
게리 알렉산더 네빌
Gary Alexander Neville
출생
1975년 2월 18일 (49세)
잉글랜드 그레이터맨체스터베리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
신체
180cm[1], 84kg
직업
축구 선수 (수비수[2] / 은퇴)
축구 감독
축구해설가
소속
선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1~1992 / 유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2~2011)
감독
발렌시아 CF (2015~2016)
코치
잉글랜드 대표팀 (2012~2016)
기타
솔퍼드 시티 FC (2014~ / 구단주)[3]
Sky Sports (축구해설가)
국가대표
85경기 (잉글랜드 / 1995~2007)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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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동생 필 네빌
조카 하비 네빌[1]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은퇴 후 행보
5.1. 해설자
5.2. 비판 및 문제점
5.3. 감독 경력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통산 기록
7. 여담
7.1. 가족
7.2. 형제 축구선수 필 네빌



1. 개요[편집]


"유니폼을 입으면 가슴이 절로 펴지는 클럽, 맨유가 제겐 바로 그런 클럽입니다."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이자 現 스카이스포츠 축구해설가. 맨유 황금 유스라고 불리우는 'Class of 92' 출신이다.[4]

잉글랜드 국가대표팀과 맨유에서 오랜 시간 선수생활을 이어왔으며, PFA 올해의 팀에 6차례나 선정되는 등 그의 꾸준함과 기량을 널리 인정받았다.


2. 클럽 경력[편집]


맨유 소속으로 20년 동안 리그 400경기에 출장하였다. 모든 경기 합치면 602경기 출전. 선수 시절 주요 등번호는 2번.

94-95시즌 리그 18경기를 출장하며 입지를 늘리면서 95-96시즌부터는 붙박이 주전으로 자리 잡는다. 특히 98-99시즌은 총 50여경기에 출전하고 캄프 누의 주인공중 하나이다. 이후에도 03-04시즌까지 매 시즌 40여 경기 이상 출장했다. 득점은 포지션 때문에 적었으나 좋은 오버래핑과 정교한 크로스로 어시스트가 많았다.

특히 데이비드 베컴과 호흡이 매우 좋았고, 팀에 좋은 결과를 가지고 왔으며 팀은 전성기를 달렸다.

2005-06 시즌 중간, 로이 킨의 뒤를 이어 팀의 주장이 되었다. 당시에 킨 다음 부주장은 라이언 긱스였지만 퍼거슨은 네빌의 팀에 대한 충성심과 경력을 보고 그에게 주장직을 부여하였다.[5]

기복없이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활약을 해 주었고 특히 수비 능력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탈압박 외에도 끈기있는 수비로 많은 호평을 들었고 맨유의 오른쪽 풀백은 걱정 무였다. 이후 04-05시즌부터 06-07시즌까지도 시즌 30여경기에 출장해 매우 단단한 수비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때까지 그의 나이 32이었다.

하지만, 2007년 볼튼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게리 스피드의 태클에 당해 안타까운 장기 부상을 겪으며 시즌 아웃되었다. 이 때부터 부상과 노쇠화가 결합되어 점차 기량이 줄어들었고 2007-08 시즌에는 웨스 브라운에게 주전 라이트백을 내주었고 당해 시즌 통틀어 챔피언스 리그 1경기에만 출전하며 팀 전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2008-09 시즌부터는 존 오셔, 하파엘 다 실바에게 주전 라이트백을 빼앗겼다. 노쇠화와 잦은 부상으로 인해 장기 부상 이후의 시즌은 스피드가 빠르고 민첩한 윙어들을 만나면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져버렸다. 08-09시즌과 09-10시즌은 출장 수도 리그만 따져도 20경기도 채 나오지 못했다.

이후 2010-11 시즌 초반, 네빌이 완전히 후보로 전락하면서 꾸준히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가 주장에 더 어울리다는 판단을 한 퍼거슨 감독은 네마냐 비디치에게 주장을 넘겨주게 된다.

그러면서 2010-11 시즌부터는 경기에도 거의 못 나오면서 후보로 밀려난 네빌은 더 이상 팀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에[6] 퍼거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011년 1월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베컴, 스콜스, 긱스 등 퍼기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빠른 은퇴이다.

파일:57125c72.jpg
맨유 전설의 유스 출신 선수들인 Class of 92[* 긱스 왼쪽의 트로피를 들고 있는 사람이 이 선수들을 유스시절부터 키워낸 에릭 해리슨 코치다. 현지 시각으로 2019년 2월 13일, 사망하였다.]. 왼쪽부터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게리 네빌, 필립 네빌, 폴 스콜스, 테리 쿠크[7]
파일:attachment/데이비드 베컴/Example.jpg
2011년 게리 네빌의 은퇴 경기에 이들은 다시 모여 그때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찍었다.

시즌 종료 이후 퍼거슨의 아이들과 함께 90년대 후반 맨유의 유럽축구 맞수였던 유벤투스와 은퇴 경기를 가졌으며 현역에서 아름답게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대표팀에 총 85경기 출전하였다. A매치 데뷔전은 1995년 일본과의 친선경기였고 그의 첫 메이저 대회는 유로 1996이였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개최국이었음에도 4강에서 독일과의 승부차기 접전 끝에 탈락했다.

국가대표팀 운은 조금 없다. 특히 월드컵은 매우 불운할 정도.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16강전에서 패배 8강까지 올라온 2002 한일 월드컵 때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다시 뽑혔지만, 역시 조별 예선 도중 부상을 당했고 그 자리를 제이미 캐러거 또는 오언 하그리브스가 메꿨다. 다행히 8강 포르투갈 전에서 선발 출전하지만 잉글랜드는 8강에서 탈락하게 된다. 월드컵 이후에는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의 세대 교체로 인해 글렌 존슨에게 점차 출전을 밀리고 있었다. 이 시절, 세대교체의 가장 큰 목적은 베컴 위주의 뻥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베컴을 제대로 대체할 수 없었고, 결국 베컴은 다시 국대에 돌아왔다. 그러나 결국 유로 2008 지역 예선에서 떨어지는 굴욕을 당했다.

게다가 유로 2008 지역 예선 도중에 자책골을 넣기도 했다. 이것이 게리가 국가 대표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집어넣은 골. 다만 이건 게리에게 매우 억울한 상황이었는데, 안전하게 볼을 돌리기 위해 골키퍼 폴 로빈슨에게 백패스를 했다. 로빈슨이 이를 강한 킥으로 차려고 하는데, 잔디가 갑자기 뽑히면서 공이 굴절돼 로빈슨의 발에 공이 맞지 않았다. 그대로 공은 굴러가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2007년 3월 장기 부상으로 1년간 전력에서 이탈한 이후 급격한 노쇠화가 진행되어 예전만한 실력이 나오지 않자 네빌은 삼사자 군단으로 두번 다시 복귀하지 못하고 국가대표 경력이 끝나게 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키가 손바닥 하나만큼만 더 컸다면 그는 잉글랜드 최고의 사이드백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188cm였다던가? 우유 배달부가 누구였는지 알아봐야겠군."[8]

[9]

알렉스 퍼거슨


망한 감독 커리어와 해설가, 분석가로 잦은 구설수에 오른 것으로 저평가 당하는 부분이 있지만 선수 시절 실력으로는 EPL 최고 수준이라 부를만한 선수였다. 현역 시절 FM에서 설명하는 그대로 공수 밸런스가 매우 뛰어난 풀백으로 유명했다. 오버래핑 후 정확도 높은 얼리 크로스가 매우 뛰어난 편. 여기에 수비도 상당히 안정적이고 리더십도 있고 파이팅도 넘친다. 더군다나 이같은 클래스를 긴 세월동안 일관되게 이어간 점에서 고평가 받을 수 있다. 네빌의 절친(?)인 제이미 캐러거가 풀백에서 뛰는 선수들은 실패한 센터백이거나 실패한 윙어라고 했는데[10] 이는 (풀백이 인기 없는 포지션이라는 점과) 공격력과 수비력을 동시에 갖춘 풀백 선수가 드물다는 점을 꽤나 시니컬하게 표현한 것이지만, 네빌은 공수 양면에서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준 선수였다. 때문에 측면 미드필더 및 윙어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파트너 라이트백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파일:external/resources2.news.com.au/445074-david-beckham-gary-neville.jpg
실제로 네빌과 함께 맨유 황금 세대의 일원이던 데이비드 베컴과의 호흡은 클럽에서도 국대에서도 정말 환상적이었다. 게다가 둘 모두 뛰어난 크로스 능력을 갖췄기에 오른쪽 측면은 맨유의 주공격 루트였다. 베컴과는 경기장 내에서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둘은 매우 절친이다. 1975년생 동갑내기에다가 맨유 유스 시절부터 서로 붙어다녔으며, 베컴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내와 네빌 단 둘만 방에 있더라도 나는 네빌을 믿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라고 하니 친구로서 서로를 얼마나 신뢰하는지는 안 봐도 뻔할 정도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을 보아도 현재까지 게리 네빌만큼 꾸준히 좋은 활약을 보이는 라이트백을 찾기 어렵다. 후계자인 글렌 존슨은 네빌보다 전성기나 임팩트가 짧았고 남은 것은 나다니엘 클라인, 카일 워커, 키어런 트리피어 정도인데 클라인은 공격력이 아쉽고 2017-18 시즌 장기 부상으로 폼이 망가져 소속팀 리버풀에서도 아예 전력외 자원으로 분류되고있으며, 트리피어는 반대로 4백의 라이트백으로서 수비력이 매우 아쉽다.[11] 그나마 카일 워커가 토트넘 말기 시절부터 공수 양면으로 상당히 기량이 올라온 모습을 보이면서 네빌의 후계자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지만 현재 국가대표팀에서는 3백의 센터백으로 뛰고 있어서 네빌만큼 4백의 라이트백에서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진 못 하고 있다.


5. 은퇴 후 행보[편집]



5.1. 해설자[편집]


은퇴 후에는 방송계로 투신, 스카이스포츠에서 제이미 캐러거와 함께 축구 관련 방송에서 활약하고 있다. 선수 시절 리버풀을 상당히 싫어하기로 유명한 그였기에 리버풀 디스하고 캐러거와 싸우지 않나 우려가 있기도 했으나, 오히려 예상을 깨고 매우 중립을 잘 지키며 말도 잘 한다. 그런데 방송 활동 하면서 조상이 리버풀 출신이란게 밝혀졌다. 리버풀 저지 받고 썩은 표정이 그야말로 백미. 이 토크쇼에서 리버풀 유니폼에 게리 네빌의 이름이 마킹되어 있는 유니폼을 받고 던져버렸다. 다만 코멘테이팅을 할 때는 중립적이나 MNF에는 은연 중에 맨유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칼럼을 기고할 때는 아예 대놓고 맨유 사랑으로 가득 찬 글도 내놓는다. 하지만 맨유가 몇 년 동안 끊임없이 추락하자 선수단, 구단 시스템, 심지어 부회장 에드 우드워드까지 거론하며 뼈 있는 비판을 가했다. “선수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현재의 맨유가 챔피언스 리그나 리그 타이틀을 논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우드워드는 이 일을 7년이나 했고, 개인적으로는 이젠 (그의)기회는 다 날아간 것 같다.”등의 무게감 있는 비판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

모예스 경질 이후 맨유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긱스에 대한 지지 선언을 했다. 또 2012년부터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코치를 맡고 있다.

중계 도중 극적인 상황에서 흥분하는 경우가 있는데 속칭 게리 네빌의 오르가즘(...)으로 불린다.
11/12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 토레스 골11/12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극적인 상황에서 터진 드록바의 골 당시 중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아스톤 빌라와 QPR의 경기에 출전한 윤석영이 자기보다 낫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물론 네빌의 커리어를 감안하면 이는 립 서비스다.

2015년 5월 22일 영국 '스카이스포츠'를 통해 유럽에서 최고의 파워를 자랑하던 리버풀이 이대로 가다가는 평범한 지방 클럽이 될 위기에 봉착했다고 주장하며 최근 뒤숭숭한 분위기에 처한 리버풀에 일침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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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이 안필드 6연패를 당하자 네빌이 올린 트윗
파일:네빌 캐러거.jpg
네빌: 리버풀 얼마나 심각함?
캐러거: 니 발렌시아보다 더 심각함


5.2. 비판 및 문제점[편집]


축구해설가의 전형적인 단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선수에 대한 비판이야 그건 선수 출신이고, 실제로 몇몇은 나름 귀담아 들으니 넘어가지만 문제는 감독에 대한 비판들이다. 예를 들어서, 아스날이 과거 강팀들을 상대로 기존의 전술이 아닌 다른 전술로 변환해서 상대하는 시도를 진작에 했어야 하지 않느냐? 식으로 비판을 하는데 이는 하나의 특정한 철학으로 좋은 성과를 거둔 클럽이 (냉정히 보면 아스날은 상당히 성공한 클럽이다. 축구계뿐만 아니라 스포츠 전 역사를 통틀어도 돈이 풍족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꾸준한 클럽은 별로 없다.) 갑자기 플랜 B라는 전술을 도입하는게 쉬운 것은 전혀 아니다.

또한, 가끔 프리미어 리그 감독들의 전술을 비판할 때가 있는데 이러한 비판은 무리뉴로부터 나름의 조언이자 쓴소리를 듣게 되기도 하였다. "실제 경기 중에서 PAUSE 버튼은 없다", "스크린을 통해서 해당 선수를 내가 원하는 포지션에 움직이게 할 수도 없어."라는 식이다.

실제로 게리 네빌이 발렌시아에서 보여준 모습은 특정한 플랜 A를 세우는 것 자체가 힘들고, 본인이 구상하는 게 현실 축구에서 구현되기 힘들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나게 만들었다. 특히, 벵거를 향해서 "순진한 거야? 건방진 거야?"라는 발언은 아마도 본인 커리어 중에서 역대급 병크로 남을 발언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이런 X같은 소리를 듣고도 걍 넘어간 벵거는 정말 대단한 현자다.

다만, 후술되어있는 감독 경험 이후에는 많은 것을 느꼈는지 축구 감독들에 대한 코멘트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한다. 반대로 그런 이후로는 감독들(특히 본인의 동료였던 솔샤르)에 대해 너무 방어적이라는 비판도 듣고 있다.

5.3. 감독 경력[편집]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전형적인 사례. 선수로서 수비를 누구보다 잘 하던 사람이었으나, 정작 감독으로서는 조금만 축구를 볼 줄 알아도 도저히 내놓을 수 없는 미흡한 수비 전술을 선보여 팀을 하위권으로 내몰았다.

2015년 12월 2일, 누누 산투의 뒤를 이어 발렌시아 CF의 임시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 기간은 6개월로 알려졌다. 발렌시아의 피터 림 구단주와의 친분에 의해 선임된 데다[12], 잉글랜드 코치직을 맡고 있지만 감독 경험은 전무한지라 발렌시아 팬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게다가 잉글랜드 코치직 역시 자기가 능력이 좋아서 맡게 되었다기보다는 코치들이 전부 선수 시절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이라서 구색 맞추기 및 기강 잡기용으로 게리 네빌을 선임했다고 볼 수도 있다.[13] 폭망할 거라는 팬들의 예상대로, 2016년 1월 말 기준 리그 무승(5무 2패)을 하고 있다. 의외로 코파 델 레이에서는 16강, 8강을 뚫고 4강까지 진출시키긴 했지만 당연히 더 중요한 건 리그다. 발렌시아 팬으로 유명한 웹툰 만화가 칼카나마는 게리 네빌은 축구 철학마저 없는 것을 제외하면 로날드 쿠만과 똑같다평하며 한 화를 전부 할애해 미친 듯이 깠다.[14] 그러니까 그 쿠만도 축구 철학만큼은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로 최악의 혹평이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전임 감독인 누누 산투가 재평가받았다.

그나마 선전한 코파 델 레이에서 4강 상대로 바르셀로나를 만났고, 캄프 누에서 치뤄진 1차전에서 풀백을 4명 기용하여 중원을 완전히 갖다바친 결과 7-0(수아레스 4골, 메시 3골)라는 점수로 대패를 당했다. 물론 바르셀로나 경기 전까지 국왕컵에서 5경기 11골 1실점이라는 호성적을 거두고 있었으나, 그나마 선전하던 국왕컵 마저 이렇게 굴욕당하고 탈락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었으니..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라 홈 구장에서 경기를 한 번 더 해야 한다. 레코드 브레이커 게리 네빌 심지어 발렌시아의 팬 사이트 아문트에서는 게리 네빌의 현 상황에 대입하여 그 동안 'ㅋㅁ'이나 '그 사람'으로 불리던 로날드 쿠만의 이름이 게시글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됐다!

발렌시아의 전성기를 만들었던 레전드, 산티아고 카니사레스"아직까지 안 물러나고 있는게 놀랍다."며 비꼬아댔고, 다비드 알벨다"쿠만보다 더한 감독"이라는 평가를 내리며 디스를 시전하였다. 참고로 카니사레스와 알벨다는 쿠만이 부임하기 전까지 확실한 팀의 주전 멤버이자 레전드였는데 쿠만이 부임한 이후, 아무 이유도 없이 또다른 발렌시아의 레전드인 미겔 앙헬 앙굴로와 함께 방출 명단에 들어가 팀 전력에서 배제된 경력이 있다. 그것도 겨울 이적 시장이 오기도 전에. 이로 인해 팀의 주장이기도 했던 알벨다는 주장 완장을 루벤 바라하에게 넘겨준 것은[15] 물론이고 오랫동안 뛰어온 발렌시아를 떠날 뻔했고 카니사레스는 아예 시즌이 끝나고 은퇴했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 당연히 그들에게는 쿠만이 최악의 감독이나 마찬가지인데, 이 사람들마저 쿠만보다 더하다는 말을 할 정도면 진짜 막장이라는 얘기다. 한편, 한준희는 "그래도 아직까지 선수들이 열심히 뛰고는 있으며, 선수들과 불화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는 쿠만보다 나은 점도 있다"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쿠만처럼 불화가 없는데도 성적이 이 모양이면 전술 짜는 능력과 현장 지휘력에선 더 문제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16] 그리고 캐러거가 바르셀로나 훈련장을 방문하면서 손수 부관참시를 시전했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louis-gaal_3015179b.jpg

묘하게 루이 판할 맨유 감독과 함께한 짤이 흥하는 중이다. 예를 들면 판할: 감독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알아듣겠어?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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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라 리가에서는 다시 보기 힘들 듯하다.

발렌시아 홈에서 열린 코파 델 레이 2차전에서는 결승진출이 사실상 확정된 바르셀로나가 선발 멤버에 라키티치를 빼면 모두 벤치 멤버들을 투입했음에도 1:1로 비기는 위엄을 보였다. 심지어 바르셀로나에서 득점을 한 윌프리드 카프툼은 벤치 워머도 아니고 그냥 B팀 레귤러 선수다.. 게다가 점유율에서까지 밀렸다. 발렌시아의 급이 바르셀로나보다 아래긴 하지만 벤치멤버들보다 밑은 아니고 홈에서 무를 캔 점에서 이 경기가 더 치욕이다.

24라운드 에스파뇰전에서 드디어 리그 첫 승을 거뒀다!

그 이후 유로파 리그 라피드 빈 전에서 6:0 대승을 거두었고, 그 후 25R 그라나다 원정에서 1:2 승리를 거두며 3연승을 기록했다. 수석 코치를 바꾼 효과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전까지 네빌이 보여준 게 있다 보니 네빌 바지감독설도 나오는 중이다. 그러나 그 후 귀신 같이 아틀레틱 빌바오에게 리그와 유로파 2연패, 그리고 꼴찌 레반테에게 패배하며 레반테에게 강등권 탈출 희망을 선물하기도 하며 감동님의 모습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결국 가디언 지에서 이번 시즌을 끝으로 물러난다고 보도했다. 발렌시아에서의 감독 생활은 인생 최대의 흑역사로 남을 듯하다. 전임 감독인 누누의 평가가 극악에 달해 결국 수장을 교체했지만 역시 코드 인사의 한계는 극복해내지 못하는, 오히려 누누보다 더한 모습을 보이며 제대로 말아먹으며 과거 해설가 시절 '축잘알'의 명성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미 일부에서는 네빌이 해설가로 돌아가면 캐러거가 어떻게 까 줄지 기대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결국 스페인 현지 시각 3월 30일에 발렌시아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경질 소식을 전했다. 남은 시즌은 파코 아예스타란 코치가 감독 대행 역할을 하며 보내게 되었다. 이 코치가 위에서 언급한 새로 바뀐 수석 코치인데, 과거 라파 베니테즈가 발렌시아를 감독할 적부터 리버풀까지 베니테즈를 보좌한 수석 코치로 풋볼 매니저 시리즈에서 아주 좋은 수석 코치로도 유명하다.

게리 네빌의 발렌시아 감독 총 성적은 10승 7무 11패로 35%대 승률을 기록했는데, 코파 델 레이나 유로파 리그를 제외한 라 리가에서 거둔 성적은 3승 6무 8패로 안 그래도 낮았던 승률이 더 낮아져 17%대를 기록했다. 산술적으로 5판 해도 1판도 못 이기는 확률이니 답이 없었다. 후임 파코 아예스타란 감독 대행이 네빌이 잘린 지 3주 만에 세비야와 바르샤를 상대로 2연승을 거두며 네빌이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 보여주는 중이다.

결국 이 양반 덕분에 발렌시아는 2016년 여름 리그 최하위를 기록중이며, 공-미드필더-수비 핵심인 파코 알카세르, 안드레 고메스(이상 to FC 바르셀로나), 슈코드란 무스타피(to 아스날 FC )를 모두 잃었다. 최소한 유로파는 갔어야 할 수준의 팀을 본인의 능력 부족으로 이렇게까지 무너뜨렸으니 당연히 이후 현장에 복귀하지 못했고, 대신 방송국 축구 해설가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분석과 실전이었다. 그리고 직접 뛰는 것과 옆에서 보고 어떻게 뛸 지를 정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2016-17 시즌 발렌시아가 4연패로 꼴지로 추락하면서 우스갯소리로 게리 네빌이 재평가받아야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칼카나마는 이것에 대해 당신네들 응원팀이 게리 네빌과 5년동안 계약했으면 좋겠다는 따금한 일침을 날렸다.

몇 년 뒤, 네빌은 이때를 회고하며 원래는 감독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첫 제안이 왔을 때 거절을 했지만 결국에 감독직 제안을 수락했던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인정했다. 지도자 경력이 턱없이 부족한 자기가 일을 맡기엔 발렌시아는 너무 큰 구단이고 스페인어를 할 줄 몰랐으며 리그와 그 나라 문화에 대한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전혀 발렌시아 감독과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감독 재임 기간엔 패널 시절에 자기가 방송에서 감독이 하면 안된다고 말했던 짓은 다 했다는 듯. 이 때의 경험 때문에 많은 것을 배웠고 다시는 감독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6. 기록[편집]



6.1. 선수[편집]



6.1.1. 대회 기록[편집]




6.1.2. 개인 수상[편집]


  • PFA 올해의 팀: 1995-96, 1996-97, 1997-98, 1998-99, 2004-05, 2006-07
  • ESM 올해의 팀: 1997-98
  • FWA 공로상: 2012
  •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베스트 XI (1992~2002)
  • 프리미어 리그 20주년 베스트 XI (1992~2012)
  • PFA 세기의 팀 (1997~2007)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5


6.2. 감독[편집]



6.2.1. 통산 기록[편집]


구단
연도
경기



승률
발렌시아 CF
2015.12.02 ~ 2016.05.30
28
10
7
11
35.71%
통산
28
10
7
11
35.71%


7. 여담[편집]


  • 파일:external/www.thetimes.co.uk/81766702_p14_109272c.jpg
선수 시절, 리버풀 FC를 상당히 증오하기로 유명했다. 얼마나 증오하는가 하면, 2005-06 시즌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리오 퍼디난드가 종료 직전 헤더 결승골을 넣고 1-0으로 승리하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리버풀 서포터들을 향해 다가가 점프하고는 대놓고 엠블럼에 키스하였다. 당연히 리버풀 팬들은 난리가 났다. 이 사건으로 네빌은 FA로부터 벌금을 받게 되었다. 다만, 리버풀에서 태어났고 에버턴 유스였던 웨인 루니는 싫어하지 않는다. 반면, 맨유에 대한 충성심은 그 어떤 선수보다도 엄청나며 여기에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보인다.[17][18]


  • 댄디해 보이는 이미지와 다르게 상당히 4차원이기도 하다. 한때 축구 커뮤니티를 웃음바다로 만든 게리 네빌의 일기에서 그 4차원의 절정체를 볼 수 있다. 일기의 주요 내용은 맨유 최고, 나 최고, 퍼거슨 짱짱맨, 베컴도 짱짱맨, 필립은 바보, 리버풀은 꺼져. 문체가 꼬마들이 쓴 거 마냥, 매우 유치하다. 다만 이 중에 일부는 기자들이 지어낸 것도 있다.

  • 2021년 3월 개인 자산 규모가 7,000만 파운드 (한화 1091억원)로 알려졌다. 선수 은퇴 후 66개 회사에 투자해 재산을 불렸기 때문이다.

  • 맨시티 광팬으로 유명한 갤러거 형제가 특히 맨유 프랜차이즈인 이 사람을 혐오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게리 네빌과 별 문제없이 인터뷰를 진행했다.

  • 퍼디난드가 밝히길 게리 네빌은 퍼거슨에게 아부를 잘했다고 한다.

  • 엄청난 워커홀릭이다. 사실상 연예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미디어에 많은 출연을 하며 그 외에도 솔퍼드 시티 FC의 구단주 일과 호텔을 비롯한 여러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일을 본직업이라 할 수 있는 축구해설가와 겸한다. 건드리지 않는 분야가 없어서 총리로 출마하라는 농담도 많이 받는다. 제이미 캐러거로이 킨은 그에게서 광기가 느껴질 정도라며 주변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청 바쁘게 산다. 잠은 제대로 자는 거냐며 건강에 대한 염려도 받는데 실제로 유로 2020 8강 잉글랜드 vs 독일 경기 도중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발작 증세를 보인 적도 있다. 자기 나이에 있어서는 안되는 질환들이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건강에 문제가 있긴 한 모양.

  • 정치적인 발언을 자주 한다. 때문에 주변인들로부터 조만간 총리라도 될거냐는 농담도 많이 듣는다. 대체적으로 좌파적인 행보를 보이며 보수당, 특히 보리스 존슨에 매우 비판적이다. 2022년에는 아예 노동당에 가입했다.[19] 다만 이러한 행보와는 별개로 자기는 현실 정치에 뛰어들 생각은 없고 그 바깥에서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다고 밝혔다.

  • 본인의 선수 생활 후반기 비디치에게 주장 완장을 내주기 이전에도 이미 부상과 기량 저하 등으로 인하여 주장직을 내려놓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퍼거슨이 호날두에게 주장직을 넘기면 루니가 실망할 것이며 비디치에게 넘기면 퍼디난드가 실망할테니 당분간은 너가 계속 해야한다 라며 주장직을 계속해서 맡게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은퇴 직전에서야 비디치에게 완장이 넘어갔으며[20]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하게 되었다.

7.1. 가족[편집]


  • 체육인 가족이다. 아버지 네빌 네빌은 크리켓 선수 출신이고 게리 네빌을 낳고 이란성 쌍둥이를 또 낳았는데 아들들은 축구선수이며 딸 트레이시 네빌은 실내에서 하는 필드하키인 네트볼 선수로 은퇴 후에는 여자 국대 대표팀 감독까지 역임했다. 게리 네빌은 슬하에 딸이 두 명이고 조카 하비 네빌이 축구선수이다.


7.2. 형제 축구선수 필 네빌[편집]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2524678-19D4CC0500000578-212_634x515.jpg
왼쪽이 필 네빌, 오른쪽이 게리 네빌.

동생 필 네빌이 2005년 에버튼으로 이적할 때도 그는 맨유에 남았다.[21]

2살 가까이 차이나는 동생인 필 네빌 역시 꽤 실력 있고 유명한 선수였다. 평가는 대체로 형보다 많이 떨어지지만 그나마 필립이 게리보다 낫다고 평가받는 점은 멀티 플레이어. 주 포지션이 라이트백이지만, 이 외에도 레프트백,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까지 센터백을 제외한 모든 수비 포지션을 뛸 수가 있다.[22][23] 단순히 뛰기만 가능한 게 아니라 어딜 놔도 준수하게 해준다. 형제가 맨유에서 함께 뛸 시절에 필은 레프트백, 게리는 라이트백을 봤다.[24] 2005년 에버턴 FC는 필립 네빌을 영입하면서 팀의 주장으로 임명하고 라이트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로 2013년 선수 생활을 은퇴할 때까지 다양하게 잘 써먹었다. 유로 96, 2000 때는 형제가 같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소집된 적이 있다.(필립 네빌이 내준 PK로 잉글랜드는 루마니아에 패해 8강에 올라가지 못한다.) 이는 보비 찰튼, 잭 찰튼을 잇는 잉글랜드 역사상 2번째로 형제가 국대에 동시에 뽑힌 케이스.[25] 현재 필립은 2013~14년까지 맨유의 수석코치로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을 보좌하였고,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해설을 맡았으며, 2015년부터 발렌시아 CF의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게리 네빌이 먼저 은퇴하고 필 네빌은 아직 현역으로 뛸 때 스카이스포츠에서 게리가 필을 인터뷰하는 상황도 있었다.# 형제의 사이가 매우 좋은지 필 네빌이 PL 500경기 출전 기록을 세웠을때 게리는 대단한 업적이라며 "나는 지루한 사람이지만 필은 더 심하다. 우리가 술 두 잔 마시는 동안 필은 브로콜리 두 줄기를 먹는다."라며 그의 프로페셔널함을 극찬(?)했다.

[1] https://www.transfermarkt.com/gary-neville/profil/spieler/3403[2] 라이트백, 센터백[3] 10% 소유[4] 다른 유명한 선수들로는 본인의 아우 필 네빌을 포함해 라이언 긱스,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니키 버트이 있었다. 일명 퍼거슨의 아이들[5] 부주장이 주장직을 이어받는게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나 이런 케이스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22년도에 같은 빅 6 중 한 팀인 아스날의 경우 기존 주장이 주장직에서 박탈당한 후 그 후임 주장으로 당시 주장단에 있던 키어런 티어니, 롭 홀딩, 그라니트 자카가 아닌 마르틴 외데고르가 선정되었다. 다만 외데고르의 주장 선정 이유는 기존 주장단인 위의 셋이 라커룸 내 영향력 자체는 좋았으나 각각 유리몸과 기량 미달로 인한 벤치멤버, 주장이었으나 완장 투척 사건으로 인한 주장직 박탈 전적이 있었기에 이들에게 주장 완장을 넘기는데는 무리수가 있었고 결국 나이에 비해 많은 경험을 갖고 있으며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솔선수범형 리더십을 갖춘 외데고르를 뽑게 된 것이다.[6] 이 시즌에 주장 완장을 네마냐 비디치에게 넘겨줬다.[7] 당시 유망주로 주목받았지만 약 4년간의 임대생활을 거쳐 결국 맨체스터 시티로, 거기서도 임대생활만 전전하다가 MLS콜로라도 래피즈에서 겨우 정착해서 주전선수로 활약하고 2011년 은퇴했다.[8] 친부가 우유 배달부였던거 아님? 이라는 뜻. 영미권에서 자녀가 부모를 닮지 않았을 때에 나오는 유명한 패드립이다.[9] 물론 수위가 높긴하지만 퍼거슨과 네빌의 유대가 그만큼 깊기때문에 할 수 있는 농담성 발언이다.[10] 참고로 네빌은 선수생활을 센터백으로 시작했다. 굳이 따지자면 캐러거가 틀린 말은 하지 않은 셈. 다만, 어렸을때의 센터백 경험 때문인지 유사시에 센터백으로 기용되기도 했다.[11] 러시아 월드컵 때는 본인의 장기인 킥력을 활용해 꽤 활약이 좋았는데 이 때는 3백의 오른쪽 윙백이었고 워커가 오른쪽 측면의 스토퍼 센터백으로 트리피어를 받쳐주면서 클럽에서 보여준 그 이상의 활약을 보여줄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전에선 특유의 킥으로 환상적인 프리킥골도 넣었다.[12] 그로부터 4년여 뒤, 피터 림은 자기가 미워한다는 이유로 잘하던 마르셀리노를 자르고, 청소년 대표팀 감독 출신의 알베르트 셀라데스를 선임한다. 그나마 이쪽은 친분에 의한 선임은 아니고 감독경력이 어찌됐건 있었고 일단 마르셀리노를 자른 판에 중간에 욕먹고 커리어 박살날 게 뻔한 명감독이 올 리 없는 것도 있고, 보태서 선수단도 마르셀리노 경질 이후 사기가 바닥으로 내려긴 상태라서 좀 낫긴 했다. 그리고 셀라데스 본인도 능력과 별개로 최소한 선수단 자체는 마르셀리노가 잘 만들어 놓은 것을 건드리진 않아 팀이 10위권 아래로 떨어지진 않았으므로 네빌과 비교하긴 좀 어렵다.[13] 국가대표로 뽑힐 정도인 스타 선수들은 자신과 달리 선수 시절 무명인 감독과 코치를 무시하는 일이 종종 있다. 1부 중하위권만 해도 보기 힘든 현상이지만, 발렌시아 정도면 스페인 대표팀 수준이 아닌 한 국대급 선수가 드물다고는 할 수 없는 편이다.[14] 칼카나마가 이 웹툰을 짠 계기는 게리 네빌의 부진도 있지만 칼럼니스트이자 해설자인 한준모 칼럼을 보고 칼카나마의 한준 디스를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칼럼에서 한준은 다니 파레호가 포백 앞에 배치되면서 공격적으로 큰 효과를 받았다고 적었는데 현실은 칼카나마 웹툰에도 적혀 있듯이 파레호를 포백 앞에 배치함으로서 파레호의 장점을 살리지 못 하고, 단점만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졌다. 결국 게리 네빌과 한준을 동시에 디스하는 웹툰인 것이다. 결국 나중에는 한준도 파레호의 수미 기용이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한준은 이전에는 김실바 건으로 칼카나마에게 디스당한 적이 있다.[15] 공교롭게도 다니 파레호 역시 네빌이 감독을 하면서 주장 완장을 파코 알카세르에게 내주었다. 알카세르가 이적하면서 다시 주장을 차지했다는 차이점이 있다.[16] 게다가 쿠만은 발렌시아에서 워낙 화려하게 막장짓을 벌여서 그렇지 다른 팀들에선 기본 이상은 하는 감독이다. 네빌과 비교되면 차라리 쿠만에게 더 굴욕이다.[17] 네빌의 맨유에 대한 충성도가 가장 크다는 게 알려진 또 다른 일화중 하나는 한 때 맨유의 골문을 책임졌던 수문장인 피터 슈마이켈이 은퇴하기 직전 맨유의 지역 라이벌 구단인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하며 많은 맨유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때가 있었는데 슈마이켈의 이적 이후 갖게 된 맨체스터 더비에서 슈마이켈이 어깨를 툭툭 치며 악수를 하려 하자 곧바로 정색을 하고서는 악수를 받지 않기도 했다.https://youtu.be/JUqg49uKIfE영상 참고.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슈마이켈이 악수를 요청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리를 바꿔야된다고 말한 거기때문에 그냥 자리를 바꾼 것 뿐이지 악수를 안 한 것이 아니다란 말이 있지만 처음 슈마이켈이 맨시티 선수들이랑 같이 입장하고 있을 때 라이언 긱스는 슈마이켈의 등을 한 번 툭 치고 쳐다본 것과 달리 네빌은 슈마이켈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못 본척 손을 뿌리쳤다.[18] 근데 루니에 따르면 퍼거슨의 헤어드라이어를 가장 많이 당한 게 게리 네빌이었다고 한다.[19] 실제로 맨체스터는 영국 내에서 대표적인 노동당 우세 지역이다. 맨체스터 출신은 아니지만 스코틀랜드 출신인 퍼거슨도 노동당 지지자이며, 네빌이 그렇게 싫어하는 리버풀 지역도 정치성향은 맨체스터와 비슷한 노동당 우세이다.[20] 당시 퍼거슨은 퍼디난드에게 너는 주장직을 맡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이니 비디치에게 완장을 넘겼다고 한다. 이를 들은 퍼디난드는 실망하긴 했으나 퍼거슨의 뜻을 존중했다고.[21] 네빌 형제는 서로 다른 클럽에서 동시에 주장 완장을 차기도 했다.# 게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필립은 에버튼 FC.[22] 다만 웃긴 게 있다면 피파온라인 시리즈에서는 네빌이 센터백으로 구현되어 있어,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네빌을 풀백이 아닌 센터백으로 알고 있다.[23] 여담으로 반대로 게리 네빌은 동생과는 달리 센터백을 소화할 수 있다. 다만 거의 부각되지는 못한다.[24] 게다가 필은 맨유 시절에 레프트백을 상징하는 3번을 달았고, 게리는 라이트백을 상징하는 2번을 달았다. 필이 에버튼으로 떠나고서 공석이 된 3번을 레프트백 파트리스 에브라가 이어받았다.[25] 다른 나라 경우에는 덴마크미카엘 라우드루프-브리안 라우드루프 형제, 네덜란드프랑크 더부르-로날트 더부르 형제, 벨기에로멜루 루카쿠-조르당 루카쿠, 에덴 아자르-토르강 아자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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