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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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0,13대 정무원총리
강성산
姜成山 | Kang Song-san


파일:강성산.jpg

출생
1931년 3월 3일
일제강점기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
사망
2007년 (76세)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학력
파일:800px-Emblem_of_MRS.svg.png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파일:Kim Il Sung University emblem.png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파일:1024px-Czech_Technical_University_in_Prague_logo.svg.png 프라하 공대 (석사)
직업
관료, 정치가
주요경력
자강도 책임비서(1969)
평양시 책임비서(1969~1975)
최고인민회의 5~9기 대의원(1972~1998)
정무원 부총리(1977~1982)
정무원 철도부장(1979~1986)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1980~1998)
정무원 제1부총리(1982~1984)
정무원 총리(1984~1986)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경제비서(1986~1988)
함경북도 책임비서(1988~1992)
정무원 총리(1992~1998)
주요서훈
파일:attachment/hokburiorder.jpg 김일성훈장(1982)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이면서 2차례에 걸쳐 정무원 총리를 역임하였다.


2. 생애[편집]


1931년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출생하면서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학을 거쳐 당시 테크노크라트형 수재들이 많이 그러하듯이 1953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공대로 유학하였으며 1959년 귀국하게 되었다.
한때 김일성의 이종사촌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닌 것 같으며 대신 그의 아버지 강위련은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의 기관총 분대장이었으며 삼촌 강위룡이 호위사령부 책임자였고 이 덕분에 빨치산 2세대로 김일성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일설에서는 1956년 8월 종파사건, 1967년 갑산파 사건, 1969년 허봉학 사건 등에 적극 개입하여 김일성 정적 숙청에 가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증거 제시가 없어 통일부 확인에 따르면 1956년에는 강성산은 체코에 있던 시점이고 귀국 이후에도 당내 조직이 아니라 교통 테크노크라트 경력을 밟은 것으로 보이는데 김일성 정적 숙청에 가담했다는 것은 신뢰하기 힘든 주장이다.
여튼 1969년부터 조직지도부장 김영주의 눈에 들어 자강도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가 3개월만에 평양시 책임비서에 임명되는 파격적인 승진을 거쳐서 1970년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어 서열 66위를 기록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5기 대의원 겸 상설회의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73년, 북한의 정치지형이 상당히 변동을 거치게 되는데, 정경택의 아버지이며 국가계획위원장을 지낸 정준택이 사망하면서 김만금 등이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탈락하면서 정치국에 공석이 생기게 된다.
강성산은 평양시 인민위원장에 선출되는 한편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면서 당 서열 16위로 올라 핵심 엘리트의 인물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으면서 하지만 6개년 경제계획이 실패하면서 그 책임을 추궁당하여 서열이 강등당하고 김영주 추종세력을 회치려는 김정일의 미움을 사서 한동안 고생을 하게 되었다.
또한 강성산은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과 친한 사이였으며 김정일이 김성애 일가를 총공격하게 되는 계기인 인민대학습당 사저 신축 사태를 돕기도 하였다고 언급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성애 일가가 곁가지로 몰락하는 동안 강성산은 정치국 후보위원 자리는 유지하게 되었으며 교통, 철도행정의 전문가라는 점에서 김일성의 신임을 사 1975년 정무원 교통,체신위원장, 1977년 정무원 부총리, 1979년 철도부장을 지내면서 수송부장 재임시절 강성산은 <수송혁명 200일 전투> 개시를 선포하여 수송 문제를 혁신하려 하였으며 이 노력을 인정받아 1980년 조선로동당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82년 전례가 없던 정무원 제1부총리 직위에 임명됨으로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다.
당시 노령인 리종옥 총리 교체론이 슬금슬금 나오고 있었으며 아니나 다를까 1984년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에서 강성산은 정무원 총리에 임명되기에 이르고 있다.
북한 경제에 새로운 바람을 불기 위해서 1984년 합영법을 제정하게 되었으며 생활필수품 직장, 생필품 작업반과 함께 가내작업반, 부업반의 허용조치로써 시장경제를 도입하게 되면서 상당부분의 가내작업반, 부업반의 허용조치로 인해서 10%의 국가납부금으로 인해서 재정이 어느정도 활력이 존재하게 되면서 김일성이 호평을 듣게 되었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류 확대 및 과학기술발전 등을 강력하게 주문하면서 실용적인 마인드의 총리임을 보이게 되지만 이미 김일성과 김정일이 망쳐놓은 북한 경제의 구조는 강성산 한 사람의 똥꼬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닌지라 북한의 경제실적은 계속 악화되었다.
1986년 김정일의 주도로써 합영법 실패에 책임을 지면서 정무원 총리에서 해임되었으며 1986년 12월, 조선로동당 경제비서로 이동하였으며 부총리급으로 1988년까지 대우를 받다가 이후 1988 ~ 1992년 사이 함경북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좌천되었다.
경제 전문가로서의 실력이 어디 가지 않으면서 함경북도 실물경제를 잘 관리하게 되었으며 나선 지구를 비롯한 두만강 지역을 개발하면서 김일성과 김정일이 북한 경제의 숨통으로 여기던 대외경제개방정책의 전문가임을 과시함으로 다시 북한 지도부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김일성 말기인 1992년 강성산이 좌천된 상황에서 실시되었던 3차 7개년 계획이 참혹하게 실패하면서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되면서 다시 정무원 총리로 기용되었으며 김영남, 최영림, 홍성남, 김복신, 강희원, 김윤혁, 김달현, 김환, 김창주, 장철 등 무려 10명의 부총리를 임명하면서 상황 타개에 나서게 되었다.
말년에 김일성에게 개혁개방에 대해 진언하기도 하였으며 하지만 그를 신임하는 김일성은 다 죽어가는 노인네이면서 김정일은 강성산의 개혁개방론에 반감을 드러내면서 김영춘 등 군부 강경파는 강성산은 반동이니 총살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강성산은 정무원 총리이면서 1993년 4월에 중앙인민위원회에서 해임되었으며 1994년 5월에는 그의 사위인 강명도가 탈북하면서 핵무기 관련 정보를 유포하는 등 여러모로 그에겐 악재가 겹치게 되면서 이때 남한에선 강성산의 숙청을 점치고 있으나 직후의 정무원 부총리 강희원 장의위원으로 등장하면서 건재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강성산 스스로도 건강이 별로 좋지 않으면서 얼마 안가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게 되면서 이어 고난의 행군과 1차 북핵 위기라는 대형 사고들이 북한을 뒤흔들게 되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 사망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총리를 교체하면서 나라의 혼란을 더하고 싶진 않았으므로 1998년까지는 강성산을 정무원 총리로 유임하게 되었으며 1994년 김일성 장의위원 명단에서 강성산은 김정일, 오진우의 뒤를 이어 서열 3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1997년 2월에는 1997년 경공업 부문 중심 목표를 철저히 수행할 데 대한 정무원 결정을 채택하면서 인민소비품 증대를 위한 가내작업반과 부업반의 증설을 촉구하기도 하였으며 이때부터 경공업 육성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가내작업반, 부업반 및 가내편의봉사업 관리운영규정을 더욱 개정하면서 상당부분 더욱 가내작업반, 부업반을 더욱 육성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돈주들이나 혹은 출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들로 장려하고 있다.[1]
하지만 1997년 시점에선 이미 홍성남이 정무원 총리를 대행하고 있으며 1990년대부터 사망설, 김달현으로의 교체설이 남한에 퍼질 정도였다.
1997년 2월 덩샤오핑 사망 때 홍성남이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 자격으로 조전을 보낸 것 때문에 강성산이 해임된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 해임날짜도 조전이 보도된 2월 21일로 멋대로 추측한 정보가 인터넷 여기저기에 잘못 기재되어 있다.
최종적 해임은 1998년 9월이면서 10기 최고인민회의가 선출 시점이며 이때 홍성남에게 총리 자리를 이임하면서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이후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다가[2] 2007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나이도 들고 하였으니 여생을 보낸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2000년 6월에 사망하였으며 이때 공식적인 부고나 혹은 김정일이 찾아간 적도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연형묵 총리와 대비되는 상황으로 발전하면서 대부분의 경제개혁조치를 이루어낸 강성산이지만 연형묵에 비하여 안타까운 점이라고 할 수가 있다.[3]


3. 여담[편집]


  • 북한의 총리 중 박봉주와 함께 총리 임기를 2차례에 걸쳐 나눠 수행한 총리이면서 임기도 8년에 육박하여 김일성을 제외한다면 역대 2위에 해당하면서 지금도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에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총애받고 있는 박봉주랑 달리 말년이 너무 서글퍼서 그러하다.


4. 참고문헌[편집]


  • 고수석, [북한 경제를 이끈 총리傳(5)]김정일의 '눈치밥'에 기죽은 강성산 총리, 2017년 4월 19일 중앙일보 기사.
  • 김구섭, 차두현, 『북한의 권력구조와 엘리트』(서울: 한국국방연구원, 2004)
  • 북한연구소, 「북한인물론: 「정무원」총리 姜成山」 『北韓』147(1984.3)
  • 최척호, 「이달의 초점: 북한, 정무원 총리에 강성산 재기용」『北韓』253(1993.1)
  • 통일부 통일정책국 정치사회분석과, 『2009 북한의 주요인물』(서울: 통일부, 2008)
  • 북한의 개혁개방정책 추진 전망 - 임강택 | 통일연구원 | 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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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가내작업반 관리운영규정을 제정한 것은 연형묵 전 총리이지만 그러하다고 강성산은 더욱 이것을 육성하도록 노력하면서 개정하였으며 상당부분 효과가 존재하게 되었다.[2] 2002년 6월에 정치국 위원으로 재임용되었다는 불확실한 정보가 떠도는데, 검증되지 않았다.[3] 물론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기는 하면서 다행히 장례는 무사히 치른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