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종간부후보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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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기수
4. 진급
5. 문제점
6. 여담
6.1. 일제 시대 때 갑종간부후보생 제도
7. 출신 인물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육군 초창기의 장교 양성 제도 중 하나. 갑종장교, 혹은 줄여서 갑종이라 한다. 1950년 1월에 창설돼 1969년 폐지됐으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대한민국 국군 간부들의 요람이었다. 현재의 학사장교와 매우 닮은 제도로, 한마디로 학사장교와 갑종간부후보생은 둘 다 해외 군대 기준으로 보면 OCS에 해당되며, 장교를 최대한 빨리 육성해서 전장에 투입시키기 위한 용도로 운영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을종간부후보생부사관을 양성하는 제도였다.


2. 역사[편집]


미군이 철수한 1949년 6월경 육군은 8개 사단 5개 여단 편제였다. 이중에서 장교는 도합 4,900명이었다.[1] 초급장교 양성은 물론 현역 장교들의 재교육 목적으로 경기도 시흥의 제3군무예비훈련소[2] 시설을 이용해 9월육군보병학교를 개교했다.[3]

1950년 1월\ 6개월 과정의 초급장교 양성 과정을 추가로 개설했고 이것이 갑종간부후보생과정이다.

1기생은 현역/민간인 출신으로 387명, 4월에는 2기생 현역/민간인 출신 150명이 입교했다. 하지만 6월 한국전쟁으로 휴교하고, 간부 후보생들은 문산지구, 김포지구, 과천지구 전투를 돌며 대다수가 전사한다.

육군보병학교8월 4일에는 대구, 8월 10일에는 경주, 8월 15일부산 동래로 이전하는데 갑종간부후보생 1~2기를 다시 받아들여 1기는 7월 15일에 임관시키고, 2기는 9월 10일에 임관시켰다.

9월에는 육군사관학교와 통합해 육군종합학교로 개칭했다. 갑종 3기와 50년 6월에 입교한 육사 2기는 9월 4일자로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해 6주간 교육 후 제1기로 임관하게 된다. 이들이 이른바 육종 1기이다. 육종은 1951년 4월 15일에 입교하는 32기까지 총 6,987명이 임관했다.

한편 육군보병학교는 1951년 2월에야 재개교해, 동년 10월 전남 광주 상무대로 이전했다. 1951년 4월 29일 다시 갑종간부후보생 3기를 모집해 1969년 8월 30일 갑종 마지막 기수인 제 230기가 임관하기까지 총 45,424명이 임관했다.

6.25 동안 육군종합학교와 함께 전시 단기 육군 장교 양성을 담당했다. 53년 7월 18일까지 임관한 6.25 마지막 기수는 갑종 49기다. 갑종 1~49기는 총 10,550명으로 이중에서 2000 여 명이 전사하고 54명이 장성이 됐다.[4]

정리하자면 갑종 1,2기, 육종1~32기, 갑종3기~230기 순서로 임관했다. 평균 2주 단위로 입교해 약 6개월(24주) 교육을 받았으며 기수별로 평균 인원은 215명이었다.[5]

이들은 6.25 전쟁베트남 전쟁 당시 많은 피를 흘렸는데, 6.25 전쟁 3년간 약 10,500명의 육군 장교들이 전선에 나가 2,000여명이 전사했으며, 베트남 전쟁 때는 참전한 육군 장교 22,000여명 중 14,700여명이 갑종 장교 출신이었다. 특히 갑종간부후보생 1, 2기 출신들은 교육기간 도중 6.25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이들 중 일부는 임관도 하기 전 사관후보생 신분으로 전선에 투입되어 전사한 사람도 많았으며, 수료증조차 받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참고 기사[6]

1969년 갑종간부후보생 제도가 폐지되고 이듬해 육군제2사관학교육군제3사관학교가 설치됐다. 또한 학사장교후보생단기간부사관 제도가 동시에 시작돼 오늘날까지 정착됐다. 갑종간부후보생 제도는 약자인 'KOCS'도 학사장교후보생 약자 'KAOCS'와 흡사하고, 교육 특성 또한 같아 현 육군3사관학교 보다는 학사장교 제도의 전신이라고 본다.

2006년 11월 17일 갑종 222기 출신이었던 육군대장 권영기 장군(당시 제2야전군사령관)이 퇴역하면서 갑종 출신은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3. 기수[편집]


임관
년도
기수
비고
타출신 해당 기수
육사
3사
ROTC
1950년
1기
2기

육사
10기
없음
없음
1951년
3기
4기
5기
6기
7기
8기
9기

-
1952년
10기
11기
12기
13기
14기
15기
16기
17기
18기
19기

-
20기
21기
22기
23기
24기
25기
26기
27기
28기
29기
30기
31기
32기
33기
34기
1953년
35기
36기
37기
38기
39기
40기
41기
42기
43기
44기

-
45기
46기
47기
48기
49기
50기
51기
52기
53기
54기
55기
56기
57기
58기
59기
60기
61기
62기
63기
64기
65기
66기
67기
68기
69기
70기
71기
1954년
72기
73기
74기
75기
76기
77기
78기
79기
80기
81기
92,93기
95,96기
98,99기
각각 동시임관
-
82기
83기
84기
85기
86기
87기
88기
89기
90기
91기
92기
93기
94기
95기
96기
97기
98기
99기
100기
101기
102기
103기
104기
105기
106기
107기
108기
109기
110기
111기
1955년
112기
113기
114기
115기
116기
117기

육사
11기
1956년
118기

육사
12기
1957년
119기
120기
121기
122기
123기
124기
125기
126기
127기
128기

육사
13기
129기
130기
1958년
131기
132기
133기
134기
135기
136기
137기
138기
139기
140기

육사
14기
141기
142기
143기
144기
145기
146기
147기
1959년
148기
149기
150기

육사
15기
1960년
151기
152기
153기
154기

육사
16기
1961년
155기
156기
157기

육사
17기
1962년
158기
159기
160기
161기
162기
163기
164기
165기
166기
167기
168,169기
178,179기
각각 동시임관
육사
18기
168기
169기
170기
171기
172기
173기
174기
175기
176기
177기
178기
179기
180기
1963년
181기
182기
183기

육사
19기
학군
1기
1964년
184기
185기
186기
187기
188기
189기

육사
20기
학군
2기
1965년
190기
191기
192기
193기
194기
195기
196기

육사
21기
학군
3기
1966년
197기
198기
199기
200기
201기
202기
203기
204기
205기

육사
22기
학군
4기
1967년
206기
207기
208기
209기
210기
211기
212기
213기
214기
215기

육사
23기
학군
5기
1968년
216기
217기
218기
219기
220기
221기
222기

육사
24기
학군
6기
1969년
223기
224기
225기
226기
227기
228기
229기
230기

육사
25기
학군
7기



4. 진급[편집]


광복과 6.25 전쟁 당시에는 국군의 장교 인력들이 많이 부족했기에 육군에선 갑종장교도 많이 뽑았고, 게다가 육사 초창기부터 10기까지는 4년제 출신도 아니어서[7] 오늘날과 같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갑종장교 출신이라고 육사 출신에게 기죽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이 때문에 같은 육사 출신이라 해도 4년제 육사와 2년제 육사는 차별이 극심해서, 후배들이 선배들을 뛰어넘어 진급하는 것이 일상다반사 였다. 그래도 전두환을 필두로 한 4년제 육사 첫 졸업생 패거리(육사 11기)였던 하나회 멤버들이 정권 잡기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갑종출신들은 장성급에도 잘 진급하고 꽤나 요직에 있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기의 육사 생도들을 다른 기수와 비교하자면 실업계 출신인데 내신만 좋아서 입학한 기수 정도에 불과했다. 이 당시 육군사관학교 11기는 지금과는 달리 갑종간부후보생에게 입지가 밀려있었으며 2020년 기준으로 따지자면 거의 학사장교급 위상을 갖고 있었다. 갑종간부후보생이 육군사관학교 11기보다 위상이 높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게 이들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육사 11기가 생도이던 시절에 이미 현역 장교로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다만 육사 11기들 중에 드물게 6.25전쟁을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육사생도가 된 경우가 존재했다. 그래도 이 들을 제외하면은 위상 차이가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8] 하지만 그 후 하나회를 필두로 한 장군인사가 진행되고 육사의 위상이 올라간 뒤로 갑종은 무시받아 "갑종 출신으로 달았다"면 정말 드물고 대단한 케이스로 취급되게 되었다.

갑종장교 출신 중 약 200여명이 장성으로 진급했고, 이들 중 5명은 대장에까지 올랐다. 갑종 장교 중 6.25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 참전 용사들이 많았기에 이들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다음가는 대접을 받았고, 육사 다음으로 장성에까지 오른 인원도 많은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압도적으로 많은 육사 출신 장성수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이었다. 특히 12.12 군사반란 이후 전두환이 하나회 중심으로 장군 자리를 정리하면서 갑종출신은 이후 천대를 받게 된다. 그래도 1990년대까지 육사 다음으로 많은 장성 자리를 차지한 장교가 갑종출신이었는데, 아무리 무시한다 해도 육사 출신이 무시 못할 만큼 쪽수가 받쳐줬기 때문이다.


5. 문제점[편집]


지원자 중 고졸 이상인 자는 갑종으로 분류하여 소위로, 중졸 이하는 을종으로 분류하여 을종은 일등중사로 임관시켰는데, 장교부사관의 역할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같은 훈련을 받고 학력을 차별해서 임관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큰 문제점이었다. 현재 육군 학사장교부사관후보생들의 교육 기간은 얼추 비슷하지만, 분명 훈련 교과목 편성 자체는 상당히 다르다.[9] 미 육군이 대졸자에게 신병 수료 후 상병(Specialist) 계급을 부여하나, 저 경우는 고학력자에 대한 일종의 학력인정에 따른 혜택이지, 동일 계급이지만 부사관으로 분류되는 코퍼럴(Corporal)이 아니다. 다만 상병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미 육군 부사관 신분인 코퍼럴[10]이나 서전트(Sergeant)[11]로 고졸보다 진급을 빨리 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당시 고학력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군 체계가 자리를 잡지 못한 과도기에서 볼 수 있었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6. 여담[편집]



6.1. 일제 시대 때 갑종간부후보생 제도[편집]


일본의 '갑종간부후보생' 제도는 1927년에 시작되었다. 지원 자격은 구제중학교 졸업자, 고등학교 고등과 졸업자, 대학예과 1학년 수료자로 소속학교 교련 검증 합격자에 한정하였다. 당시는 병역기간이 2년이었는데 간부후보생도 동일하였다. 일단 일반병으로 4개월 이상 재영한 이후[12] 간부후보생에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면 소정의 선발전형 후 3개월간 집체 교육을 거쳐 우수자는 갑종간부후보생(통상 고졸 이상), 그 이하는 을종간부후보생(통상 중졸)이 되었다. 이후 예비사관학교에서 11개월간 집체교육을 이수 후 견습사관 4개월 근무를 하면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하며 전역하게 된다. 을종간부후보생은 육군교도학교 또는 연대에 설치된 하사관학교에서 자체교육 후 예비역 하사관으로 전역했다.

중일전쟁 이전의 일본은 소수의 육군사관학교 출신들로만 소위들을 충당하였고, 평시에는 아예 소대장 제도 자체가 없어 신임장교들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T/O 대부분을 비워 두었다. 이 때문에 갑종은 소위 임관 후에 전역한다는 면에서 미군ROTC가 소위 임관전역하고 전시에만 동원된다는 점과 비슷하다.

이런 갑종간부후보생 제도는 1938년부터 실시된 조선지원병에게도 문호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지원병들은 대부분 보통학교 졸업이라 을종간부후보생으로 가게 된다.

조선인은 높은 지원율을 뚫고 지원했기 때문에 일본어만 다소 딸릴 뿐이지 신체조건과 두뇌가 상대적으로 우수하였다. 조선인 간부후보생은 입영 4개월차에 소속부대 하사관 교육대에서 교육 받았고, 입영 1년차부터 육군교도학교에 입교해서 약 1년간 집체 교육후 오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때는 중일전쟁 시기라 예비역으로 전역 못하고 계속 군생활 했는데 오장 6개월, 군조 1년, 조장 2년[13]으로 일제 패망당시 조선인 지원병 1기생은 준위, 2기생은 조장에 달했다.

조선인 1기생 현역 300명 가운데서 갑종 간부후보생은 2명, 을종 간부후보생은 30여 명이다. 필리핀(19사단, 30사단)이나 뉴기니(20사단), 버마(49사단)에 끌려가 반자이 돌격하다 거의 다 죽었다.

해방 이후 군사영어학교에는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 6명이 있었는데 갑종 간부후보생으로는 번개장군 이치업 준장이 일본군 소위 계급 이었고, 최경록 중장, 함병선 중장, 이백우 준장, 이춘경 준장은 을종으로 일본군 준위[14], 송요찬 중장은 일본군 조장(조선지원병 2기임)이었다. 이들은 대졸자인 다른 군사영어학교생들과 달리 보통학교 졸업이라 학력이 심각하게 딸렸고 영어도 못했다. 송요찬 장군의 경우 석두장군이라고 불리며 괄시 받았지만, 사단장이 될 때까지 영어사전 3권을 갈아 마시며 공부하여 극복해 냈다.

이후 조선경비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로 넘어가면 문형태 대장, 이민우 중장, 임부택 소장, 한웅진 소장, 고백규 소장, 김진위 소장, 서윤택 소장, 공국진 준장, 이상국 준장, 박노규 준장, 김용배 준장[15], 이병우 준장 등 다수의 일본군 을종간부후보생 출신들이 있었다.

즉, 이들은 한국군 간부후보생이 아니라 일본군 간부 후보생 출신이다.


7. 출신 인물[편집]


  • 유지광
  • 이강석
  • 김수영(1기)
  • 라보현(1기)
  • 마달천(1기)
  • 한병기(1기)
  • 류근환(2기)
  • 오자복(3기)
  • 정호근(5기)
  • 김진기(6기)[16]
  • 송서규(7기)
  • 이용희(11기)
  • 전경환
  • 신치구(22기)
  • 정육진(57기)
  • 차지철(74기)
  • 이태우(157기)[17]
  • 윤창로(170기)
  • 조영길(172기)
  • 정남기(182기)
  • 윤천득(200기)
  • 강기창(202기)
  • 정수성(202기)
  • 권영기(222기)
  • 장태완 (11기)
  • 조창호
  • 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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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사영어학교 출신 110명, 조선경비사관학교 4,551명, 개별 병과학교 313명[2] 일제 시대 때 조선인 징병을 목적으로 만든 시설이었다.[3] 육군보병학교는 초급장교를 위한 신임장교 지휘참모과정(3개월), 지휘관 및 참모능력 제고를 위한 대위 지휘참모과정(3개월), 경찰간부반(2개월)을 운영했다.[4] 대장 2명, 중장 3명, 소장 19명, 준장 30명. 장성진급자중 6.1%[5] 기수별로 사병/하사관이 들어가는 일본식이었다가, 민간인 기수였다가, 사병/민간인이 섞인 기수등 계속 변동이 있었다.[6] 참고 기사에 언급된 갑종장교단중앙회 회장 박희모(육군 중장 예편) 장군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 측에 협력한 당시 제30보병사단이었고, 갑종장교 1기 대표인 하소곤(소장 예편) 장군은 당시 진압군 측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수경사헌병단장이었던 신윤희 중령이 이끄는 장태완 장군 체포조의 한영수 대위가 쏜 에 맞고 이후 강제전역당했다. 둘이 저런 자리에서 만나는 것도 참 어이없을 듯.[7] 해군사관학교는 육군보다 장교 수요가 적었던 대한민국 해군의 처지와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의 의지로 전시에도 교육 과정을 단축하지 않았다. 6.25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잠시 해군사관생도들이 육전대로 편성되어 적 병력과 소규모 교전을 하기도 했으나, 금방 원복해 교육을 재개했다.[8] 그래서 이들 육사 11기는 자신들이 공부를 못했던 것에 대한 콤플렉스로 이후 후배 육사출신 장교들 중에서 하나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일때 학업성적을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9] 학사장교는 배울 건 다 배우는데 부사관후보생은 학사장교가 배우는 것들 중에서 육군 기준으로 몇가지가 빠져있다. 그 과목들이 전쟁사, 북한군전술, 지휘통솔기법, 분소대전술 등이다. 부사관후보생은 이것들을 안배우는 대신 개인화기, 수류탄, 편제화기, 화생방 등을 학사장교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훈련한다. 공군의 경우 장교 부서장 부재시 2인자 역할도 해야 하므로 지휘통솔기법이라던지 단위의 부대 운영 기법 같은 것들을 훈련소특기학교에서 배우고, 상사급 이상을 위한 부사관 고급 과정에서는 중대장 부재시 2인자 역할도 해야하므로 특기학교에서 중대 단위의 부대운영기법 같은 것도 배운다.[10] 이 계급은 상병들 중 분대장 직책 등을 맡으면서 부사관 신분으로 분류되는 계급이므로, 이 계급을 거치지 않고 바로 서전트를 달 수도 있다.[11] 국군은 공식적으로 이 계급이 육군의 병장에 대응된다고 명시해뒀지만, 실질적인 지위는 육군 하사에 가깝다.[12] 입대하면 6개월간 초병 교육을 받는데 약 3~4개월째 연대장에게 1기 검열을 받아 합격 해야지 일등병으로 승진하고 간부후보생 추천을 받을 수 있었다. 불합격 하면 다시 초병 교육을 받는다.[13] 진급이 무지하게 빠른데 일본군은 하사관 월급이 적어 가정을 꾸릴 수 없어 지원자도 없으며, 평시에는 준위까지 달아야 정년이 40세일 정도로 짧았다. 즉 직업군인이 아니라 병생활의 연장이었다.[14] 최경록, 함병선은 갑종 간부후보생으로 준위가 된 것이라는 말도 있다.[15] 학병출신 김용배 대장과는 동명이인. 지원병 김용배는 전사함[16] 동시에 육사 9기이기도 하다.[17] 39사단장, 제2훈련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