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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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7년 12월 28일
황해도 송화군 연졍면 온수리
사망
1946년 9월 22일
인천광역시
이명
양문석(楊文奭)

북서(北瑞), 동진(東津)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고 이후 독립투사를 양성하는 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하고 독립운동가 모집활동을 하고 상하이로 탈출한 후 한국독립당의 행정위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감익룡은 1887년 12월 29일 황해도 송화군 연정면 온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에 하급 관료가 되었으나 1909년에 사임했고, 1907년 4월 양기탁, 안창호, 전덕기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 지회에서 활동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이후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창건 사업을 추진할 때 이에 적극 참가해 1910년 12월 초순 만주 안동현(安東縣)을 독립군기지로 낙점하고 12월 하순에 김용규(金容奎), 고일청(高一淸), 김용삼(金容參), 김희록(金熙錄), 김성주(金成柱)와 함께 안동현에 연락 근거지를 만들었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감익룡은 안동현에서 동료들과 함께 상업을 경영하면서 안동이 만주에서 중국으로 가는 통로이므로 이곳에 하나의 거점을 설립해 다수의 청년들을 베이징 무관학교에 입학하도록 알선하고 그 입학자금을 공급했다. 또한 서간도에 세울 독립군기지와 무관학교에 갈 동포들을 모집하는 활동도 병행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들을 대거 체포할 때 함께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이후에는 상하이로 탈출해 양문석(楊文奭)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1932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당인 한국독립당의 행정위원을 역임했다. 이후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자 1946년 5월 31일에 서울로 귀환했으나 불과 4개월 후인 9월 22일에 제물포에서 58세의 나이로 병사했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감익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