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라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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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대만총독


'''{{{#c3c965 일본 제국 제11·13·15대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桂太郎 | Katsura Tarō
'''

파일:11_KatsuraT.jpg

출생
1848년 1월 4일
나가토국 아부군 하기정
(現 야마구치현 하기시)
사망
1913년 10월 10일 (향년 65세)
도쿄부 도쿄시 시바구
(現 도쿄도 미나토구)
재임 기간
제11대 내각총리대신
1901년 6월 2일 ~ 1906년 1월 7일
제13대 내각총리대신
1908년 7월 14일 ~ 1911년 8월 30일
제15대 내각총리대신
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서명
파일:KatsuraT_kao.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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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즈미(淸澄)
통칭
다로(太郞)
아호
가이조(海城)
배우자
가쓰라 우타코 1874년 ~ 1886년
가쓰라 사다코 1886년 ~ 1890년
가쓰라 가나코 1898년 ~ 1913년
작위
공작
정당
약력
제9-12대 육군대신
제2대 대만총독
제25대 외무대신
제18대 내무대신
제19대 문부대신
제13대 대장대신
제7대 시종장
제3대 내대신
초대 대만협회 회장[1]
제11·13·15대 내각총리대신
원로
군사 경력
복무
일본제국 육군
1874년 ~ 1900년
최종 계급
대장
주요 보직
제3사단장
참전
청일전쟁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일본군인 · 정치인. 제11·13·15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이자[1] 을사조약, 한일병합조약 체결 당시의 총리였으며, 2019년 아베 신조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역대 일본 최장수 총리 기록(2,886일)을 보유했었던 인물.


2. 생애[편집]


파일:가쓰라타로.jpg
막부말기 당시의 가쓰라
조슈 번 나가토노쿠니(長門國, 현 야마구치현) 출생. 지방의 여러 잡무를 맡아보던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2] 어렸을 때부터 서양식 군사 훈련에 참여했고 에도 막부 말 일어난 보신 전쟁에 존왕파 병사로 참가했다.

1870년에 프로이센 왕국으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당시 강성대국을 주장하던 프로이센의 군사 정책에 매료되어 국방 정책과 군사 과학을 배웠지만, 관비 유학이 아닌 사비 유학이었기 때문에 부담되어 결국 3년 만에 유학을 접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여파로 정신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가쓰라는 거기서 일본 본국을 향해 줄기차게 자신의 독일 유학을 관비로 지원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그의 요구는 묵살당했다.

유학 후 평소 알고 지내던 기도 다카요시의 연줄과 도움으로 육군에 장교로 편입되었고, 거기서 가쓰라 본인의 최대 수혜자가 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만난다. 이후 야마가타의 지원과 후광으로 청일전쟁에 참가해 승진을 거듭하고, 이토 내각의 육군대신과, 타이완 총독을 지내는 등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다.

1901년,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직을 사임하고 조선으로 떠나자 그의 후임을 둘러싸고 일대 파란이 일어났는데, 이토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 귀족[3]들은 내무대신과 대장대신을 역임했던 을미사변을 일으킨 이노우에 가오루를 후임 총리로 추천했지만, 야마가타 등 강경파 군인들은 이노우에보다는 차라리 같은 군인이었던 가쓰라 다로를 추천했다.

그 분쟁에서 메이지 덴노가 이노우에를 추천한 온건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이노우에 카오루는 총리 취임을 위한 조각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토 내각의 육군대신이었던 가쓰라가 삐딱선을 타서 이노우에 내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고, 대장대신으로 입각시키려던 시부사와 에이이치[4]도 "군인과 같이 일하기 싫다."라며 입각을 거부하자, 결국 조각에 실패한 이노우에 카오루는 총리 취임 준비 계획을 포기했다. 총리 자리가 무주공산이 되자 야마가타는 때를 놓치지 않고 가쓰라를 적극 추천해 가쓰라가 이토의 후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11.jpg
총리대신 취임 직후.[5]

우여곡절 끝에 가쓰라가 총리로 취임했지만, 사실상 그의 취임이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지원 덕인 데다가 그가 임명한 내각 인사들도 초보 내각 가쓰라 1차 내각 인선은 어수룩하게 짜여졌는데, 대부분의 내각 인사들이 야마가타가 추천한 사람들인데다가, 대부분이 관료직을 거치지 않고 장관직에 앉아본 초보자들이었다. 게다가 소네 아라스케는 외무대신에 대장대신 겸임.현대 한국으로 치면, 외교부장관기획재정부장관을 한 명이 겸임하는 셈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비입헌 내각" "2류 내각"이라고 비꼬았다. 게다가 보통 총리가 되면 예비역으로 전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가쓰라는 현역을 계속 유지했다.

1904년, 영일동맹을 성사시키고 러일전쟁을 일으켜 일대 대박을 친다. 한때는 뤼순에 구축한 러시아군의 뤼순 요새로 일본군을 꼴아박는 짓거리도 서슴지 않았지만(203고지) 혈전 끝에 뤼순 요새를 함락시키고, 대한해협에서 도고 헤이하치로가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자(쓰시마 해전) 러시아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결국 일본과 강화 할 수 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정작 총리대신이었던 가쓰라의 국민적 인기는 바닥을 기었다. 당시 근대국가들이 그러했듯 전황에 대해 거짓으로만 일관해왔다. 뭐 이기긴 이기고 있었으니 크게 본다면 거짓은 아니었으나, 결국 일본은 몇 달만 더 전쟁을 계속해도 국가가 패망할 지경이었기에, 전쟁 배상금도 못 받고 얻은 거라고는 고작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뿐이었다. 이 땅들은 당시 오랑캐가 살다가 사회 빈곤층이 먹고 살려고 이주하던 식인곰 출몰지 홋카이도보다 더 위에 있는 오지로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졌다. 수많은 사상자들, 전쟁 때문에 당한 극심한 수탈, 메이지 시대 전반적으로 서구화를 위한 피나는 분투 등을 떠올리곤 폭발해서 1905년 9월 히비야 폭동을 일으켰다. 히비야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이 폭동은 파출소 수천 곳을 작살내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6] 결국 가쓰라는 러일전쟁 승전 이후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고[7], 얼마 되지 않아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총리직은 온건파였던 사이온지 긴모치와 돌아가며 사이도 좋게 번갈아 연임하게 되는데(사이온지가 12대, 14대), 그가 야마가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사이온지가 총리직을 내려놓고 나서, 그에게 두 번째 임기가 찾아온다. 조선그의 임기 중에 병탄당했고,[8] 고토쿠 사건[9]으로 인한 사회주의자 탄압 등 여러 정책을 그의 관록으로 밀어붙이자, 급성장하는 가쓰라를 두려워하였던 야마가타가 슬슬 그에게 브레이크(권리 제지)를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쓰라는 옛 은인이었던 야마가타를 추방하기 위해 이미 야마가타 파벌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은밀히 규합시켜놓은 상태였고, 또한 3차 가쓰라 내각도 이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경악한 야마가타는 가쓰라가 두 번째 총리직을 사임하고 나서 메이지 덴노가 사망한 틈을 타서, 해외 시찰을 나간 가쓰라가 돌아오자마자 궁내성의 시종장과 내대신을 겸해주어 현실 정치에서 가쓰라의 입지를 괴멸시키려고 했다.[10] 그런데 그때 총리였던 사이온지가 돈도 없는데 예산 늘려달라고 징징거리는 육군에게 즐쳐드시고, 너네 감축도 함께 드실 거임이라며 군축을 기획한다. 이에 빡친 일본군은 참으로 모래알 전통에 빛나는 일본군답게 육군대신을 사퇴시키고[11] 후임 추천을 보이콧한다. 이러자 내각을 구성할 수 없게 된 사이온지가 사임하게 된다.

이에 당연히 총리직 돌려먹기하던 가쓰라가 뒤를 이어 부임하니 이로서 총리직만 세 번째 역임이다. 그러나 이때 일본국민들은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러일전쟁을 전후해서 일본의 국민 쥐어짜기와 통제는 혹독한 수준이었는데 상술되었듯이 가쓰라 시기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는데도 워낙 진을 뺀 탓에 포츠머스 회담에서 배상은 아예 못 받았으니 당장 국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러일전쟁만 이기면 뭔가 영광된 이상향에 다다를 것 같았던 선동과는 달리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탈진에 가까운 상태이니 민중에 대한 쥐어짜기만 계속됐다. 이때 총리의 군축 요구에 군부가 반발해서 박살난 내각에 다시 돌려먹기로 가쓰라가 들어갔다는 정치 놀음에 민중들의 반발이 빗발쳤다. 하필 시기도 메이지 덴노가 죽은 직후, 즉 일본 입장에서는 거대했으며 기나길었으며 피땀과 눈물이 뒤섞인 숨가쁜 시대가 상징적인 종말을 고한 때였다. 그만큼 커다란 권위의 상실에 그에 비례하는 허탈감을 느낄 시기였다.

가쓰라가 비록 노련한 정치놀음으로 야마가타 파 자체를 자신의 세력으로 편입시키는 상한가를 쳤으나, 민중들은 그 나물에 그 밥 정치꾼들에게 더욱 분노했을 뿐이었다. 확실히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이 가쓰라는 조슈파였고, 사이온지를 하야시킨 육군도 조슈파였고, 야마가타 파 역시 조슈파였다. 이에 정당정치인들이 맹공을 퍼부었고, 여기에 일본군답게 육군의 독주를 놔둘 수 없는 해군의 야마모토 곤노효에 등이 적극 지원했다. 이 난국을 돌파할 해법을 정치고수 가쓰라는 그의 풍부한 경험에서 찾고자 했으니, 그것은 바로 선배정치인을 본받는 것인데 그 선배정치인이란 바로 독물 이토 히로부미였다.

가쓰라는 이토 히로부미가 그랬듯 천황의 권위를 빌고자 했다. 곧 다이쇼 천황에게서 사이온지에게 정쟁을 중지하라는 칙허가 내려가나 이는 반대파들을 자극할 뿐이었다. 다이쇼는 메이지가 아니었다. 메이지 본인이 그 과정에서 어찌했건, 스스로에게 비롯하건 남이 의도적으로 실어주었건 간에 한 번 움직이면 절대적인 권위가 자연스레 따라오던 메이지와는 달랐다. 반대파는 그러잖아도 비겁자인 가쓰라가 어리고 혼암한 천황을 제멋대로 조종하려 든다고 여겨 더욱 혐오하게 되었다.

가쓰라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일본 의회사에서 길이 남을 명연설이었다. 후일 '일본 의회정치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가 의회 질의 도중 가쓰라와 그의 관료 동지들을 덴노의 바짓가랑이 뒤에 숨어 있는 겁쟁이들이라고 신랄히 탄핵의 논박을 가한 것이다.

그들은 항상 입을 열면 곧바로 충애를 외치고, 마치 충군애국은 자기들만의 특기처럼 외치고 있지만, 그 하는 바를 보면 항상 옥좌의 그림자에 숨어서, 정적을 저격하는 듯한 거동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옥좌를 흉벽(胸壁)으로 삼아, 탄환 대신 조칙으로 정적을 쓰러뜨리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중략)

--

오자키 유키오, 1913년 2월 5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가쓰라 총리대신을 규탄하면서


오자키의 열변에 치욕을 견디지 못해서 가쓰라는 중의원을 해산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어댔다. 하지만 중의원 의장 오오카 이쿠조로부터 중의원을 해산했다간 의회를 포위한 군중들의 폭동을 감당할 수 없으리란 경고를 받고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두 달여 만에 사퇴했다. 이 1차 호헌운동은 훗날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발점이 되었다.

총리 낙마 후 불과 8개월 만에 위암으로 급사. 총리 재임기간은 총 2886일, 7년 11개월로 일본의 모든 내각총리 중에서 100년 넘게 가장 오래 재직한 최장수 총리였다.[12]

3. 여담[편집]


  • 머리가 정말 컸다고 한다. 키가 작았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도 5등신이었다. 머리 안에 든 뇌도 정말로 커서 일본인 뇌 중량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싱긋 웃으며 탁 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허물 없이 식사를 초대한다는 데서 '니코퐁'이라 불렸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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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측 대표이며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특사였던 윌리엄 태프트도 가쓰라의 총리 임기(2기~3기) 동안 대통령에 재임했었다.[2]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슈 번의 번주인 모리(毛利) 가문을 섬긴 집안으로, 조상들 중에는 이츠쿠시마 전투스에 하루카타를 꾀어낸 모리 모토나리 가신 카츠라 모토즈미도 있다.[3] 물론 전혀 온건하지 않았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끄는 강성무골들에 비하면 대체로 온건했다.[4] 일본은행 총재, 도쿄 증권거래소 의장 등을 역임하며 당시 일본에 서구식 경제체제를 도입한 사람이다.[5] 위 사진에 적힌 출생일인 11월 28일음력이다. 양력으로 바꾸면 1월 4일이 된다.[6] 목조로 된 파출소는 군중들이 아예 들어서 시궁창에다 던지고 불태워버렸다고 한다.[7] 흔히 알려진 것처럼 외무대신 시절에 맺은 것이 아니다.외무대신은 3차 내각 때 겸임했다. 태프트는 나중에 대통령과 연방 대법관이 되지만 이 당시에는 전쟁장관.[8] 이 때 태프트 역시 대통령[9] 일명 대역사건.[10] 까다로운 예절과 규율을 중시하는 일본 궁내성은 아이러니한 공간이었다.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덴노였으나 덴노들은 현실 정치는 거의 모르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당시 일본의 정치는 조슈와 사쓰마 파고 양분되어 운영되던 체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가쓰라에게 던져 준 시종장과 내대신 직위는 한 마디로 정치 일선에서 손 떼라는 의미였다.[11] 당시 일본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현역 장성만이 맡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군의 비위를 못 맞추면 화난 군부가 대신을 사퇴시키고 새 대신을 보내지 아니하여 총리는 아웃이므로 총리들은 군대 눈치도 잘 살펴야 했다. 이 제도를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라고 하는데, 해군 출신의 야마모토 곤노효에 총리가 폐지하였다가 문민 출신의 히로타 고키 내각에서 부활한다.[12] 이 기록은 약 110여 년 뒤 아베 신조가 깨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