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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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외교부 지정 여행금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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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법에 의한 여행금지 국가
이 국가들은 영주(永住), 취재ㆍ보도, 긴급한 인도적 사유, 공무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목적의 여행으로서 외교부장관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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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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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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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10

2023.11.25 ~
2024.1.31



{{{-2 윗첨자1: 2007. 8. 7 부터 입국시 처벌 도입.
윗첨자2:러시아가 실효지배 중인 도네츠크루간스크, 크림반도(세바스토폴, 크림 공화국)도 포함됨.윗첨자3: 이집트와 영토 분쟁지역인 와디 하이파 돌출지할라이브 지역도 포함됨.
윗첨자4: 민다나오 지역(잠보앙가, 술루 군도, 바실란, 타위타위 군도)만 금지.
윗첨자5: 로스토프·벨고로드·보로네시·쿠르스크·브랸스크 지역 내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30km 구간만 금지.
윗첨자6: 브레스트·호멜 지역 내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30km 구간만 금지.
윗첨자7: 아제르바이잔과의 접경 30km 구간만 금지.
윗첨자8: 아르메니아와의 접경 5km 구간만 금지.
윗첨자9: 가자 지구만 금지.
윗첨자10: 샨주 북부, 샨주 동부, 까야주만 금지.}}}
여행금지국가 · 출국권고국가 · 여행자제국가 · 여행유의국가



파일:가자 지구 한국어 지도.svg}}}
가자 지구 지도
파일:external/static.guim.co.uk/Gaza-City-Palestinian-Te-13lg.jpg}}}
가자 지구 시내 전경[1]
파일:가자 오스만.jpg}}}
가자 항구에서 바라본 시가지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1319157-0B8C2B72000005DC-39_468x535.jpg}}}
가자 지구의 대형 마트 내부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고대 필리스티아
3.2. 헬레니즘 도시
3.3. 이슬람 시대
3.4. 십자군 시대
3.4.1. 이집트-시리아의 각축장
3.4.2. 정권 교체의 혼란
3.4.3. 대몽골 & 대십자군 거점
3.5. 맘루크 왕조
3.6. 오스만 제국
3.6.1. 리드완 가문
3.6.2. 근대
3.7. 근현대
4. 현황
5. 가자 지구 분쟁



1. 개요[편집]


팔레스타인국 영토의 서부 지역. 지중해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40km 가량 뻗어 있고 남쪽으로 이집트, 북쪽과 동쪽으로 이스라엘과 접한다. 2006년 이후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와 별개인 무장 단체 하마스가 통치 중이며, 이스라엘과 종종 충돌을 벌여 중동의 대표적인 화약고이자 분쟁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인구가 약 230만 명에 달하는데도 변변한 공항 하나 없고 국경도 매우 제한적으로만 열리며, 영해도 이스라엘에 의해 제한되는 등 세상에서 가장 고립된 지역 내지는 '세계 최대의 감옥'으로 여겨진다. 가디언지 관련 기사.


2. 상세[편집]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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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قِطَاع غَزَّة (qiṭāʕ ḡazza)
히브리어
רְצוּעַת עַזָּה (r'tsu'át 'áza)
영어
Gaza Strip
한국어
가자 지구(地溝)[1]


면적은 365㎢고, 인구는 2022년 기준 2,375,259명으로 대구광역시와 비슷하다. 인구 밀도는 6,507명/㎢.

사실 가자 지구의 인구는 1948년 당시에는 아직 도시화가 진행되기 이전 시기였기 때문에 지역거점도시라는 위상을 가지고 있어도 인구는 8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의 이스라엘 영토 각지에 살았던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에서 쫓겨나고 가자 지구로 피난오면서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인구 40만의 중견도시가 되었다. 19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귀속되며 인구가 빠져나가기도 했으나 1970년대 이후로는 인구증가가 재개되었고, 높은 출산율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면서 1967년도에 40만이었던 인구는 1997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였고, 2016년에 200만 명을 돌파하여 가자 지구 자체도 하나의 대도시권으로 등극하였다. 가자 지구 내에서도 인구가 골고루 분포된 것은 아니라서 가자 지구 내 북부에 위치한 도시인 가자에 인구 40%가 몰려살며, 본 문서도 사실상 가자 시를 다루고 있다.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2023731-0D51CF2F00000578-349_468x286.jpg


파일:external/www.sbs.com.au/6055_gaza-170913-m.jpg

가자 지구 고급 호텔
가자 지구 고급 주택

하마스가 집권하고 있는 지역으로도 유명하며, 이 때문에 이스라엘이 봉쇄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하마스의 로켓 무력도발에 대한 보복 공격도 수시로 당한다. 그 외에도 각종 무장 단체들 간의 대립으로 지옥 같은 곳이며, 당연히 사회기반시설도 낙후되거나 망가져 있어 매년 급속히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다.

2백만명이 넘는 인구 중 1천여명의 기독교도를 제외한 나머지가 무슬림으로, 레반트 지역에서 가장 이슬람세가 강한 지역에 속한다.[2] 가자 지구의 기독교인 인구는 2007년에 3000명이었지만 봉쇄와 경제난으로 인해 2023년 현재는 1100명 안팎으로 매년 줄어드는 추세이다.

가자지구도 이집트와의 교류, 사업, 해외파견 노동으로 돈을 버는 계층은 있기 때문에 빈부격차는 있다. 특히 하마스 집권세력, 의사, 사업가 등 부유층이 사는 가자시 서쪽 동네는 고급 주택, 대형 마트, 호텔 등이 있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다른 가자 지구보다는 상태가 훨씬 낫지만 이쪽에도 폭탄이나 미사일이 간간히 떨어지는건 마찬가지인지라 목숨걸고 산다해도 과언이 아니기는 하다. 목숨을 생각했으면 이집트로 갔겠지. 또한 그나마 상황이 나은 이 동네조차도 2007년 이후 계속되는 봉쇄로 인해 새로 지어지는 건물이 드물다.

다만 팔레스타인이 그렇듯이 아랍권 치고는 교육 수준이 좋은 지역으로, 문해율은 이스라엘에 크게 뒤치지는 않고 대학에 보내는 비율도 비교적 높은 편이다. 문제는 가자지구의 경제 성장이 봉쇄조치로 막혀있다 보니, 이렇게 공부시킨다 한들 총 실업률은 40%대, 청년실업률은 70%를 넘으며, 이는 서안 지구의 3배를 넘는다. 그래서 이것이 가자지구 주민들의 이스라엘과 이집트 군부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가자 지구에 위치한 공항으로는 야세르 아라파트 공항과 구시 카티프 공항이 있었지만 아라파트 공항은 개항 후 고작 2년만 이용되다가 2000년 9월부터 2차 인티파타로 운행이 중단되었고, 2001년에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구시 카티프 공항 역시 2004년에 운행이 중단되어 폐허가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 방면으로 나가는 것은 아예 막혀있다보니 가자지구 주민들은 비행편을 이용하기 위해선 이집트까지 가야 한다.

이름도 비슷하고 거리도 꽤 가깝기 때문에 기제(기자)와 헷갈리는 경우도 있으나 엄연히 다른 도시로 나라도 다르다. 다만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같은 이집트 영토였었기는 하다.

팔레스타인의 또 다른 영토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비교하면 서안 지구가 요르단강을 낀 초원지대인데다가 봉쇄조치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기 때문에 실업률이 낮아 가자 지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살기는 괜찮다. 실제로 이스라엘 정착촌이 꾸준히 들어서고 있다. 물론 서안 지구도 가자 지구보다 상대적으로 살기 괜찮다는 것이지 저임금직이 대부분인데다가, 청년실업률이 30~40%에 달할 정도로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는 않다.


3. 역사[편집]


역사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계점에 위치한 탓에 이집트 세력의 지배를 많이 받았다. 고대 시기에 요새화된 도시는 신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하스몬 왕조 등 북방 세력의 공격에 맞서 수차례 방어에 성공하였지만 결국은 점령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가자의 역사 유적들


3.1. 고대 필리스티아[편집]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 제1 왕조가 현 시가지 남쪽 텔 엣 사칸에 성채를 건설하여 아시아 방면의 교도보로 활용하였다. 그후 가나안 인들이 거주하였고, 힉소스의 침공 등으로 이집트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던 기원전 1450년경 신이집트의 투트모스 3세가 현 가자 위치에 도시를 세웠고, 이후 아마르나 서신에서 '아자티'로 지칭되었으며 대상 무역으로 번영한 끝에 가나안 지역에 대한 이집트의 총독부로 기능하였다.

그러다 기원전 12세기 바다 민족의 침공으로 신이집트가 쇠락한 후 가자에는 바다 민족의 일파이자 팔레스타인 지명의 어원인 필리스티아인들이 정착하였다.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경쟁하던 필리스티아인들은 가자 ~ 자파 해안에 걸쳐 5개의 도시, 즉 펜타폴리스 (가자, 아슈켈론, 아슈도드, 에크론, 가트)를 건설하였는데 가자는 그 중 가장 큰 도시였다. 성경 판관기 16장에서 가자는 삼손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붙잡혀 구금된 곳으로 등장한다.

다윗의 정복 후 약 3세기간 이스라엘 왕국의 지배를 받은 가자는 기원전 8세기 말엽 아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되었다. 후자가 멸망할 무렵 이집트의 네코 2세가 재차 가자를 장악하였고, 기원전 601년 근교 미그돌에서 남하해온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격파하였다. 기원전 568년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기어코 가자를 정복하였으나 신바빌로니아의 멸망 시에 재차 이집트가 회복한다. 기원전 529년 아케메네스 제국캄비세스 2세 역시 가자 점령에 실패하였으나 3년 후 이집트 정복 시에 점령된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 지배기에 가자는 상당한 자치를 누렸으며,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교역 도시로 번영하였다. 기원전 520년경 그리스 인들이 가자에 상관을 세웠으며, 기원전 380년에는 아타네를 모델로 한 동전이 주조되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 시에 가자의 1만 5천 수비대는 항복을 거부하였고, 5개월간의 포위를 견딘 끝에 기원전 332년 가을 함락되었다.(가자 공방전) 저항에 대가는 가혹하여 지휘관 바티스를 포함한 시내의 성인 남성들은 모두 학살되었고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로 팔려갔다.


3.2. 헬레니즘 도시[편집]



파일:가자 신상 1.jpg


파일:가자 신상 2.jpg

제우스 석상과 아폴로 청동상[3]

이렇게 가자 원주민들을 일소한 알렉산드로스는 현지 베두인들을 데려와 정착시켰고, 폴리스 지위를 주었다. 디아도코이 시대에 들어 가자는 본래 안티고노스의 수중에 있었으나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셀레우코스 1세 연합군이 43마리의 코끼리를 대동한 왕자 데메트리오스를 격파하였다. 그 후 가자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이라크 기반 셀레우코스 왕조 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한 시리아 전쟁에서 가자는 대부분 전자의 소유였고, 기원전 277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나바테아 원정 후 도시는 남부 아라비아와의 향료 무역으로 번영하게 되었다. 앞선 가자 전투에서 정확히 한세기 후인 기원전 217년 현 이집트-가자 국경의 라파에서 벌어진 라피아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셀레우코스 조의 안티오코스 3세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안티오코스 3세는 동방 원정 (아나바시스) 후 축적한 국력을 바탕으로 재침하여 기원전 196년 가자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역을 프톨레마이오스 조로부터 정복할 수 있었다.

2세기에 걸친 헬레니즘기에 가자는 그리스 문화가 자리잡았고, 도시는 헬라 학문과 철학의 융성한 거점의 명성을 얻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셀레우코스 조의 쇠퇴와 함께 가자는 사실상 자립하였다. 그러던 기원전 103년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드로스 야네이가 아크레를 침공하자 키프로스 국왕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개입하였다. 후자가 연전연승을 거두자 그가 팔레스타인을 거점으로 다시 이집트를 노릴까 염려한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 역시 육상으로 북상하였다. 프톨레마오이오스 9세는 그를 우회하여 가자에 이르러 월동하였으나, 이집트 군대가 기수를 돌려 다가오자 기원전 102년 키프로스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한숨을 돌린 알렉산드로스 야네이는 이듬해 이집트의 태후 클레오파트라 3세가 사망하자 정복을 재개, 라피아를 점령하며 가자를 고립시켰다. 기원전 96년, 그는 가자를 공격하였다. 현지 사령관 아폴로도토스는 야습으로 하스몬 군대를 격파하였고 수천의 사상자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나바테아의 원조가 오지 않자 아폴로도토스의 형 리시마코스의 주도로 가자는 항복하였다. 도시에 입성한 알렉산드로스 야네이는 약속과 달리 공격적으로 돌변하였고, 이에 민회와 5백여 주민들은 아폴로 신전에 피신했으나 학살되었다.[4]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령이 된 후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 의해 재건되었다. 지중해를 제패한 로마 제국의 휘하에서 가자는 팔레스타인의 주요 항구 중 하나이자 이집트-시리아 간의 내륙 무역 도시로 번영하였다. 기원전 30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도시를 헤롯 대왕에게 넘겼는데, 기원전 4년 그가 후자가 사망하자 다시 로마의 시리아 속주에 편성되었다. 사도행전에서 가자는 예루살렘에서 에티오피아로 향하는 사막로 상에 입지하였다고 거론되었다. 서기 66년 유대 반란 시에 유대인 반군의 방화로 일부 파괴되었으나 곧 재건되었다. 반란 진압을 맡은 티투스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와 점령 후 회군할 때 모두 가자를 거쳐갔다.

2세기 로마 제국의 나바테아 병합과 함께 가자는 전통적인 홍해 교역에 다시 나서며 번영하였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500인 의회가 통치하였다. 주민들은 필리스티아, 그리스, 로마, 가나안, 페니키아, 유대, 이집트, 페르시아, 베두인 등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국제 도시였고 화폐 주조소가 자리하였다. 130년 가자를 방문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신설된 경기장에서 친히 각종 경기들을 주최하였다. 그외에 로마 시기 가자에는 토착 신인 마르나스 및 티케를 중심으로 제우스, 헬리오스, 아프로디테, 아폴로. 아테나 등을 모시는 신전들이 있었다.

로마 시대에 세워진 가자 항구는 처음에 (나폴리의 어원이기도 한) 그리스식 지명 '네아폴리스'로 불렸고,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에 독립된 도시로 격상되며 '콘스탄테이아'로 개칭되었다가 율리아누스 때에 '마이우마스'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간단히 마이우마로 불린 그 항구를 중심으로 가자 일대에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여타 레반트의 도시들과 달리 내륙 가자는 다신교세가 강하였고 299년에는 성경 강독을 위해 모인 기독교도들이 공격당하기도 하였다.

4세기 초엽 기독교 박해 시에 가자에선 성 실바누스와 30여 기독교도들이 순교하였다. (310년) 밀라노 칙령니케아 공의회 이후로도 해안의 마이우마와 달리 내륙의 가자는 다신교 도시로 남았으며, 이에 331년 콘스탄티누스는 두 도시를 분리하고 마이우마 주교좌를 설립한 것이다. 다만 단일 총독이 통치하는 등 두 도시는 정치적으론 하나로 남았다. 4세기 말엽 기독교의 국교화 후에도 기독교도의 공직 취임을 불허하는 등 '이교' 도시였던 가자는 402년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보낸 특사 키네기우스가 시내의 8대 신전들을 파괴한 후 406년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황후의 지시로 마르나스 신전 터에 세례자 요한 성당이 건립되며 기독교화되기 시작하였다. 6세기에는 성 세르기오스 성당과 시나고그 (유대 회당)이 세워졌으며, 가자는 시나이 반도 순례의 출발점이 되었다.


3.3. 이슬람 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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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대모스크[5]

팔레스티나 프리마의 남부 해안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가자에는 7세기 들어 메카의 아랍 상인들이 왕래가 잦아졌다. 그 중엔 이후 칼리파로 즉위하는 우마르 이븐 알 카타브도 있었고, 무함마드 역시 젊은 시절 대상단의 일원으로써 한 두 차례 가자를 방문하였다. 이미 630년경 가자에는 소수의 무슬림 개종자들이 있었으며, 634년 레반트 정복에 나선 이슬람 제국의 명장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도시를 포위하였다.

하지만 일전의 아즈나딘 전투의 승리에도 굴하지 않은 가자 수비대가 시내의 유대인 공동체의 협조와 함께 완강히 저항하며 포위는 장기화되었고[6], 야르무크 전투로 판세가 결정난 후인 637년 여름 가자는 3년의 저항 끝에 함락되었다. 아므르는 동로마 수비대를 학살하였지만 주민들은 건들지 않았다.

강한 저항에도 나타난 상대적 관용은 이미 주민들 중 일정 부분이 아랍계였던 것과, 가자의 상인이었던 무함마드의 조부 하쉼 이븐 압두 마나프가 묻힌 곳이라 여겼던 것 때문이라 한다. 다만 세례자 요한 성당은 대사원으로 개조되었고, 애초에 기독교에 크게 감화되지 않았던 가자의 주민들은 쉽고 빠르게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라쉬둔-우마이야-압바스 제국기에 가자는 필라스틴 군구 (준드 필라스틴)에 소속되었고 중소 도시로 남았다.

672년 가자는 지진을 겪었고, 723년 도시를 방문한 성 윌리왈도는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이 지즈야를 내고 신앙과 상업 활동을 이어간다고 기록하였다. 압바스 왕조기인 767년 가자에선 순니 4대 법학파 중 하나인 샤피이파를 세우게 될 대학자 무함마드 이븐 이드리스 앗 샤피가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내었다. 796년 가자는 현지 아랍 부족들 간의 내분으로 파괴를 겪었지만 곧 회복되었고 9세기 페르시아인 지리학자 이스타크리는 '이곳이 히자즈 인들에게 있어 훌륭한 시장이었기에' 상인들이 부유해졌다고 기록하였다. 867년 익명의 기독교도 작가는 가자를 모든 것에 있어 풍족한 곳이라고 평하였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히자즈-시리아 대상 무역에 의한 것이었고, 아랍인들의 도래 이후 지중해 무역은 쇠락하고 항구는 사실상 방치되었다.

그리고 9세기 말엽 압바스 중앙 정부의 약화 함께 현지 아랍/베두인들의 내분과 도적화로 내륙 무역마저 불안정해지며 도시는 점진적인 쇠퇴에 들어갔다, 한편 943년에는 인도로부터 오렌지가 전래되었다. 977년 가자와 팔레스타인 일대는 쉬아 파티마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8년 후 가자에 당도한 아랍 지리가 알 무캇다시는 '사막 끝자락 이집트로 향하는 가도 상에 놓인 큰 도시로, 아름다운 모스크가 있으며 칼리파 우마르의 기념물 역시 볼 수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한편 1049년 가자에선 아랍 시인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 알 가지가 출생하였다.


3.4. 십자군 시대[편집]



파일:가자 모스크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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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기 성 요한 성당으로 전환되었던 가자 대사원
1917년 영국군의 포격 후의 내부 고딕 건축
11세기 들어 안정을 회복한 가자는 곧 파티마 조의 쇠퇴와 함께 십자군의 침공에 직면하였다. 1099년 자파와 예루살렘을 점령한 1차 십자군은 1100년 하이파, 아르수프와 함께 가자를 점령하였다. 12세기 중엽 예루살렘 왕국보두앵 3세는 팔레스타인 해안에서 유일하게 파티마령으로 남아있던 아슈켈론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며, 가자를 공격 준비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 무렵 가자 대사원은 성 요한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1149년 보두앵은 가자에 성채를 세우고 템플 기사단에게 하사하며 이집트 방면의 원군을 자단하게 하였다.

그러한 노력으로 아슈켈론은 1153년 함락되었고, 그후 가자 남쪽 다론에도 템플기사단 성채가 세워졌다. 한편 1169년 이집트의 실권자로 등극한 살라흐 앗 딘 유수프는 1170년 12월, 다론을 포위하였다. 이에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가 참십자가를 대동하고 구원에 나서며 비서 밀레 드 플랑시에게 가자를 맡기고 다론으로 항하였는데, 살라흐 앗 딘은 이를 우회하여 수비대가 거의 없던 가자를 손쉽게 점령하였다. 다만 시타델은 버텨내었고, 보두앵이 회군해오자 살라흐 앗 딘은 네게스 사막을 건너 이집트로 철수하였다.

1177년, 이젠 이집트와 시리아를 망라하는 술탄에 오른 살라흐 앗 딘은 2만 대군을 거느리고 아슈켈론을 공격하였다. 이때 각지의 분견대가 파견되었고, 가자 역시 포위에 놓였다. 그러나 보두앵 4세르노 드 샤티용이 원군을 이끌고 와 몽지스가르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을 격파하며 무슬림 군대는 철수한다. 10년 후인 1187년 여름, 하틴 전투에서 완벽한 복수에 성공한 살라흐 앗 딘은 아크레-시돈-베이루트를 점령한 후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였다. 9월 4일 아슈켈론의 항복을 받아낸 살라흐 앗 딘은 가자에 대해선 포로로 사로잡은 템플기사단장 제라르의 석방 조건으로 가자 수비대를 항복시키는 것을 제시하였다. 제라르는 이를 이행한 후 석방되었고, 가자는 87년만에 이슬람령이 되었다. 다만 1191년 3차 십자군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살라흐 앗 딘은 야파, 아슈켈론, 카이사레아와 함께 가자의 성벽을 파괴하게 하였다. 이듬해 5월 십자군의 리처드 1세는 파괴되지 않고 수비대가 배치된 다론 성채를 함락한 후 가자를 재차 요새화하였다. 다만 이듬해 휴전 조약에 의거하여 가자의 성벽은 재차 파괴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의 영토로 확인되었다.

3.4.1. 이집트-시리아의 각축장[편집]


1239년 11월, 귀족 십자군이 아슈켈론을 재차 요새화하자 이집트의 술탄 알 아딜 2세는 가자에 루큰 앗 딘 바이바르스 알 하이자위를 파견해 수비를 맡겼다. 알 하이자위가 고작 1천의 병력만을 지녔다는 소문에 혈기에 사로잡힌 일단의 십자군이 진군하였다. 그들은 가자 외곽의 베이트 하눈에서 알 하이자위의 기습을 받아 괴멸되었다. 그럼에도 아이유브 왕공들 간의 분쟁을 이용해 이듬해 십자군은 다마스쿠스 아미르 이스마일로부터 나사렛-예루살렘 일대와 함께 가자 할양 약속을 받아내기도 하였다.[7] 한편 이 무렵 기존 도심 동쪽엔 베이트 하눈에서 '순교'한 장군 슈자 앗 딘 우스만 알 쿠르디를 기리는 슈자이아 지구가 설립된다. 이는 상업-주거 구역이었고, 허름한 저택과 좁은 비포장길들로 구성되었다. 그 북쪽 알 주바이다 혹은 슈자이아 알 아크라드에는 모술 출신 쿠르드인, 남쪽 앗 투르쿠만에는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치세에 정착한 튀르크인들이 집단 거주하였다. 성밖에 입지한 슈자이아 (쉐하이야) 지구는 후에 크게 발전하여 가자에서 가장 번성한 구역이 되었다.

1241년 5월 이집트의 술탄 아이유브 휘하 카말 앗 딘이 출정하여 가자를 수복하였고, 이에 이스마일이 이집트 공격을 위해 가자로 진군하였으나, 술탄의 본군과 마주한 무슬림 병사들이 이탈하며 원정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아이유브는 반격에 나서려 하였으나 이듬해 8월 카말 앗 딘이 가자에서 병사하며 무산되었다. 1243년 이스마일은 재차 십자군과 가자로 진군했으나 곧 회군하였다. 다만 가자는 다시 이스마일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다. 1243년 이스마일과 시리아 영주들은 다마스쿠스, 가자에 군대를 집결하여 이집트를 침공하려 하였다. 그때 아이유브가 불러들인 호라즘 인들이 시리아를 침공하자 원정은 다시 무산되었다. 1244년 이스마일은 또다시 십자군과 함께 가자 방면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아이유브는 호라즘 군단과 북상하였고, 아슈켈론과 가자 사이에서 벌어진 라 포르비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승전 후 호라즘 인들은 가자에 당도하여 아이유브에게 이집트의 영지를 청하나, 그들의 약탈을 우려한 아이유브가 거절하며 양측의 협력은 종결되었다. 다만 이듬해 아이유브의 재상 무인 앗 딘이 출정하였을 때에 그는 가자에서 일단의 호라즘 인들과 합류하였고, 함께 다마스쿠스를 포위해 점령하였다. 그리고 1247년 아이유브 휘하의 파크르 앗 딘이 아슈켈론을 점령하며 가자에 대한 북방의 위협은 종식되었고, 도시는 확고히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다. 다만 아이유브가 이룩한 안정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1250년 그의 사망과 함께 이집트에는 맘루크들이 득세하였다. 그리고 시리아 대부분을 수중에 넣은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와 상호 경쟁에 나섰다.

1250년 8월 유수프의 남하에 아이바크는 루큰 앗 딘 카스투르크 알 카비르 휘하의 병력을 파견했으나 그들은 가자에서 유수프가 보낸 선발대와 마주하자 도주해버렸다. 다만 유수프의 와병으로 그의 진군은 지연되었다. 그러자 10월에는 파리스 앗 딘 휘하 2천 정예병이 출정하였고, 가자에 배치된 유수프의 선발대를 기습해 격파하였다. 패잔병의 행렬은 다마스쿠스에 닿았고, 파리스 앗 딘은 추격하지 않고 카이로로 개선하였다. 건강을 회복한 유수프는 재차 출정하여 12월 28일 가자에 당도하였으나, 이듬해 2월의 압바사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났다. 기세를 얻은 아이바크는 루이 9세의 십자군과 연합해 시리아 공격에 나섰고, 1252년 봄 양측의 합류를 위해 파리스 앗 딘의 1천 선발대가 가자로 파견되었다. 이에 시리아군 역시 인근 텔 알 아줄에 파견되었으나, 양측 모두 십자군 앞에서의 충돌을 삼갔다. 그리고 1253년 압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심의 중재로 화의가 맺어졌고, 가자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남부는 이집트령이 되었다. 가자에서 회군한 유수프는 십자군 영토를 습격하며 분을 풀었다.

3.4.2. 정권 교체의 혼란[편집]


1254년 아이바크는 경쟁자 파리스 앗 딘을 제거하고 술탄에 오르며 맘루크 왕조를 세웠다. 이에 반발한 바흐리 맘루크들 중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700인은 가자에 당도하여 유수프에 복속을 청하였다. 그러자 유수프는 직접 남하하고 가자에 환영단을 보내었으나, 바이바르스의 설득에도 이집트에 나서지 않았다. 1257년 아이바크의 암살 시에도 유수프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실망한 바이바르스는 휘하 맘루크들과 다마스쿠스를 떠났고, 예루살렘에 이어 가자를 약탈한 후 카라크의 우마르 휘하로 들어갔다.

그후에도 바이바르스는 가자를 종종 약탈하였고, 분노한 유수프는 1258년 말엽 2,000 기병대를 파견해 바이바르스의 600 기병대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8] 그후 바이바르스는 가자와 나블루스 일대를 장악하였고, 이에 유수프는 1259년 대군을 모아 그를 패배시킨 후 재차 복속시킨다. 하지만 1260년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에 유수프는 다시 유약한 모습을 보였고, 이에 실망한 나시리야 & 바흐리 맘루크는 바이바르스와 그를 암살하려 하나 실패하자 가자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일전에 유수프와 우마르 진영을 차례대로 이탈한 후, 1년째 가자에 머물던 쿠르드계 샤라주리야 맘루크들과 합류하였다.

가자에 모인 맘루크들은 유수프의 동생 앗 자히르 가지를 술탄으로 추대하였다. 한편 알레포 함락 소식을 들은 유수프는 가자에서 맘루크 술탄 쿠투즈와 합류하자는 아미르들의 조언에 따라 다마스쿠스를 포기하고 남하하였다. 폭풍과 도적단의 습격 등을 겪으며 고난의 행군을 이어간 끝에 유수프는 2월 가자에 당도하였고, 앗 자히르 가지는 사르카드 영지를 대가로 형과 화해하고 복속하였다. 그러나 패잔병들로부터 이미 몽골군 선발대가 나블루스에 남겨둔 수비대를 격파했다는 비보를 접한 유수프는 가자도 버리고 엘 아리쉬로 향하였다. 다만 맘루크들을 완전히 믿지 못한 유수프는 병력과 가족을 이집트로 보내고 자신은 알 카트야에 남았다. 2월 14일,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몽골 사령관 키토부카는 가자로 분견대를 파견하였고 이듬달 자신 역시 남하하였다. 가자로 돌아온 유수프는 다마스쿠스 시타델 병력의 반란을 유도하며 최후의 도박에 나섰지만 곧 다시 의지를 잃었고, 바이바르스는 이집트 측으로 이탈한다. 3-4월 몽골군 분견대가 가자를 약탈하자 유수프는 네게브 사막을 건너 요단강 유역으로 향했다가 키토부카에 항복한다.

3.4.3. 대몽골 & 대십자군 거점[편집]


1260년 5월부터 가자에는 바이다르 휘하의 몽골군이 주둔하였다. 반격에 나선 바이바르스는 7월 26일 몽골군을 축출하고 가자를 장악하였다. 다만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곧 가우르 지방으로 향하였다. 그후 대군과 가자에 당도한 쿠투즈는 잔여 호라즘 용병 등과 합류하였고, 바이바르스와 함께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때 활약한 맘루크 중 하나였던 아쿠쉬 알 바를리 알 아지지는 가자 일대 해안을 영지로 하사받았다.

그러나 곧 술탄위에 오른 바이바르스의 숙청에 직면하자 북상한 그는1261-62년에 알레포와 하란 등지에서 미래의 칼리파 알 하킴 1세를 옹립하는 등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도 한다. 한편 1263년 다른 제후인 카라크의 우마르 역시 훌라구로부터 보스라 ~ 가자의 영지 및 이집트 정복 지원 약속을 받은 혐의로 숙청되었다. 그후 가자는 바이바르스의 대십자군 원정 때에 거쳐가는 도시로 언급된다. 1265년 2월 9일 카이사레아 점령과 1266년 5월 사파드 점령 시에 지나갔다. 후자의 경우 바이바르스는 가자에서 칼라운 휘하 7천 병력을 홈스로 파견하였고, 그들은 이후 트리폴리를 기습한다.

1279년엔 칼라운 본인이 바이바르스의 후계자들을 폐위하고 술탄이 되었다. 이에 이듬해 다마스쿠스 총독 순쿠르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산자르 알 할라비 휘하 정규군에게 가자에서 패배하였다. 1281년 가을 몽골군이 재차 침공해오자 칼라운과 순쿠르는 화해하고 함께 2차 홈스 전투에 임하였다. 비록 초반 맘루크 군은 패퇴하고 그 잔병이 다마스쿠스, 사파드, 가자, 심지어 일부는 이집트에 닿았으나 순쿠르 병력의 분전으로 반격에 성공해 승리하였다.

1286년 여름, 시리아 순행에 나선 칼라운은 10월 5일까지 가자에 장기 주둔하였고 카라크를 들른 후 15일만에 다시 가자로 돌아왔다. 11월 4일 부관 키토부카 알 만수리가 합류하자 칼라운은 그와 카이로로 귀환하였다. 1289년 트리폴리를 함락한 칼라운은 이듬해 아크레 원정 준비 중 사망하였고, 그를 계승한 칼릴은 1291년 3월 대군과 함께 출정하여 가자에 주둔하였다. 그곳에서 카라크의 아미르 바이바르스 알 만수리와 합류한 칼릴은 4월 초엽 가자를 떠나 아크레를 포위하였고, 격전 끝에 함락시키며 십자군을 일소하였다.


3.5. 맘루크 왕조[편집]



파일:가자 하맘 1.jpg

파일:가자 하맘.jpg

1320년 총독 알 자우리가 건설한 하맘 앗 사므라
5개의 하맘 중 현재까지 기능하는 유일한 목욕탕이다.

1260년부터 시작된 맘루크 지배기에 가자는 시리아로 향하는 이집트의 관문이었다. 1277년 맘루크 조는 가자를 주도로 한 동명의 주를 세웠고, 이 맘라카트 가자는 라파에서 카이사레아 해안과 헤브론 산지에 이르는 내륙을 관장하였다. 가자 외의 주요 도시로 룻, 라믈라가 있었다. 1294년 가자는 대지진을 겪으며 파괴되었다. 같은해 가자를 중심으로 술탄 알 아딜 키트부가에 대한 음모가 있었으나 실행 전에 발각되어 진압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1299년 말엽 시리아를 침공한 일 칸국의 가잔 칸은 3차 홈스 전투에서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맘루크 군을 격파하였다. 다만 외침에 직면한 가잔 칸은 이듬해 초엽 물라이 휘하 1만 병력을 두고 회군하였다. 1300년 물라이 역시 팔레스타인 일대를 약탈한 후 회군하였고, 이로써 대지진 후 맘루크 당국에 의해 복구된 가자는 다시 파괴되었다. 그 직전에 방문한 시리아인 지리가 앗 디마슈키는 가자를 '나무가 풍성하여 꼭 땅에 융단을 깔아 놓은 것 같아 보이는 도시'라고 묘사하였다. 1302년 레반트 최후의 십자군 요새인 루아드가 함락되고 이듬해 마르즈 앗 사파르 전투에서 맘루크 군이 몽골군에 대승을 거두며 가자에 대한 몽골-십자군의 위협 역시 종식되었다.

1307년 가자의 총독 (나이브)로 부임한 바이바르스 알 알라이는 전란으로 폐허 상태이던 기존 십자군 성채를 재건하였고, 가자 대사원을 보수하였다. 후자엔 그의 공적을 기리는 대리석판이 남아있다. 그는 1309년 바이바르스 2세의 쿠데타 직후 해임되었으나 이듬해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복위를 도와 홈스 총독으로 봉해졌다. 앗 나시르의 복위 시에 가자는 그를 지지한 도시들 중 하나였고, 1310년 그곳에서 앗 나시르는 바이바르스 2세를 격파하였다. 사로잡힌 바이바르스 2세는 가자에 감금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앗 나시르의 복위 후 그는 바이바르스 2세의 친구였음에도 자신의 편에 선 아미르 산자르 알 자울리를 카라크에 이어 1311년 말엽 가자의 총독 겸 두 성지 (알 아크사와 헤브론)의 관리자로 봉하였다. 1311 ~ 1320년과 1342년 총독을 지낸 아미르 산잘 알 자울리의 시기에 가자는 번영하는 무역도시로 변모하였고, 현존하는 맘루크 시기 건축물 대부분이 그의 부임기에 연혁을 둔다. 맘루크 역사가 알 마크리지에 의하면 그는 가자에 많은 건축물을 지었고, 대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성채, 마리스탄 (병원), 시장, 칸 (카라반사라이), 마드라사, 모스크, 하맘 (목욕탕), 그리고 경마장 등이 세워졌고 십자군-아이유브기에 상대적으로 괄시되었던 도시는 번영하는 주요 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공적으로는 다마스쿠스 주에 속한 가자의 총독이 지나친 권력을 지닌 것은 다마스쿠스 총독 텐키즈 알 후사미의 견제로 이어졌고, 1320년 그들은 한 저택 매각 문제로 충돌하였다. 이에 대해 술탄 앗 나시르가 텐키즈의 손을 들어주며 알 자울리는 부패와 권력 남용 혐의로 8년간 감금되었고, 1329년에야 석방되었다. 한편 1332년 말엽 아미르 타이날 알 아슈라피의 부임과 함께 반포된 술탄의 칙령에 따라 가자 총독은 다마스쿠스 총독 대신 카이로의 술탄에 직접 귀속되는 등의 특권을 잃었다.

1340년 텐키즈, 이듬해 앗 나시르의 사후 1341/2년 알 자울리는 후임 술탄 앗 살리흐 이스마일에 의해 재차 가자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3개월만에 해임되었다. 1348년 흑사병의 창궐로 가자는 주민 대다수를 잃었고, 1352년에는 (메마른 팔레스타인에선 드문) 대홍수를 겪었다. 그럼에도 1355년 가자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도시가 넓고 인구가 많았으며, 많은 모스크가 있었지만 (주변을 두른) 성벽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유서깊은 대사원은 현재 아미르 자울리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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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동부에 위치한 앗 다파르 다므리 모스크[9]

1380년대 초반 가자 총독 아크부가 사파위는 술탄 바르쿠크에 대한 역모를 꾸몄다. 하지만 이는 발각되어 사파위는 카라크로 유배되었고, 후삼 앗 딘 이븐 바키쉬가 가자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얼마안가 가자는 반란을 일으킨 얄부가 앗 나시리에게 무혈 점령되었고, 후삼 앗 딘은 성문에서 선물을 대동한 채 그와 만나 평화를 제의하였다. 1389년 복위한 바르쿠크는 이듬해 가자를 회복하였다. 1401년 메뚜기떼가 창궐해 가자 일대의 농지를 파괴하였다.

15세기 반란을 일으킨 칸수와 캄시야는 경쟁 아미르 아크비르디에게 패배한 후 가자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였으나 패하고 죽었다. 1428 ~ 1433년 가자 총독을 맡은 아미르 사이프 앗 딘 이날은 20년 후 술탄으로 등극하였다. 1455년 그의 다와다르 (비서실장)는 슈자이야 구역에 비르다크 마드라사를 건설하였다. 그밖에 맘루크 시기에 슈자이아 구역에는 14세기에 세워진 이븐 우스만 모스크, 앗 자쿠르디므리 모스크와 15세기의 마흐카마 모스크 등 많은 사원들이 세워졌고 점차 기존 도심과 함께 광역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파일:가자 시장.jpg


파일:가자 시장 1.jpg

1476년 셰이크 샴스 앗 딘 알 힘시에 의해 건설된 가자 금 시장 (키사리야 시장)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자 전투 당시 크게 파괴되었다.

3.6. 오스만 제국[편집]


1516년, 버려진 항구를 지닌 작은 도시로 전락해 있던 가자는 다른 시리아 지역과 함께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현지인들은 대체적으로 안정을 가져온 오스만 조를 환영하였고, 그 치하에서 팔레스타인은 다마스쿠스 에얄레트 하의 6개 산작들로 분할되었다. 그중 가자 산작은 자파 ~ 라파의 해안과 베이트 지브린까지의 내륙을 관장하였다.

1524 ~ 1550년까지의 산작베이는 예니체리 장교 출신으로 쉴레이만 1세의 내각에서 와지르까지 역임한 카라 샤힌 무스파타였는데, 이집트 총독에 봉해지기 전에 우선 맡은 것이었다. 다만 그는 이집트 총독을 맡은지 3년만에 셀림 2세에 의해 해임되었으며, 얼마 후 사망하였다. 예멘의 재무관을 지내다 무스타파의 이집트 전임 후 가자를 맡은 그의 아들 리드완 파샤의 시대부터 가자 산작은 점점 자치 공국이 되어갔다.


3.6.1. 리드완 가문[편집]



파일:가자 카스르 파샤.jpg

13세기 바이바르스[10]가 세운 건물을 17세기 아흐마드 파샤가 증축한 카스르 파샤
1799년 나폴레옹이 3일간 묵기도 하였다.[11]

리드완 파샤는 후에 예멘 총독에 올랐으나 2년 후 해임되자 기존 임지로 복귀하였다. 그후 에티오피아, 바스라, 디야르바크르 총독을 거친 그는 1579년 사파비 제국 원정 당시 성공적으로 군단을 지휘하였다. 상으로 아나톨리아 주에 봉해진 리드완 파샤는 1585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아흐마드 파샤가 가자 산작베이 직을 계승했으며, 가자는 한세기간 이어진 리드완 '왕조'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인구는 약 6,000명이었다. 아흐마드 파샤는 나블루스 혹은 예루살렘 산작을 병합하는 등 30여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1601년 그는 코스탄티니예의 여러 와지르 및 관료들에 로비한 결과 다마스쿠스 총독에 올랐고, 1607년 사망하였다. 그를 계승한 아들 하산 파샤는 '아랍 하산'이라 불렸는데, 17세기에 이르면 리드완 가문은 이미 베두인들을 장악하고 또 그들과 친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친오스만 베두인 군대를 이끌고 제국의 반기를 든 파크르 앗 딘 2세에 대한 원정에 종군하였고, 이때의 공적으로 트리폴리 총독에 봉해졌지만 1644년 해임되었다. 많은 부인과 첩을 얻은 하산 파샤는 슬하여 85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는 군사적으로 리드완 가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많은 빚을 남기며 부담을 주었다.

하산 파샤의 후, 당시 나블루스와 예루살렘의 산작베이를 지내던 아들 후세인 파샤가 재정 위기에 처한 가자 산작베이에 올랐다. 그는 (한시적으로 가자 산작까지 포괄하던) 시돈 총독 하산 아가의 증세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빌렸다. 그럼에도 후세인 파샤의 재임기는 가자에 있어 평화로운 번영기였고, 그는 정주민들과 근교 베두인 간의 갈등을 크게 줄였기에 좋은 명성을 얻었다. 도시의 빠른 회복을 상징하듯,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지목된 가자에선 대사원이 보수되었고 그외에 6개의 모스크가 신설되었으며 터키탕 (하맘)과 시장 좌판들이 확산되었다. 1660년 후세인 파샤는 아들 이브라힘을 가자와 예루살렘 산작베이로 임명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이듬해 이브라힘이 레바논 산지의 드루즈 토벌에 투입되었다가 전사하자 재집권하였다. 그러나 1662년 후세인 파샤의 핫즈 카라반 보호 실패 및 친기독교 경향을 불평하는 다마스쿠스발 익명 청원이 접수되자 포르테 (오스만 조정)은 이를 핑계로 그를 해임하였다. 후세인 파샤는 곧 다마스쿠스에 감금되었고, 그의 자산들은 에얄레트 관료들에 의해 압수되었다. 그후 코스탄티니예로 이송된 그는 1663년 옥사하였다. 뒤이어 가자의 산작베이에 오른 동생 무사 파샤는 포르테의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프랑스, 반기독교 정책을 폈다. 한편 부임 직후 무사 파샤는 대사원의 보수를 지시하고 자신의 이름을 미흐랍 표면에 새겼다. 그의 부임기에 가자는 여전히 번영했지만, 이는 전임자인 후세인 파샤의 덕이었다. 1679년 무사의 죽음 후 가자의 경제와 정치적 지위는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19세기 초에 이르면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다. 1690년 무사의 아들 아흐마드 파샤 2세의 죽음과 함께 리드완 가문의 가자 지배는 종식되었다. 리드완 조는 팔레스타인 남부를 통합한 첫 자치 국가로, 한세기 후 북부를 통합한 자히르 알 우마르와 비교된다.

3.6.2. 근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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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의 삽화

1723년 포르테는 나블루스 기반 투칸 가문의 살리흐 파샤 투칸을 가자와 다른 두 지역의 산작베이로 봉하였다. 그는 1742년 사망 시까지 맡은 산작들을 다스렸다. 1743년 다마스쿠스 총독 쉴레이만 파샤는 예루살렘, 트리폴리와 가자의 병력까지 더하여 갈릴리의 군벌 자히르 알 우마르 토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던 1757년 말엽 현지 베두인 부족들이 메카 순례 카라반을 습격, 수천을 살상하고 낙타에 운반하던 1만 3천여 점의 물품들을 약탈해 가자의 시장에 가져왔다. 이로써 도시의 부는 일시적으로 크게 치솟았다.

비슷한 시기 자히르 알 우마르의 세력 확장과 함께 1763년 가자 주민들은 대오스만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1766년에는 이집트에서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맘루크 알리 베이 알 카비르가 가자로 피신해 오기도 하였다. 이때 다마스쿠스 총독 우스만 파샤는 그의 축출을 명하였고, 이로써 알리 베이와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1770년 11월, 알리 베이는 우스만 파샤에 맞서는 자히르를 돕기 위해 가자에 2만 대군을 파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771년 자히르는 우스만 파샤를 격파, 사실상 독립을 쟁취하고 가자에서 시돈에 이르는 해안을 장악하였으나 4년 후 토벌당하였다.

1799년, 이집트 원정 중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던 나폴레옹은 가자를 지나며 '아프리카의 교두보, 아시아로의 관문'이라 지칭하였다. 프랑스 군대가 다가오자 주민 대부분은 도주하였고, 나폴레옹은 손쉽게 잔존하는 도시 성벽[12]을 철거하였다. 다만 같은해 아크레 공방전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며 도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1832년 이집트의 메흐메트 알리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후 가자 역시 그 지배 하에 놓였다. 이듬해 메흐메트 알리는 아들 이브라힘 파샤에게 가자의 목화[13] 수확물을 구매하지 말고, 주민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처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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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경의 사진

1838년 미국 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이 가자를 방문, 인구 밀도가 높으며 예루살렘보다 큰 도시라고 기록하였다. 가자의 구도심은 언덕 위에 놓여 있으며, 그 교외 지역은 주변 평지에 위치하였다. 또한 그는 가자의 토양이 기름져 살구 & 오디와 같은 맛있고 풍족한 과실수들을 길러낸다며, 비록 항구는 비활성화 되었지만 도시는 이집트-시리아간 카라반 노선에 입지한 덕에 무역과 상업 및 베두인과의 교역을 위한 비누 & 목화 생산으로 이익을 보았다고 평하였다. 마지막으로 로빈슨은 지속적인 갈등과 점령으로 거의 모든 고대사와 고전기의 자취들이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당시 산작베이는 셰이크 사이드였고, 인구는 약 1만 5천명이었다.

1839년 흑사병의 재발과 정치, 경제적 안정의 부족으로 가자는 쇠퇴하였다. 1840년에는 이집트 군과 오스만 군이 도시 외곽에서 전투를 벌였고,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며 메흐메트 알리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막을 내렸다. 역병 직후 겨우 회복 중이던 가자는 양측의 전투로 더 많은 인명손실과 파괴를 겪었다. 한편 레반트 해안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과 함께 1865년 성 포르피리오스 성당이 보수되었고 1876년 프랑스인 오리엔탈리스트 샤를 클레르몽-가뉴가 가자를 방문해 상당 규모의 동로마 명문들을 모아 도록화하였고 대사원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3.7. 근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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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가자에 주둔한 영국군

1893년 술탄 압뒬하미트 2세는 가자의 우물들을 복구해주었고, 같은해 가자에는 알리 칼릴 샤와 의장 하의 첫 지역 의회가 설립되었다. 1906년 그의 아들 사이드 앗 샤와는 오스만 당국에 의해 가자의 첫 근대적인 시장으로 임명되었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가자는 경제 & 정치적으로 샤와 / 후세이니 / 수라니와 같은 몇몇 강력한 가문들의 수중에 있었다. 1903년과 1914년 도시는 파괴적인 지진을 겪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이집트의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기 위해 가자를 공격하였으나 2만 오스만-독일 군의 우주방어에 번번히 격퇴되었다. 1917년 봄의 1, 2차 전투 후에 가자-베르셰바 전선이 동쪽에서 뚫리며 병력이 5,000으로 줄어든 오스만 군은 3차 전투 중인 11월 7일 가자에서 철수하였다. 이렇듯 영국군은 5,000에 달하는 많은 희생을 치르며 3번의 시도 끝에야 가자를 점령하고 예루살렘 전여에 나설 수 있었다. 당시의 포격으로 가자 시가지는 크게 파괴되었으며, 대사원과 전통 시장 등 여러 중세 건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영국의 위임통치기에 더 많은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유입되며 아랍-유대 갈등이 폭발하였다. 1929년 팔레스타인 봉기 시에 가자의 유대인 구역은 파괴되었고, 50여 가구의 유대인들 중 대부분이 떠나갔다. 1930년대와 40년대 가자는 리말, 제이툰 등 구역들의 신설로 확장되었고 봉기 중 파괴된 지역들이 국제 단체 및 선교단의 자금 지원으로 복구되었다. 가자는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당시 팔레스타인의 아랍계 정부인 범 팔레스타인 정부의 소재지이었다.[14] 이후 범 팔레스타인 정부는 사실상 이집트의 괴뢰국으로 전락하였다.

1959년부터는 이집트가 범 팔레스타인 정부를 해체하고 아예 직접 지배하기도 하였다. 제3차 중동전쟁의 결과로 1967년부터 이스라엘이 지배하였고 봉기 끝에 1993년 자치가 승인되었다. 1980년대초 이래, 가자 지구에도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되어 한때는 21개나 되었지만, 2004년아리엘 샤론 총리가 가자 지구의 정착촌을 모두 철수시키겠다는 구상을 발표했고, 그 이듬해 유대인 정착민 8,000여 명을 이스라엘로 모두 철수시켰다. 그러나 지금도 이스라엘의 통제 때문에 장벽이 설치되고 바닷길이 막히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가자 지구에는 물과 지원을 포함한 어떠한 물자도 못들어간다.[15] 이집트 역시 테러분자 단속과 하마스 견제를 이유로 국경을 열어주지 않아 사실상 봉쇄하고 있다.[16]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또한 재정난과 하마스와의 갈등 때문에 제대로 된 지원을 못하는 처지다. 이때문에 가자 지구는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으며 인세지옥이라 할만큼 매우 열악해 국제기구들의 원조에 의지하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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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010년 5월 튀르키예 국적의 국제구호선이 가자 지구로 들어가려는 것을 이스라엘군이 공격했던 사건은, 이 과정에서 튀르키예인 8명과 미국인 1명이 사망하면서 튀르키예가 이스라엘과 단교하고 이스라엘 대사를 추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워낙에 튀르키예와의 관계가 이스라엘에 중요하기 때문에 사과하고 관계회복을 꾀하고 있지만, 튀르키예에서 반이스라엘 감정이 심하고 튀르키예 대통령 에르도안부터가 반이스라엘 성향이기 때문에 튀르키예가 이스라엘을 보는 감정은 매우 좋지 않다. 레바논이나 프랑스 등의 구호선들도 접근할 때마다 이어지는 구호선 나포와 공격, 국제인권단체 운동가 추방 등은 2010년대에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UN도 예외가 아니라서 가자 지구의 UN 시설을 파괴하고 구호물품 트럭들도 박살내서 UN이 가자 지구 구호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 점에서 UN에서 심한 비난을 받았으나 미국의 비호로 무사했다.

4. 현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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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지구는 하마스에 대한 지지도가 높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마스의 통치 능력이 유능해서는 아니다. 이스라엘의 봉쇄를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이집트와의 경제교류도 활발하지 못해서 대부분의 경제활동을 땅굴을 통한 밀무역망과 국제원조기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란이나 아프간급 수준은 아니더라도 간간히 히잡착용을 강제하려 들거나 학교내 두발단속을 하려드는 등 꼰대기질을 발휘할 때도 있기도 하고, 세금도 비교적 높다. 그래서 가자 주민들 사이에서도 하마스에 대한 불만은 많아서 하마스를 무능하다며 욕하기도 하고 2023년 7~8월에는 전기와 가스 공급을 제대로 못하다면서 하마스에 대한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17] 다만 파타가 무능하게 당해주는 호구 이미지가 위낙에 강하고, 하마스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꾸준히 시전하곤 하기 때문에 파타보다는 하마스가 더 낫다고 생각해서 하마스에 대한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것이다.

즉, 가자주민 입장에서는 하마스가 예뻐서가 아니라, 어차피 총질 당하고 봉쇄 당하는 것은 똑같으니 차라리 사이다성 공격을 해주기라도 하는 하마스를 지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가자 지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여 하마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대신 사실상 정부 역할을 하며 통치력까지 행사하고 있다.[18]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파타를 제치고 선거에서 승리했는데 파타에서 하마스의 선거승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선거결과에 불복했고,[19] 이스라엘 역시 하마스의 선거 승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무효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파타가 서안지구를 차지하고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차지하는 이중권력 상태가 되었고, 이스라엘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선거에서 승리한 하마스가 아니라 파타 주도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국제적으로 인정하면서 하마스는 정식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20] 이후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 대해서는 정착촌을 철수시키고[21] 완전한 봉쇄와 소거로 가닥을 잡으면서 이후 이스라엘과 군사적인 충돌이 빚어지고 있다.

2008년 12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1차 가자 전쟁),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2차 가자 전쟁),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3차 가자 전쟁)이 일어났다. 지속적인 국지전과 이스라엘의 폭격과 하마스의 맞대응은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가자 지구엔 하마스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무장단체들이 10여개나 넘게 있다. 이 무장단체들은 하마스와 대립하고 견제하면서도 반유대주의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으로 서로 협력은 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군이 쳐들어올 때는 같이 협력해서 싸운다. 이때문에 이스라엘 정부는 항상 가자 지구를 감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시나이 반도 일대의 다에쉬들이 가자 지구에 확장을 시도하면서, 하마스는 이스라엘과도 군사적 협력을 맺었다.[22] 다에쉬들은 하마스의 민족주의 성향을 문제 삼으며[23] 하마스 역시 전복시켜야 마땅한 사탄의 세속 정부로 규정하고 있으며 하마스와 적대적인 관계이다.

UN무역개발회의가 2015년 9월 1일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가자 지구의 상황이 계속 악화되면 2020년에는 사람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 물론 이게 모두 가자 지구의 하마스와 무장단체들을 말려 죽이려는 이스라엘 정부의 의도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시 수자원 고갈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하레디 인구만 폭증하는 문제로 미래가 마냥 장밋빛은 아니라서 가자 지구를 함부로 할 여력은 안 되는게 함정.[24] 최근에는 이스라엘도 가자 지구와의 대립이 지겨워서 하마스가 운영하는 특정 해안 지대까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나갈 수 있도록 어획 구간을 확장하는 회유책을 썼다.[25] 하지만 이 회유책도 잠시에 불과하여 2016년 5월에 이스라엘이 휴전협정을 깨고 다시 공습을 시작했다. 탱크와 포병을 동원한 포격도 시작되어 가자 지구의 하마스와 무장세력들이 단합해 이스라엘군과 교전이 시작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2014년에 벌어진 가자전쟁과 달리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는 않고 있다.

2017년에는 하마스 지휘관 마젠 파크하가 암살되자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소행이라며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 간의 국경을 무기한 폐쇄하면서 긴장이 다시 감돌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계속된 가자 지구 봉쇄로 가자 지구의 삶이 날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 자치정부 역시 하마스와의 갈등으로 가자 지구에 해주던 지원을 축소하겠다고 하여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전문가들은 이 상태가 지속되면 다시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11월 18일에 하마스 측이 자치정부에 가자 지구의 통치권을 넘겨주면서 이집트에서 그동안 해왔던 봉쇄를 해제하고 가자 지구의 국경을 개방하였다.# 2019년 11월에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22명을 사망하였다.# 20명은 무장된 사람이고, 2명은 시민이었다. 11월 12일에는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무장단체 이슬람 지하드의 고위 지휘관을 공습으로 사살하자 이슬람 지하드가 보복으로 로켓포 150발을 쏘았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인 여러명이 부상당했으며 텔아비브에서는 경보 사이렌이 울려 휴교령이 내렸다.# 2020년 2월 1일에도 이스라엘군이 하마스 공습 위해 가자 지구를 공격했다.# 24일에는 2일 연속 충돌 중이다.# 2021년 2월 9일에 이집트 정부는 파타와 하마스간의 화해를 주선하기 위해 가자지구 국경을 개방했다.#

2021년 5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무력충돌이 발생하면서 9일에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지구에서 인화물질이 있는 풍선들을 보낸것에 대한 조치로 가자지구의 어업구역을 폐쇄했다.# 10일부터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공습해 197명이 숨지고 1,235명이 부상했다.# 2021년 6월 22일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지구에 대한 산업용 원자재 반입을 금지시켰다. 다만 식량과 연료, 의약품 반입은 허용했고 가자지구에서 생산된 농산품과 섬유 등의 수출도 허용했다. 이에 하마스는 반발하며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통제를 강화하면 저항하겠다고 밝혔다.#

2021년 7월 2일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가 이스라엘로 방화용 풍선폭탄을 보낸것에 대한 보복으로 가자지구의 하마스 무기제조 시설을 공습했다. 하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스라엘인들 대다수는 가자 지구 주민과 하마스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하다. 가자 지구 주민들 역시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대놓고 한국 사람 앞에서 가자 지구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은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얘기를 오래 해보면 은연 중에 경멸감, 공포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나온다.[26]

2022년 8월 5일 이스라엘군이 가자 지구를 공습해 10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2023년 7월 14일부터 가자 지구에 여행금지가 발령되었다.

2023년 10월 7일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생했다.

5. 가자 지구 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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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와 비슷한데, 요르단과 비슷한 서안지구, 동예루살렘과는 대조적이다. 이 지역은 건물들의 상태가 좋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허구한날 폭탄이 터지기 때문이다.[2] 레반트 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보면 평균적으로 1~2% 정도, 최소 0.1% 및 최대 10%의 기독교도 비율이 나오기 마련이다.[3] 고대 가자의 그리스 주민들은 아폴로를 도시의 주신으로 삼았다.[4] 절망한 몇몇 주민들은 노예가 되지 않도록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약탈을 막기 위해 집을 불태우기도 하였다.[5] 다마스쿠스 우마이야 사원과 마찬가지로 다신교 사원, 기독교 성당, 이슬람 사원의 과정을 거쳤다.[6] 이는 아직 이슬람 군대가 공성전에 미숙했던 탓도 있다[7] 다만 그 영토들은 이스마일 수중에 있지 않았기에 명목상에 그쳤다.[8] 600 중 400은 베두인 부대. 유수프의 군대가 승기를 잡았으나 바이바르스 휘하 70여 정예 병력이 끝까지 버티고 반격해 승리함[9] 1360년 아미르 시하브 앗 딘 아흐마드 빈 아자피르 앗 다파르 다므르가 건설하였다.[10] 현지 전설에 의하면 술탄이 되기 전 맘루크로써 팔레스타인을 떠돌던 바이바르스가 가자에서 현지 여성과 결혼하고 세운 신혼집이었다고 한다. 다만 당시에는 1층 건물이었으나 오스만 제국기에 2층으로 증축된 것.[11] 성벽이 없던 가자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성채라 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폴레옹 요새로 불린다.[12] 1191년 살라딘의 파괴 후 제대로 복구되지 않음[13] 메흐메트 알리의 주요 수익원이었는데, 그해 이집트의 생산량이 적었다[14] 요르단강 서안 지구는 전쟁 당시 요르단이 자국 영토로 합병했기 때문이다. 당시 요르단 국왕 압둘라 1세는 팔레스타인을 자국 영토로 보았지 독립국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15] 사실 그 이전에도 이스라엘에서 가자를 봉쇄했고 물자가 들어간다해도 유대인 정착촌에만 갔지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제대로 가지도 않았다. 전기만 해도 봉쇄 이전에 유대인 정착촌은 항상 전기가 들어왔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루에 8시간밖에 못쓸만큼 부족했다.[16] 현지인에게는 40일에 3~5일 꼴로 불규칙하게 열어주며 이스라엘처럼 물자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이집트와의 무역길도 막막해서 가자 지구 주민들은 비밀 땅굴을 파서 그 통로로 밀무역을 하는 처지다. 게다가 이집트 국경 너머 시나이 반도는 IS의 활동으로 인해 이집트 정부가 토벌에 나서면서 시나이 반도의 무장단체들과 이집트 군경과의 교전이 흔하게 벌어지고 있어 가자 지구보다 더 위험한 지역이며, 이로 인해 국경 개방 일수도 줄어들고 있다. 이스라엘인을 제외한 외국인은 상시 출입이 가능하지만 이집트-팔레스타인 양측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으며 2000년 이후부터 관광 목적으로는 허가가 나지 않는다. 다만 이집트는 같은 아랍권이라 이스라엘측보다는 통과가 쉽다보니 구호 단체나 기자들은 이곳으로 들어간다.[17] 이것이 2023년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기도 했다. 안 그래도 아랍권 국가 상당수가 이스라엘과 수교를 맺으려고 했던데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은 이어지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민심 이반까지 겹치니 하마스 측 입장에서도 가자 주민들의 민심을 달래고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긴장관계를 강화해야 될 이유가 있었고, 이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전형적인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려 결속을 강화'하는 전략이다. 다만 재미있게도 하마스 지도부는 민심수습용으로 전쟁을 일으키라는 생각을 했어도 작전에는 깊게 관여하지 않았고, 전투작전은 팔레스타인 이슬라믹 지하드(PIJ) 등의 가자지구 하부조직들이 주로 짜냈다. 굳이 이스라엘과 상관없는 외국인까지 인질로 삼고 살해하는 등 무슨 은행 강도나 ISIS, 탈레반 같은 모습을 선보인것도 실전에 있어서 베테랑이라도 정무감각과 외교감각은 전무한(...) 하부조직들이 짰기 때문에 일이 터진 결과라는것이다.(...) [18] 물론 지상만 통치력을 상실했지 하늘과 바다는 여전히 이스라엘이 지배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 지상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한 원인은, 이스라엘의 적은 인구와 장기전을 할 수 없는 빈약한 경제력과 동원력, 그리고 저 위의 사진처럼 공격하는 사람 토나오게 만들 정도로 빽빽하게 건설된 시가지들 때문이다.[19] 득표율 자체는 큰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지역구 선거에서는 하마스가 대승을 거두면서 하마스가 과반을 넘는 의석을 챙겼다.[20] 이때 이후로 팔레스타인에서 국회의원 선거는 무한 연기되었고, 지방선거만 치러지고 있는 실정이다.[21] 서안 지구는 그대로 있다.[22] 물론 IS만 해결되면 다시 총구를 겨눌 사이다.[23] 이는 다에시가 모든 이슬람 교도를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시키는 것이기에 민족주의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24] 그러다보니 가자 지구 현황을 발표한 이스라엘 군 정보부 대표도 가자 지구가 망해도 이스라엘한테 득될 것은 하나도 없다고 얘기할 정도다.[25] 하지만 그래봤자 6해리(약 11㎞)밖에 안될 정도로 좁다. 게다가 저 해역을 벗어나기만 하면 가차없이 총격을 가한다. 최근엔 다시 취소하고 3해리로 축소시켰다. 그러다보니 가자 지구의 어부들은 이스라엘 해군의 감시를 피해서 조업을 하는 것이 흔하며 들켜서 사살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26] 다만 해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경향이 훨씬 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