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공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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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論恐熱(?~866)[1], bLon Khrom brZhe
토번의 농서 대장. 보통 논공열이라고도 하나,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상공열로 기록되어 있다.

2. 생애[편집]


842년 토번 불교화와 재상정치에 큰힘을 쓴 치죽데첸이 죽고 그의 형 랑 데르마가 즉위함으로써 제33대 첸뽀인 송첸감포때부터 시작하여 제41대까지 진행된 토번의 불교화가 끝났다. 그러나 랑 데르마는 뵌교도로서 불교를 박해하고 토번의 토착교인 뵌교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 돈황을 점령한 상치싱얼도 죽고 상비비가 대상룬 자리에 오른 데 이어 대원수직을 상타상이 잡고 있는 등 상씨 가문의 권력이 막강한 상황이었으나 가르(mgar)씨 가문에서도 대상룬이 나오게 되는데, 이 인물이 가르공열이다. 이 상황에서 가르공열은 랑 데르마의 억불 정책을 반대하였고, 또한 이 시기 위구르 제국이 키르기스인들에게 멸망하자, 회흘인들은 하서[2], 안서, 북정 지역 등 각지로 이주한 상황이었던 데다가 토번 내부는 가르공열을 위시한 주전파, 상비비와 랑 데르마를 위시한 화친파 이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다투는 등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상타상이 친척인 상비비를 지지함에 따라 가르공열은 대패했고, 그는 자신을 따르는 상연상과 룬곤레 등을 데리고 하서 지방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세력을 구축했다. 그는 하서에 있던 회흘과 탕구트인 등을 통합하여 약 5~8만에 군사력을 자랑하는 세력을 이루었다.[3]

하서에 자신의 5만에서 8만 규모의 군대를 집결시키고 당으로 진격했다. 또한 자신의 적이었던 상비비에게 사신을 보내 당조 정벌에 참여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주화파였던 상비비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랑 데르마에게 상소하여 그의 직위를 박탈했다.

847년 하동 지방과 난주 등을 공격하여 난주를 빼앗았다. 이에 따라 당조는 토번과 연계하여 양면 공격을 펼치게 된다. 그러는 사이 그는 계속해서 당나라를 침공하여 연승하였다.

그러나 하동절도사 왕재가 사타족을 끌여들여 방어한 데 이어 상비비의 토번군이 하서를 공격함에 따라 철수한다.

851년 한때 당에 위탁하여 당선종에게 하위절도사로 삼을 것을 청하나 거절당하고 다시 당조를 배반하나, 866년 상비비의 수하 장수 탁발회광(拓跋怀光)에게 참살당하고 그 수급은 장안으로 보내지고 만다.[4]

3. 주요 영향[편집]


가르공열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나, 하서 지역에 있던 탕구트와 회흘인들이 세력화되었고, 이는 훗날 하서 지역이 중원의 영향력에서 떨어지게되고 하서 이민족들을 세력화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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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번 기록에는 848년 자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 오늘날 유고족들의 기원이 되는 민족들.[3] 본래 하서는 이 당시 토번 땅이였으나 군대를 주둔하거나 당나라에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기에 당조에는 딱히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전파 가르공열이 하서에서 중규모의 세력을 이루자 당조에 큰 위협이 되었고, 이에 따라 당조는 사타에 사신을 보내는등 방비를 철저히 하였다.[4] 토번 측 기록에는 848년 당조와 토번국의 연합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자결하였다고 나와 있다.[5] 851년 장의조가 토번으로부터 돈황을 수복하는 등 하서 지역을 되찾고, 하황을 되찾으나, 장의조 사후 하서 지역을 다시 회흘인들에게 빼앗기고, 하황은 토번에 의해 빼앗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