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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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의미
3. 설명
4. 출전
5. 유래


1. 개요[편집]


고사성어





무리



언어별 명칭
중국어
jiā tú sì bì
일본어
かとしへき(카토시헤키)


2. 의미[편집]


집 안에 세간살이는 하나도 없고 벽으로만 둘러 쌓여 있다.


3. 설명[편집]


'매우 가난하고 궁핍한 때'를 뜻한다. 동의어로 가도사벽(家徒四壁)이 있다.


4. 출전[편집]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5. 유래[편집]


한나라 때의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 ~ 기원전 117)가 아직 관직에 나서기 전 일화이다. 그는 글 쓰는 소질이 뛰어났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타는 사람이었으나, 매우 궁핍하여 스물 넘도록 결혼을 못 하고 있었다.

그는 쓰촨(사천, 四川) 성의 청두(성도, 成都) 출신인데, 오랜 고향 친구 왕길(王吉, ? ~ ?)이 딱하게 여겨 도와주려고 하였다. 이 때 사마상여는

도움은 고맙지만 내 처지가 가도벽립인데 무슨 수로 장가 갈 수 있겠는가?

라고 낙담하였다.

그러자 왕길은 꾀를 내어 린충(임공, 臨邛)의 부호 탁왕손(卓王孫, ? ~ ?)을 설득하여 사마상여를 자택으로 초대를 받게 하였다. 사마상여는 마침 남편과 사별하고 친정에 와서 지내던 탁왕손의 딸 탁문군(卓文君, 기원전 175 ~ 기원전 121)에게 첫 눈에 반해버렸고, 한 번에 사로잡을 생각으로 ‘봉구황(鳳求凰)’이라는 거문고 곡을 연주했다. 그녀 역시 그에게 반해 버렸으나, 정작 친정 아버지 탁왕손은 그가 너무 가난하다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였다.

그러자 탁문군은 사마상여를 따라 청두의 집으로 야반도주(夜半逃走)를 했다. 사마상여의 집은 너무 가난해 방 안에는 살림살이 하나 없이 사방으로 벽만 있었다. 그래도 탁문군은 그와 백년가약을 맺고 술집을 차려 생계를 꾸려 갔다.

나중에 한무제가 사마상여가 지은 시부를 읽고 크게 기뻐해 도성으로 불러 낭관으로 임명했다. 그 후 사마상여는 필명을 크게 떨치며 일세의 대문장가로 우뚝 섰고, 탁씨 집안에서도 더 이상 그를 깔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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