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3세(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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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팔츠 선제후로 칼뱅파로 개종하였으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해 독일 개신교 발전에 이바지했다.
2. 생애[편집]
독일왕을 지내기도 했던 루프레히트의 5남 지메른-츠바이브뤼켄 궁정백 슈테판(Stefan Pfalzgraf von Simmern-Zweibrücken 1385~1459)의 후손으로 팔츠지메른 궁정백 요한 2세(Johann II. von Simmern 1492~1557)와 바덴의 베아트릭스(Beatrix von Baden 1492~1535)의 맏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신자로 자랐다.
1537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통치하던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인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 카지미르[1] 의 딸 마리(Marie von Brandenburg-Kulmbach 1519~1567)와 혼인하면서, 마르틴 루터의 소요리문답으로 양육을 받은 아내로부터 개신교 신앙을 소개받고 이를 받아들였다. 신앙의 차이로 인해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해 가난한 왕족으로 살았지만 그의 신앙은 더욱 깊어져갔다.
당시 팔츠 선제후국은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의 직계인 오토 하인리히가 통치하고 있었다. 오토 하인리히는 숙부 프리드리히 2세[2] 의 영향으로 루터파 신앙을 받아들여 팔츠 선제후국에서 종교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후사가 없던 오토 하인리히의 짧은 통치가 끝나고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그가 그의 후계자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로 즉위하였다.
팔츠의 칼뱅파 신앙을 확고히 하고 싶었던 프리드리히 3세의 바람과는 달리 루터파와 칼뱅파는 ‘성찬론’의 차이로 인하여 갈등을 겪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공개토론을 열어 양측의 견해를 들었고 칼뱅파 신앙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Kaspar Olevianus 1536~1587)와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Zacharius Ursinus 1534~1583)로 하여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하게 시켰고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과 스페인의 압제로부터 박해받는 위그노 및 네덜란드의 칼뱅파 시민들의 피난을 받아들였다.
말년에는 루터파를 고수한 맏아들 루트비히와 갈등을 빚었으며 1576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했다. 향년 6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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