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S-75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세계의 중장거리 지대공 미사일)] ||<-2> {{{#White '''{{{+3 С-75 «Двина»}}}'''[br]''SA-2 Guideline''}}}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658099029394.jpg|width=100%]]}}} || || 발사 중량 ||2300 kg || || 길이 ||10.6 m || || 직경 ||0.7 m || || 속도 ||마하 3.5 || || 사거리 ||45 km || || 상승한계 ||25,000 m || || 탄두 ||200 kg || || 유도 ||지령유도 || || 발사 플랫폼 ||차량 || [목차] [clearfix] == 개요 == S-75 Desna([[나토 코드명]] SA-2 Guideline)는 [[소련]]의 첫 장거리 지대공 유도탄이다. 설계 개념과[* 폭격기 위주의 고고도 방공, 유도 방식, 사거리 및 미사일 크기 등.] 운용 시기를 따져 봤을 때 [[미국]]의 [[나이키 미사일]]과 유사하며, [[베트남 전쟁]]때 수많은 미공군기를 격추시키면서 미국에서 그 악명을 떨쳤다.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도 운용하는 중이며, 현대에는 방공 성능이 떨어지는 관계로 2선급 장비로 배치되어있다. == 역사 == === 개발과 배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bReJlWz6PNc)]}}}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75-SAM-Site-PAVN-1966-1S.jpg|width=100%]]}}} || || S-75의 개발 역사에 대한 동영상 || S-75의 포대 배치 구성도 || [[미 공군]]은 [[B-47]] 스트라토젯과 그를 능가하는 항속거리와 폭장량을 지닌 [[B-52]] 스트라토포트리스의 개발을 빠르게 개시했다. 이러한 미국 폭격기 세력의 항속거리와 속도 그리고 폭장량은 유사시 소련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에 맞서 [[소련]] 파켈 기계설계국이 1953년 개발을 시작해 1955년 첫 테스트를 거치고 1957년부터 배치되었다. 초기 실전 배치 당시만해도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성능에 최신의 유도 장비를 갖추고 있었기에 서방 세계에 대한 위협이 되기에 충분했다. 수년간 많은 개량이 이루어 졌다. S-75는 모스크바 근교에 배치된 S-25[[https://en.wikipedia.org/wiki/S-25_Berkut|#]] 베르쿠트 지대공 미사일 포대의 뒤를 이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유산인 130mm [[KS-30]]과 100mm [[KS-19]]와 같은 고고도 대구경 [[대공포]]들을 대체했다. 1958년 중반에서 1964년 사이 미국의 정보당국은 소련영내에서 600개 이상의 S-75 포대를 파악했다. 이 포대들은 대도시, 산업단지와 행정시설에 밀집배치되었다. 또한 동심원상으로 배치된 포대들이 소련 심장부인 [[모스크바]]로 향하는 적국의 폭격기의 경로를 따라 배치되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 1,000개 이상의 작전포대를 배치하는 것으로 배치를 끝마쳤다. 또한 소련 이외에, 몇몇 S-75 포대들이 1960년대 동독 주둔 소련군의 보호를 위해 동독에 전개 되었다. 차후 S-75는 대부분의 바르샤바 조약 국가들에 팔렸고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 HQ-1, HQ-2로 불리운다.] [[조선인민군]], 북베트남군 등에 공급되었다. === 실전 === S-75에 의해 처음으로 격추된 항공기는 대만의 R[[B-57]] 고고도 정찰기이다. 이 항공기는 베이징근처에 배치된 중국의 S-75포대에 의해 1959년 10월 7일에 격추되었다. 몇 년간 중화민국 공군은 RB-57 2대와 [[무인기]] 여러대 등, 몇대의 기체를 S-75에 의해 잃은 것으로 보여진다. 1960년 5월 1일, 개리 파워스의 U-2기가 예카테린부르크 근처의 시험 포대 상공을 비행하던 중 격추당했다. 원래 미사일의 도달고도로는 격추가 힘들었으나, 높은 산에 설치하고 8발을 동시에 발사해 격추하였다. 또한 중국의 S-75가 몇대의 대만공군이 조종하는 [[U-2]]기를 격추했다고 여겨진다. 이후,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 공군의 루돌프 앤더슨 소령의 U-2기가 쿠바 영공에서 격추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90605-F-1234P-015.webp|width=100%]]}}} || || [[하노이]]에서 S-75에 의해 R[[F-4]]C가 격추되는 순간을 담은 사진 || 그리고 [[베트남 전쟁]], 1965년 당시의 북베트남은 미국의 항공세력에 완전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어 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의 손에 들어가 분석 당할 위험이 컸기에 결정은 쉽지 않았지만, 몇차례의 토론 끝에 베트남인민군에 S-75 체계를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포대의 준비는 그해 초에 시작되었고 미국의 정보망은 1965년 4월 5일, 그 계획을 즉시 알아챘다. 군사전략가들은 미사일 포대가 작전가능해지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소련 기술진의 죽음이 불러올 파급을 두려워한 정치가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하노이]]-하이퐁 라인, 그리고 기타 중요한 거점들을 미군기로부터 방어하는데 쓰여지는데, 1965년 7월 23일, [[미 해군]] [[F-4 팬텀 II]] 전투기가 격추되었다. 또한 [[롤링썬더 작전]]때 [[B-52]]를 포함한 많은 미군기들이 격추당했다. 그래서 미군은 아이언 핸드 작전으로[* [[SEAD]] 임무의 시초가 되었다.] [[와일드 위즐]] 기체가 강력한 [[ECM]] [[재밍]]으로 포대를 마비시키고, 다른 S-75 포대가 방열을 개시하기 전에 레이더를 [[AGM-45 슈라이크]] [[대레이더 미사일]]로 공격하고, 발사대는 [[폭탄]]이나 [[기총]]등으로 파괴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북베트남군은 미사일 포대를 이동하고 더미로 대체하는 동시에, 가용한 모든 [[ZU-23]] 등의 [[대공포]], [[MANPADS]]를 접근로에 배치했다. 이 전술은 성공하여 미국의 희생을 강요했다. 최종적으로 종전까지 수백기의 미군기를 격추하였다. [[제4차 중동전쟁]]에서 많이 애용되었는데, [[이집트군]]와 [[시리아군]]은 [[이스라엘군]]을 방어하기 위한 방공망의 일부로 사용하여, 고고도에서 S-75가 [[2K12 쿠프]]과 병행하고, 아군 전투기와 연계하여 이스라엘 공군을 압박하고, [[레이더]] 방사를 피해 저고도로 내려오면 새로 배치된 [[ZSU-23-4 쉴카]] [[자주대공포]]와 [[스트렐라]] [[MANPADS]], 기존의 대공포 등이 남은 기체를 노리는 전술을 사용하여, 많은 이스라엘의 항공기를 격추했다. 이후, S-75는 더욱 더 발전된 [[S-200]]과 [[부크 미사일 시스템]], 더 나아가 [[S-300]]의 개발로 소련군에서 도태되었고, 이후 중국, 북한 등에서도 신형 지대공미사일의 배치로 인해 빠르게 도태되어가기 시작한다. 이 대공미사일의 마지막 실전기록은 1993년 3월 19일 조지아의 S-75가 러시아의 [[Su-27]] 전투기를 격추한 것이다. == 기타 == 한가지 특이한 점은 S-75가 [[나이키 미사일]]처럼 지상 목표물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었고, 운용자에게 어떻게 미사일을 조준하는지 교육하였다. 최근 [[이란군]]의 S-75들이 지대지 사격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최후의 출격]]에서는 영화의 주역인 [[A-6]]를 위협하는 월맹의 대공병기로 등장한다. [[Cat Shit One]]에 이 미사일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레츠와 퍼키가 월맹군의 S-75의 정보를 얻기 위해 침투하여 사진을 찍은 후, 아예 미사일 기지를 파괴하려고 시도하다가 기지에 있던 소련군 군사고문에게 총격을 한 후, 국제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면서 곧바로 탈출한다. 부상당한 소련군 군사고문은 미군들이 탈출했다는 보고를 받고 아쉬워한다. [[분류:대공 미사일]][[분류:소련군/장비]][[분류:조선인민군/장비]]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