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홍영식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갑신정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홍영식.jpg|width=100%]]}}} || || 이름 || 홍영식(洪英植) || || 출생 || [[1856년]]([[철종(조선)|철종]] 6) [[2월 5일]][* 1855년 음력 12월 29일.] || || 사망 || [[1884년]]([[고종(대한제국)|고종]] 21) [[12월 7일]][* 1884년 음력 10월 20일.] (28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말기의 [[문신]], [[외교관]], [[시인(문학)|시인]].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서울특별시]] [[종로]] 출신. 구한말 개화파 [[정치인]]이며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한국]]의 [[우편]]과 [[우표]] 제도의 선각자이다. [[개화파]]의 중진으로서 신설된 우정총국의 총판(總辦)이 되어 낙성식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 생애 ==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홍순목(조선)|홍순목]](洪淳穆)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唐洪系) 남양군파(南陽君派)로 잘 알려져 있다.[* 남양군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던 홍순목, 사대당을 제거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홍영식,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홍만식 등이 남양군파 벌족이었다.] 1881년 [[일본]]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도일했다. 담당 파트는 [[일본군|일본 육군성]]으로 이 때 <일본육군총제>, <일본육군조전> 등을 작성했다. 담당 파트인 육군성 이외에도 그는 우편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일본 우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에지마]]를 만나 여러 가지를 문의한 후 조선에도 빨리 우정국을 설치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하여 귀국 후 [[통리기무아문]]의 군무사부경리사(軍務司副經理事)가 되고 [[민영익]]과 초무국을 담당하였다. 1882년 홍문관 부제학, 규장각 직제학에도 임명되고 [[임오군란]] 당시에는 종4품 부호군[* 문관직이 아닌 무관직이다. 조선 시대에는 [[문관]]들을 종종 [[무관]]직에 임명하였다.]이 되어서 수습하였다. 1883년 [[미국]]에 [[보빙사]]로 참여해 민영익의 부관으로 참여한다. 보빙사는 7월 15일 출항하여 일본에 들렀는데 보빙사의 인원들로만 보내기는 불안했던지 주일 미국 공사의 주선으로 당시 일본에 있던 [[퍼시벌 로웰]]과 비서 [[미야오카]]가 동행하게 되었고 조선 정부는 정식으로 로웰에게 보빙사 서기관 겸 고문이라는 [[관직]]을 내려 주었다. 당시 [[태평양]] 횡단에는 [[샌프란시스코]]와 [[요코하마]] 정기선을 이용하여야 했으며 로웰은 보빙사 일원 중 홍영식과 친해지게 된다. 그 후 홍영식은 뉴욕의 우체국과 전신국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이 때의 경험으로 1884년 4월 22일 우정국을 설치하여 초대 총판으로 임명됐다. 다만 민영익과 함께 [[유럽]]으로 가지 않고 바로 귀국했으며 이 시기에 종2품 병조참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홍영식은 로웰의 노고를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보고했으며 고종은 로웰을 국빈으로 초대하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왕실]]의 초대에 힘입어 로웰은 12월 20일 다시 조선을 방문하였다. 이후 개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홍영식은 개화 운동을 적극 주도한다. 1884년 11월 4일 동문이었던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홍영식에게 찾아와 갑신정변을 모의하고 이 소식을 들은 홍영식은 매우 주저하고 고민하였으나 결국 승인하였다. 1884년 11월 18일 우정총국을 정식 개국하여 본격적으로 서울-인천 간 우편 업무가 시작됐다. 12월 4일 홍영식은 우정국에서 축하 피로연을 열었고 이 때 갑신정변이 벌어지게 된다. 갑신정변에서 제일 먼저 습격당한 민영익을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함께 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알렌]]의 집으로 옮기는 것을 도와준다.[* [[살생부]]에 민영익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도 친한 사이였고 관직 생활 초기부터 함께한데다가 해외 유람에도 함께 했던 민영익을 차마 죽일 수 없었던 듯하다.] 갑신정변 이후 홍영식은 임시로 [[우의정]] 자리에 오르게 된다.[* 영의정에는 명분상 고종의 사촌 형인 [[완림군|이재원]]이 되었으니 홍영식이 사실상 갑신정변 [[패밀리]] 중 가장 높은 셈이 된다. 사실 조선시대 영의정은 신료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명분 외에 힘이 들어가는 위치가 아니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고 갑신정변 일파들이 모두 후일을 기약하며 [[망명]]하려고 하는 중 고종이 "경들은 이제 와서 나를 두고 어딜 가는가?"라고 말한 것에 마음이 흔들려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와 함께 고종을 끝까지 호위했다. 하지만 곧이어 [[오조유]]가 이끈 [[청나라]]군이 도착했고 오조유가 고종을 데려가려 하자 만류했는데 이를 본 조선군들이 느닷없이 공격해오는 바람에 박영교를 비롯해 생도 7명과 함께 살해당했으며 당시 한국 나이로 불과 30세였다. 아버지 홍순목은 "늙은 신하가 역적을 키웠으니 나라에 큰 죄를 지었다"라고 한탄하고는 손자와 함께 독약을 먹고 [[자결]]하고 아내는 강에 몸을 던졌으며 일가 20여 명은 홍순목의 명령으로 역시 자결한다. 그의 형인 [[홍만식]]은 자결에 실패하고 옥에 갇혔다가 10년 후인 1894년 [[갑오개혁]] 때 동생과 함께 복관되었고 이후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다. 동생 [[홍정식]]은 항렬자 '식'을 '표'로 바꾸고 겨우 살아남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갑신정변 주역의 가족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길길이 날뛰면서 조선을 야만국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전제 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족보]]에서 빼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그러므로 홍영식과 100년 뒤에 태어난 [[홍준표]]는 서로 같은 항렬이다. 심지어 [[홍영표]], [[홍장표]], [[홍익표]], [[홍문표]], [[홍일표]]까지 대부분 정치인이다.], [[서광범]]([[달성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달성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 대중매체에서 == * 1973년 개봉한 [[영화]] <[[삼일천하(영화)|삼일천하]]>에서는 배우 이예성이 연기했다. * 1981년 [[KBS]] '횃불'에서는 배우 [[백윤식]]이 연기했다. * 1982년 [[KBS 대하드라마]] <[[풍운(KBS)|풍운]]>에서는 배우 [[김영철(배우)|김영철]]이 연기했다. * 1982년 KBS 한미수교 100주년 특집극 <맥토>에서는 배우 [[한진희]]가 연기했다.[* 출처: 1982년 5월 29일(제49호) 컬러화보 파트.]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에서는 성우 이성이 연기했다. * 1995년 KBS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배우 [[이세창]]이 연기했다. * 2001년 [[KBS]] 특별기획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배우 이원희가 연기했다. * 2010년 [[SBS]] 대기획 <[[제중원(드라마)|제중원]]>에서는 배우 김승욱이 연기했다. == 여담 == * 1963년 11월 16일 김의창, 최재호, 김영빈, 김봉렬, 김헌 씨 등이 '대한체우회'를 만들고 1964년 우정 80년 기념 사업으로 홍영식의 [[동상]]을 만들면서 일부 유족들을 수습했다.[[https://news.joins.com/article/1287281|중앙일보 기사]] * 홍영식과 친했던 로웰은 조선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갑신정변의 내역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조선의 [[쿠데타]](A Korean Coup d'Etat)'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글은 당시 평론지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 1886년 11월호에 게재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지내면서 동양 관련 저술가로 활동해 [* 조선 기행기로 서문에 홍영식에 대한 추모글이 있다.]을 출판하고 조선 관련 사진첩도 내고 일본 관련 서적도 여럿 써내며 이름을 날리게 된다. 로웰은 홍영식의 가족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http://library.lowell.edu/Research/library/data/historic_photo/lowres/l_x284.jpg|왼쪽부터 홍만식의 아들, 형 홍만식, 홍영식의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 아버지 홍순목, 홍영식, 동생 홍정식 순.]] * 성격은 [[대인배]][* 오랜 교분이 있던 [[민영익]]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고종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려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죽었다는 이들도 모두 자결이고 형은 감옥에서 갇혔다고는 하지만 이후에도 살아있는 등 사실 조선의 반역자 처벌을 고려하면 홍영식의 연좌제 처벌 내역은 상당히 가벼운 편. 홍영식의 시신도 정식으로 수습되어서 가족들에 의해서 매장되었는데 이런 것은 고종의 특별한 지시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단적으로 [[김옥균]]은 죽은 이후에도 오체분시당하고 효수되었다.]로 모든 사람들이 홍영식의 인품을 칭찬하고 존경하였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홍영식의 인품은 인정받아 남을 칭찬하기를 꺼리는 걸로 유명한 박영효도 "형님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허나 박영효는 서광범을 두고 "서광범은 능력은 있는데 몸이 병약해서 큰일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라고 깐다.]라고 말하며 김옥균도 후일 "홍영식 군은 교우 관계도 원만하고 인품도 좋은데다 [[위안스카이|원세개]]와 안면도 두텁고 민영익과도 함께 해외를 여행한 사이이니 금석[* 홍영식의 호.]이 목숨은 건질줄 알았다."라고 말할 정도. * 말단부터 시작해서 결국 규장각의 으뜸이 되었고 군부의 고위직이었으며 대한민국 우편 시스템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충무로]] 1가([[회현동(서울)|회현동]] 방향)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너편에 있는 서울중앙우체국과 서울지방우정청 앞에 2012년 11월 14일 동상이 세워졌다. [[분류:급진개화파]][[분류:조선의 문관]][[분류:우의정]][[분류:1856년 출생]][[분류:1884년 사망]][[분류:살해된 인물]][[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남양 홍씨(당홍) 남양군파]][[분류:보빙사]]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