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형갑수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형갑수}}}'''[br]'''邢甲洙'''}}}}}}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형갑수.jpg|width=100%]]}}} || || '''자 / 호''' ||노경(魯卿) / 오하(梧下) || || '''본관''' ||[[진주 형씨]][* 판사공파(判事公派)-매안(梅岸) 문중 34세 수(洙) 항렬.] || ||<|2> '''출생''' ||[[1892년]] [[10월 9일]][* 진주형씨대동보 권1 416쪽에는 12월 9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 ||[[전라도]] [[남원시|남원도호부]] 매내면 대산리[br]{{{-2 (現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대산마을[* [[진주 형씨]] 집성촌으로, [[독립유공자]] [[형광욱]]도 이 마을 출신이다. 대산마을은 1456년([[세조(조선)|세조]] 2) [[단종복위운동]] 당시 형근(邢瑾, 1418. 9. 10 ~ 1453)이 [[사육신]]과 함께 순절하자, 형근의 아들인 형계선(邢繼善, 1442. 5. 8 ~ 1516. 3. 4)이 난을 피해 본래 살던 [[남원시|남원도호부]] 주포면 영촌리(現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 영촌마을)에서 이곳 대산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형계선의 후손들이 이 마을에 세거하게 되었다.[[http://namwon.grandculture.net/namwon/toc/GC00600267|#]]] 463번지)}}} || ||<|2> '''사망''' ||[[1973년]] [[7월 10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7월 1일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진주형씨대동보 권1 416쪽에는 1969년 9월 7일 별세한 것으로 오기되어 있다.] (향년 80세)|| ||[[전라북도]] [[남원시|남원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47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92년 10월 9일 전라도 남원도호부 매내면 대산리(현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대산마을 463번지)에서 아버지 형석두(邢錫斗, 1867. 11. 24 ~ 1911. 7. 8)와 어머니 [[고령 신씨]](1870. 9. 4 ~ 1925. 4. 28)[* 신신구(申兟求)의 딸이다. 아버지의 족보에는 배우자가 신광영(申光永)의 딸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외가 고령 신씨의 족보에는 아버지가 신신구의 사위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의 어머니는 신신구의 딸이다. 다음은 출처 사진들이다. [[파일:형석두 형갑수 부자 족보.png]][[파일:형갑수 외가 족보.png]]]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남원군 사매면 대신리 대산마을 467번지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69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9826&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이주했다]]. 1919년 4월 4일 남원면 장날에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1919년 8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7|전협]](全協)·[[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09|최익환]](崔益煥) 등이 [[경기도]] [[경성부]]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3&docId=548757&categoryId=46623|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입단했다. 이때 전라북도지단(全羅北道支團)의 총무부장에 선임되어 이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0921|김재구]](金在九)·[[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59|강경진]](姜景鎭) 등과 함께 남원군 지방을 중심으로 지단의 조직 확대에 힘을 쏟는 한편, 각종 선전물의 배포를 통하여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음력 8월에 김재구·강경진·[[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87|이범수]](李範壽)·[[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032|정남용]](鄭南用)과 함께 경기도 경성부 [[을지로4가|황금정4정목]](現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을지로4가]]) 249번지에 있던 전복규(全福奎)의 집에서 전협을 만나 100원을 군자금으로 [[http://db.history.go.kr/id/hd_006r_0020_0020|납부해]] 조선민족대동단 본부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1919년 11월 대동단 본부가 주도한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계획이 일본 경찰에 발각됨으로써 대동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대동단 전라북도지단의 실체도 자연히 발각되었다. 이에 그는 곧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1920년 9월 21일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69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9826&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전주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으며]], 1922년 3월 1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321&evntId=0034990329&evntdowngbn=Y&indpnId=0000021436&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이후 1973년 7월 10일 전라북도 남원군에서 별세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본래 [[남원시]] 광치동에 안장되었다가, 2011년 4월 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진주 형씨]][[분류:남원시 출신 인물]][[분류:1892년 출생]][[분류:197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희귀성씨인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