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함상훈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법조인, rd1=함상훈(법조인))] {{{+1 [[咸]][[尙]][[勳]]}}} [[1903년]][* [[http://db.history.go.kr/id/im_114_00389|1956년 간행된 대한민국건국십년지]]에는 1904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10월 25일]] ~ [[1977년]] [[1월 2일]] [목차] == 개요 ==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일생 == 1903년 10월 25일 [[황해도]] [[풍천군]](現 [[황해남도]] [[과일군]])에서 [[http://blogs.chosun.com/glassy777/2012/03/14/%E7%99%BD%E7%9F%B3-%EB%82%B4-%EA%B0%80%EC%8A%B4-%EC%86%8D%EC%97%90-%EC%A7%80%EC%9B%8C%EC%A7%80%EC%A7%80-%EC%95%8A%EB%8A%94-%EC%9D%B4%EB%A6%84-3/|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귀국해 [[신간회]] 경성지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1928년 3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같은 해 5월 퇴사했다. 1929년 5월 동아일보사에 재입사해 논설반 기자로 활동하다가 1933년 9월 사직하고 [[조선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정치부장, 1934년 5월에는 정치부장 겸 편집국 차장으로 재직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8238|서춘]](徐椿) 당시 조선일보 주필로부터 [[조선총독부]]의 의향에 따라 [[황국신민]]의 입장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게재할 것을 지시받았으나, 이에 서춘을 "[[이완용]]보다 더한 자"라고 비난하면서 지시 이행을 거부했다. 이어 1937년 11월 [[조선일보]]의 보도 방침을 놓고 주필 서춘과 편집국장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1059|김형원]](金炯元)이 대립각을 세우다가 끝내 둘 다 동반사퇴하자 1938년 1월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후로는 전임 주필 서춘과 당시 사장 [[방응모]] 등의 주도 하에 중일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방향으로 바뀐 조선일보의 논조에 맞춰 신문을 발행했고,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된 뒤에도 《조광》의 대표 필진으로서 친일 논설을 기고하는 등 친일로 전향했다. 또한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선전부장과 조사부장을 역임하는 등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 제주도 북제주군 갑/을의 경우 [[제주 4.3 사건]]으로 1948년이 아닌 1949년 5월 10일 선거가 치러졌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제주도 북제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홍순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민주국민당]]에 몸담았으나, 1954년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으로 민주국민당에서 제명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출판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분류:송화군 출신 인물]][[분류:실향민]][[분류:1903년 출생]][[분류:1977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와세다대학 출신]][[분류:강릉 함씨]]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