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하상지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1 何尙之 | 하상지}}}''' || || '''시호''' ||간목(簡穆) || || '''작위''' ||순양왕(順陽王) → 계양왕(桂陽王) || || '''성''' ||하(何) || || '''이름''' ||상지(尙之) || || '''자''' ||언덕(彦德) || || '''부친''' ||하숙도(何叔度) || || '''생몰''' ||382년 ~ 460년 || || '''출신''' ||여강군 (廬江郡) 잠현 (灊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송(남조)|유송]]의 관료로 자는 언덕(彦德). 여강군 (廬江郡) 잠현 (灊縣) 출신. == 생애 == 하상지는 어린 시절에 경박하고 방탕해서 도박을 좋아했으나 장성하면서 지난날의 태도를 바꾸고 지조를 굳게 지켜서 칭송을 받았다. 하상지의 명성은 [[사혼]]에게 알려저서 사혼과 교유하였다. 하상지는 집안이 가난해서 임진현령(臨津縣令)으로 부임했으며, 유유가 정서장군(征西將軍)을 겸임할 때 유유의 주부(主簿)로 임명되었다. 유유가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을 정벌할 때 종군했으나 공사로 인해 면직되어 수도로 돌아왔으며, 유유가 후진 정벌을 마친 뒤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다. 420년, 유유가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동진)|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가 유송의 초대 황제인 [[무제(유송)|무제]]였다. 422년, 무제가 붕어하고 무제의 태자인 유의부가 즉위하니 이가 제2대 황제인 [[소제(유송)|소제]]였다. 하상지는 소제 즉위 후 거기장군 여릉왕(廬陵王) [[유의진]]의 자의참군(諮議參軍)이 되었다. 당시 유의진은 사도(司徒) [[서선지]], 상서령(尙書令) [[부량]] 등과 갈등을 빚고 있어서 매양 그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는데, 하상지가 유의진에게 간언을 올려도 유의진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의진이 폐서인된 뒤 하상지는 입조하여 중서시랑(中書侍郞)이 되었다. 424년, 서선지, 부량, [[사회(유송)|사회]]가 유의부를 폐하고 의도왕(宜都王) 유의륭을 맞이하여 황제로 세우니 이가 제3대 황제인 [[문제(유송)|문제]]였다. 문제가 즉위한 뒤 하상지는 임천내사(臨川內史)로 전출되었고 입조하여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으며, 상서이부랑(尙書吏部郞), 좌위장군(左衛將軍)을 역임하다가 431년 부친인 하숙도가 죽으면서 벼슬에서 물러났다. 장례를 마친 하상지는 다시 좌위장군이 되었고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를 겸임하였다. 하상지는 글을 좋아하고 침착하게 연회를 즐겨서 문제로부터 매우 인정을 받았다. 435년, 시중(侍中)으로 전임되고 태자중서자를 그대로 받았으며, 뒤에 유격장군(游擊將軍)을 겸임하였다. 436년, 팽성왕(彭城王) 유의강이 사도좌장사(司徒左長史) 유빈(劉斌)을 단양윤(丹陽尹)으로 삼으려 했으나 문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뒤에 하상지가 단양윤이 되어 단양 남쪽 교외에 저택을 짓고 현학교를 세워서 학생들을 모았다. 이때 서수(徐秀), 하담(何曇), 황회, 순자화(荀子華), 손종창(孫宗昌), 왕연수(王延秀), 공혜선(孔惠宣) 등이 하상지의 현학교로 모여들어서 이들을 남학(南學)이라고 불렀다. 하상지는 딸을 유담의 아들 유암(劉黯)에게 시집 보냈으나, 유담과는 친하지 않았다. 유담이 단양윤을 겸임하려 하자, 조정에서는 하상지를 사부상서(祠部尙書)로 삼고 국자좨주(國子祭酒)를 겸임하게 해서 하상지는 속으로 매우 불평했다. 유담이 처벌된 뒤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전임되었다. 이때 좌위장군 [[범엽]]이 정무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하상지는 범엽이 다른 뜻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서 문제에게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범엽은 마땅히 광주(廣州)로 전출시켜야 합니다. 만약 범엽이 내부에서 모반을 일으킨다면 어쩔 수 없이 범엽을 주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 차례 대신들을 주살한다면 교화를 해칠 것입니다. 하상지의 진언을 들은 문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 유담 등을 주벌한 뒤에 바야흐로 후진들의 지위를 높이려고 했소. 범엽의 행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미리 범엽을 쫓아낸다면, 만방이 장차 경들은 재능 있는 인물을 용납하지 않고 짐이 참언을 믿었다고 생각할 것이오. 다만 이를 안다고 해서 큰 변고로 이어지는 것을 근심하는 것은 아니오. 이후 범엽이 처형되면서 문제는 하상지의 선견지명을 칭찬했다. 국자학이 들어선 뒤 하상지는 국자좨주를 겸임하였다. 뒤에 건평왕사(建平王師)를 겸임했다가 중서령(中書令), 중소군(中護軍)이 되었다. 445년, 하상지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전임되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다. 이때 현무호(玄武湖)가 왼성돼서 문제가 현무호에 방장(方丈), 봉래(蓬萊), 영주(瀛洲) 등 3개의 선산을 세우려고 했지만 하상지가 간언해서 그만두었다. 또 화림원(華林園)을 지을 때는 한여름에 인부들을 동원하자, 하상지는 인부들에게 휴식을 줘야한다고 간언했다. 이때 문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인은 항상 스스로 등을 드러내는데 이 정도의 공사는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데 충분하지 않소. 또한 문제는 순시를 할 때 밤을 새는 일이 많아지자, 하상지는 다시 다음의 간언을 올렸다. >만승천자는 의당 자중해야 하고 존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천자가 귀감으로 삼아야 하는데 어째서 신의 글을 빌어서 알리게 하십니까? 폐하께서 근래에 순시를 나서시며 자주 밤을 새시는데, 조정의 대신들이 반대하니 정말로 편안할 수 없습니다. 길을 깨끗이 정리한 뒤 행동하고 제왕이 규칙을 세우는 것은 고금이 경계하는 바로 편안할 때도 위태로움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급암]]이나 [[신비(삼국지)|신비]]를 만났다면 틀림없이 군주의 안색에 개의치 않고 직언을 올렸을 것이지만, 단지 신들은 쉬지 않고 꾸준히 힘을 다하며 매양 순종하고 간언을 올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조금이라도 신의 정성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성찰하셔서 저로 인해 진언을 저버리지 마시고 사해의 기대를 달래주십시오. 447년, 조정에서 사수전(四銖錢)을 주조했는데, 민간에서는 대부분 오래 된 동전의 구리로 사수전을 몰래 주조하는 문제가 심각했다. 이에 녹상서사(錄尙書事) 강하왕(江夏王) 유의공이 대전(大錢)을 주조하고 그 가치를 2개의 소전(小錢)으로 해서 민간에서 몰래 화폐를 주조하는 것을 근절하자고 건의했고 여기에 동의하는 이들이 많았다. == 여담 == * 하상지가 다년간 병을 앓았을 때 모유를 먹었더니 차도가 보였다는 일화가 송서에 기록되었다. [[분류:송(남조)/인물]][[분류:382년 출생]][[분류:460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