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하동부대부인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조선 부대부인(대원군 부인))]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a122d, #6d1b43 20%, #6d1b43 80%, #4a122d); color: #FFD400" '''조선 덕흥대원군의 부인 | 조선 선조의 생모[br]{{{+1 하동부대부인 | 河東府大夫人}}}'''}}}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덕흥대원군묘.jpg|width=100%]]}}} || ||<-2> {{{#ffd400 {{{-2 하동부대부인묘 전경}}} }}} || || '''출생''' ||[[1530년]] [[9월 24일]] || ||<|2> '''사망''' ||[[1567년]] [[6월 24일]] (향년 36세) || ||[[조선]] [[한성부]] [[사직동(종로구)|사직동]] [[도정궁]][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종로구)|사직동]]) || || '''능묘'''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산205-13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하동 정씨]] || || '''부모''' ||부친 정세호[*鄭世虎 {{{-3 1486 ~ 1563}}}][* [[세종(조선)|세종]]의 차녀 [[정의공주]]의 외증손이자, [[정인지]]의 손자.] 모친 [[광주 이씨]] || || '''배우자''' ||[[덕흥대원군]] || || '''자녀''' ||{{{#!folding 슬하 3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하원군]](河原君, {{{-3 1545 ~ 1597}}}) 차남 - [[하릉군]](河陵君, {{{-3 1546 ~ 1592}}}) 장녀 - 이명순(李明順, {{{-3 1548 ~ 1637}}}) 3남 - 14대 '''[[선조(조선)|선조]]'''(宣祖, {{{-3 1552 ~ 1608}}})[* 작호는 하성군(河城君).]}}} || || '''봉작'''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br]→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br]→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 || [목차] [clearfix] == 개요 == [[덕흥대원군]]의 정부인이자 [[선조(조선)|선조]]의 친어머니이다. [[세종(조선)|세종]], [[세조(조선)|세조]] 대의 재상이었던 [[정인지|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증손녀이며 판중추부사를 지낸 정세호의 딸이다.[* 정세호의 외증조모, 하동부대부인 정씨에겐 증외고조모가 되는 인물이 다름아닌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이다. 안맹담과 정의공주의 아들인 안온천의 딸이 정인지의 막내아들인 정상조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정세호이고 그의 딸이 본문의 인물이다. 이렇게 되면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와는 항렬상으론 10촌이 된다.] 참고로 [[창빈 안씨]]와 더불어 선조와 선조 이후의 조선 국왕들은 전부 하동부대부인의 후손이다. == 생애 == 1530년(중종 25년) 9월 24일(음력 9월 4일)에 태어났다. [[중종(조선)|중종]]의 서9남인 [[덕흥대원군|덕흥군 이초]]와 [[혼인]]한 후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봉해졌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하원군|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차남은 [[하릉군|하릉군 이린(河陵君 李鏻)]], 그리고 셋째가 훗날 선조가 되는 [[선조(조선)|하성군 이균]](河城君 李鈞)이다. 딸은 이명순(李明順)이며 [[안(성씨)|광주 안씨]] 안황과 혼인했다. 1567년([[명종(조선)|명종]] 22년) 6월 24일에[* 음력 5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 사후 == [[무덤|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있다. [[덕흥대원군]]의 묘와 쌍분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종(조선)|명종]][* 남편 [[덕흥대원군]]의 [[이복동생]].] 역시 승하하면서 그의 3남 [[선조(조선)|하성군 이균]]이 선조로 즉위했다. 1569년(선조 2년) 선조는 자신의 친부모인[* 선조는 [[명종(조선)|명종]]의 [[양자(가족)|양자]] 자격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덕흥군과 하동군부인은 법적인 부모가 아니었다.] 덕흥군과 하동군부인을 [[송나라]] 복왕의 예를 따라[* 나름 의미가 있어서 저 예시를 적었다. [[아버지|친아버지]]를 다른 일반 왕족들과 다르게 높여 대접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인지상정. 하지만 전례없는 일이라 무작정 예우하긴 좀 그랬고, 이에 [[명분]]거리로 쓰기 위해 [[중국]]의 비슷한 [[사례]]를 찾아낸 것이다. 실제로 [[왕]]들이 뭘 하려는데 [[신하]]들이 반대할 경우, 중국의 예를 들먹이면 반발이 무마된 적이 많았다.] 각각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추증했다. 그리고 [[신위]]는 불천지위[* 몇 대가 지나도 옮기지 않고 제사를 받는 신위.]가 되어 [[도정궁]](덕흥대원군의 사저) 후원에 있는 사당 덕흥궁에 모셔져있다가 1950년대에 덕흥대원군 묘 근처에 있는 덕릉마을 내 덕릉재실로 이전했다. [[제사]]는 장남 [[하원군]]과 그의 장손들이 모셨으며, 현재도 매년 기일마다 제사를 지낸다. == 호칭 == 사실 하동부대부인은 정식으로 [[부대부인]] 작호를 받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조]] 때까지 그를 부대부인으로 일컬은 기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를 처음 [[부대부인]]으로 칭한 것은 1724년([[영조]] 즉위년)이었다. 그 해 9월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존봉하려할 때 [[예조판서]] 이진검이 영조에게 “[[선조(조선)|선조]] 때에 [[덕흥대원군|덕흥군]]을 높여서 ‘대원군’이라고 하였고, 군부인을 ‘부대부인’이라고 하였다."는 말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0009021_002|#]] 저 말은 1722년(경종 2년)에 부제학 이명언이 [[경종(조선)|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추보할 것을 건의할 때 인용한 내용에서 비롯되었다.[[https://ko.wikipedia.org/wiki/하동부대부인|#]] 그 내용은 "선조 때 [[덕흥대원군]]을 추숭했을 때, [[이황]]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삼을 것"이었다. 그래서 [[희빈 장씨]]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이란 [[존호]]를 받았다.[* 옥산은 [[희빈 장씨]]의 [[본관]]인 [[인동 장씨|인동]]의 별칭이다.] 저 때 저 자리에 이진검도 같이 있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 그 이전에 [[대원군]]의 [[부인]]을 [[부대부인]]으로 불렀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고, 위에 적은 이명언의 말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즉, 이진검이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이진검의 단순 실수라고 보기도 하고 일부러 그랬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한 나라의 [[예조판서]]가 왕에게 옛날 일을 말하는데 내용을 제대로 확인 안 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걸 감안하면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그랬다는 설에 무게가 더 실린다.[[https://ko.wikipedia.org/wiki/하동부대부인|#]] 정말 고의적으로 그랬다면,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옥산부대빈으로 추증받은 [[희빈 장씨]]의 [[작호]]가 혹시라도 강등당할까봐 틀린 고사를 언급하면서까지 작호를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https://ko.wikipedia.org/wiki/하동부대부인|#]] 실제로 이진검은 [[경종(조선)|경종]]의 각별한 충신이었으며 [[신임사화]] 때는 [[노론]] 축출에 가담했었던 [[소론]] 강경파였다.[* 그리고 저 말을 하고 1년도 채 못 되어 [[강진군|강진]]으로 유배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래서 저 때 이후에도 한동안은 하동부부인으로 계속 불렸다. 그러다 1734년([[영조]] 10년)에 다시 하동부대부인이란 호칭이 나왔으며[[http://sjw.history.go.kr/id/SJW-F10110030-02100|#]] 이후에는 하동부부인과 하동부대부인을 섞어서 불렀다. 아마 아들의 지위에 따라 어머니의 [[작호]]에 ‘대(大)’ 자를 더할 수 있다는 1432년([[세종(조선)|세종]] 14년)의 법령과[[http://sillok.history.go.kr/id/kda_11401016_004|#]], 조선 전기에 이미 [[부대부인]] 작호를 받은 사람이 있었던 전례를 볼 때,[* [[세조(조선)|세조]]의 장모(정희왕후의 생모) 흥녕부대부인 이씨, 수양대군(세조)의 부인 [[정희왕후|낙랑부대부인 윤씨(훗날 정희왕후)]], [[성종(조선)|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부인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의 생모인 하동부부인을 마땅히 부대부인으로 삼았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아서인 듯 하다.[[https://ko.wikipedia.org/wiki/하동부대부인|#]] 이후 [[방계]] [[종친]]으로 왕이 된 [[철종(조선)|철종]]이 즉위한 뒤에 자신의 [[완양부대부인|적모]]와 [[용성부대부인|생모]]를 공식적으로 부대부인으로 추증하면서 [[부대부인]]은 [[대원군]]의 [[부인]]을 일컫는 호칭이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ya_10006017_001|#]] 이 때부터 하동부부인도 정식으로 하동부대부인으로 불렸다.[[http://sjw.history.go.kr/id/SJW-J00070020-00500|#]] [[분류:부대부인]][[분류:하동 정씨]][[분류:1530년 출생]][[분류:1567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