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필라에 신전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이집트 신화/신전]][[분류:화폐의 도안]] [include(틀:고대 이집트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필라이 이집트 2.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istory-of-Philae-Island-Trips-in-Egypt-1.jpg|width=100%]]}}} ||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갈 때의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 작은 배에 올라탄 채로 섬을 올려다보면 야자수와 주랑, 탑문이 세워진 섬이 마치 신기루처럼 강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보인다. 양 편에 돌더미들이 쌓였고 멀리서 보랏빛 산이 반짝인다. 배가 섬에 가까워지자 조각된 탑이 하늘을 향해 점점 더 높이 솟구치는 듯하다. 어디에서도 쇠락이나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견고하고 위엄 넘치며 완벽하다. 그 모습을 보며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순간 잊어버리리라. 그 고요한 공기 속 고풍스러운 성가(聖歌)가 울려퍼진다면, 흰 옷을 차려입은 신관들의 행렬이 베일을 드리운 신궤를 등에 진 채로 종려나무와 탑문 사이로 지나간다해도 전혀 놀랍지 않으리라. > >'' A thousand miles up the Nile'', 아멜리아 에드워즈.[* Amelia B. Edwards. 1831~1892. 19세기에 활동한 [[영국]] 출신의 소설가. 저널리스트이자 이집트학자이기도 하다. 위의 글은 그녀의 책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당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이 생각했던 이집트에 대한 환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목차] [clearfix] == 개요 == [[아스완]]에 소재한 [[고대 이집트]]의 신전. 기원후 6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한 최후의 이집트 신전이었다. 이집트 정부가 아스완 댐을 착공하며 섬 자체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 차원에서 신전을 분해해 통째로 옮겼다.[* 마찬가지로 [[아부심벨 신전]] 역시 비슷하게 조각내어 상부 지대로 옮겼다.] 현재는 아스완의 대표적인 관광지들 중 하나다. == 역사 == 필라에 신전이 위치한 섬은 [[오시리스]]의 무덤들 중 하나로 알려진 장소다. 세트가 오시리스의 시신들을 여러 토막으로 조각내어 뿌릴 때 그중 한 조각이 필라에 섬에 떨어졌다고 믿었기에 엄청나게 오래 전부터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 이미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수많은 순례객들이 이 곳을 참배하려 몰려들었고, 신관을 제외하면 이 곳에 거주하는 건 불가능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손꼽히는 성지였던 셈이다. 하도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자 신관들이 [[파라오]]에게 탄원을 넣어 최소한 공직자들만큼은 이 곳에서 숙식하지 말게 명령해달라고 간청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필라에 섬은 단순한 성소였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인들과 [[누비아]]인들이 만나서 교역품을 사고파는 무역 중심지들 중 하나였고,[* 필라에 섬은 고대 이집트어로 읽으면 '경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집트 국경의 남쪽 끝에 위치했다는 의미다.] 덕분에 필라에 섬은 고대 이집트 시절 내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필라에 섬에 세워진 첫 번째 건물은 [[이집트 말기 왕조]] 시절의 파라오 [[타하르카]]가 세웠다. 이후 제26왕조의 [[프삼티크 3세]]가 [[이시스]]를 섬기는 작은 사원을 세웠고, 이어 아흐모세 2세와 넥타네보 1세 등 수많은 파라오들이 건물들을 증축해나갔다. 다만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건물들 대부분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세워졌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5세]], [[프톨레마이오스 6세]] 등이 대규모로 신전군을 확장했고, 현존하는 건물들 중 3분의 2정도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 세워진 것들이다. 파라오의 시대가 끝나고 들어선 [[로마 제국]] 시절에도 여전히 필라에 섬은 중요한 성소들 중 하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나 [[카라칼라]] 황제 등 로마 황제들도 여전히 신전의 유지 보수에 힘을 썼고 덕분에 필라에 섬은 다른 신전들에 비하면 쇠락하지 않은 채 남아있을 수 있었다. 물론 고대 이집트 신앙이 흥성하던 시절에 비하면 순례객들의 수는 확연히 감소하긴 했지만... 서기 394년에는 [[히에로글리프]]로 쓰인 마지막 비석이 필라에 신전에 새겨졌고 서기 452년에는 민중문자로 쓰인 마지막 비석이 세워졌다. 이 당시에 이미 이집트 대부분 지역에서 히에로글리프, 민중문자들이 [[그리스 문자]]와 [[콥트 문자]] 등에 밀려나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필라에 신전에서만큼은 고대 이집트식 문자와 종교를 마지막까지 보존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필라에 신전은 '''고대 이집트 신전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이시스]] 등 이집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전'''이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며 옛 종교를 모시는 사람들도 줄어갔고, 결정적으로 [[기독교]]가 이집트에 전파되며 상황이 급변한다. [[우상숭배]]를 죄악시하던 기독교도들이 필라에 신전을 조직적으로 파괴했고, 특히 필라에 지방의 초대 주교 마케도니우스는 신전에서 기르던 신성한 [[매]]의 목을 꺾어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필라에 신전이 역사가 오래된 신전이었기에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수년간 기독교 교회들과 공존했고, 이집트 신앙의 신자 수가 줄어감에 따라 점진적으로 사라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필라에 지방의 주교들이 [[테오도시우스 2세]]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필라에 섬에 교회와 이교도 신전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쓰여있다.] ||[[파일:tumblr_ff8699bb2247c8639c9947ada2199056_ae4e278e_1280.jpg|height=350]]||[[파일:PHILAE_UN_TEMPLE_SUR_LE_NIL.jpg|height=350]]|| ||아스완 댐 착공으로 침수되어버린 신전. ||고대 이집트 시절의 복원도. || 기독교도들은 집요하게 필라에 신전을 박해했고, 결국 필라에 신전은 5세기 이후 고대 이집트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가 중단되며 그 명맥이 끊어졌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에 따라 537년에는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다.[* 고고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이집트 신화|고대 이집트 종교]]의 종말'로 본다.] 섬에는 고대 신전들을 허물고 대신 교회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신전의 부조와 벽화들을 지우고 교회 건물로 용도변경해서 쓰기도 했다. 다만 6세기 경까지는 '이교도 신앙을 따르는 자들이 필라에에서 활보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는 걸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고대 이집트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던 모양. 시간이 흘러 기독교는 [[이슬람교]]에게 밀려났고, 새롭게 들어온 무슬림들은 필라에 섬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필라에 신전은 나일 강 한복판에 있던 섬에 위치하여 교통도 불편하고, 범람 때마다 잠기는 필라에 섬에 굳이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기독교도들은 기존의 성지였던 필라에 신전을 조직적으로 파괴했으나 이슬람이 전파될 시점에는 이미 필라에 신전의 명맥이 끊긴지 오래였던 이유도 있었다. 필라에 신전은 버려졌고, [[나일 강]]이 범람할 때마다 신전의 상당 부분이 점차 허물어져 갔다. 특히 1800년대에는 범람 정도가 점점 심해져 1년 중 대부분을 물 속에 잠긴 채로 보내기도 했다. 1800년대들어 필라에 섬은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유명한 이집트 관광지들 중 하나가 되었다. 물 속에 잠긴 수중 신전은 이집트에서 흔하지 않았다. 1902년에는 아스완 댐이 완공되면서 범람하는 정도가 강해졌고, 1년 내내 신전 전체의 3분의 1 이상이 물 속에 잠겨있게 되었다. 돌로 지은 석재가 떠내려가는 일은 없었으나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던 벽화와 채색들이 씻겨 내려가는 등 훼손 정도가 매우 심해졌다. 결국 보다못한 [[유네스코]]에서 1960년대에 대대적인 보존 프로젝트를 발족했다. 100만 제곱미터 크기의 댐을 건설한 다음 신전 전체를 2~25톤 정도의 석재 4만 개로 나누어 인근 아길키아 섬으로 옮겼다.[* 그래서 원래 신전이 세워져 있던 필라에 섬은 현재 [[나일 강]] 수면 3~5m 밑에 가라앉아 있다.] 이 모든 작업은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약 4년동안 이루어졌다. == 구조 == 필라에 신전으로 입도하려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현대 들어 새로 만들어진 신축 부두에 내려 섬으로 올라가면 가장 먼저 넥타네보 1세가 세운 작은 사원이 나온다.[* 섬 동쪽 부분에 놓아둔 널찍하게 의자들은 밤에 하는 레이저 쇼 관람용 좌석이다. 이시스가 사라진 오시리스의 시신들을 찾아 헤메다가 필라에 섬까지 오는 과정들을 레이져 쇼로 재현한다.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 제30왕조 시대에 지어졌고, 섬 남서쪽 모퉁이에 세워져 있다. 원래는 14개의 하토르 기둥들이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무너져내려서 6개 밖에 남지 않았다. 기둥들 사이에는 벽이 쳐져 있는데 벽 높이는 대략 6피트, 그리고 그 위에는 우라에우스들이 줄을 지어 조각되었다. 벽면에는 넥타네보 1세가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면을 새겼다. 넥타네보 1세가 세운 사원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두 개의 주랑이 나온다. 하나는 동쪽에, 하나는 신전 탑문으로 이어지는 서쪽에 있는데, 개중에 서쪽 주랑이 더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원래는 서쪽 주랑에서 필라에 섬 맞은편을 바라볼 수 있도록 뚫려있었으나 신전을 들어옮기는 과정에서 지형이 바뀌며 현재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서쪽 주랑의 길이는 약 100야드, 보존 상태도 좋아서 32개의 기둥들 중 무려 31개가 그대로 남아있다. 기둥 머리는 꽃무늬로 장식했고 대부분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그려놨다. 원래는 주랑에 천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무너졌고, 그나마 남아있는 석재를 조사한 결과 별과 독수리가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랑 뒷벽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벽화가 새겨져 있다. 동쪽 주랑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넥타네보 1세의 사원 바로 곁에는 조그맣게 아르세누피스[* 누비아에서만 모셔지던 사자 머리의 여신. [[이시스]]와 동격으로 여겨지기도 했다.]의 사원이 있다. 여기서부터 동쪽 주랑이 시작된다. 서쪽 주랑은 로마의 황제들이 지었지만 동쪽 주랑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지었다. 그래서 이 주랑에는 신들을 모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새겨져있다. 동쪽 주랑에는 부분적으로 천장과 지붕이 남아있다. 총 17개의 기둥들이 남아있지만 조각이 완벽히 완성된 것은 고작 6개 뿐이다. 동쪽 주랑의 조성이 중단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동쪽 주랑 끝쪽에는 또다른 누비아계 신인 만둘리스의 사원, 그리고 신격화된 [[임호텝]] 신전이 붙어있다. ||[[파일:egypt-philae-second-pylon.jpg|height=300]]||[[파일:philae_temple_852011.jpg|height=300]]|| ||두 번째 탑문의 전경. ||첫 번째와 두 번째 탑문 사이에 위치한 '생명의 집'을 찍은 사진. || 주랑 사이를 쭉 걸어가면 마침내 [[이시스]] 신전 본건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시스 신전의 첫 번째 탑문은 높이 60피트, 너비 150피트 정도로, 양쪽에는 깃대를 세울 용도로 깊은 홈이 파여있다. 대략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절에 착공해 [[프톨레마이오스 3세]] 시절에 대략적인 윤곽이 잡힌 걸로 추정된다.[* 공사 완공 이후에도 장식이 끊임없이 새겨졌다.] 탑문의 오른쪽 전면에는 이집트의 대적들의 머리를 잡은 채 곤봉으로 내려칠 준비를 하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모습이 새겨졌다. 그의 왼쪽에는 왕을 바라보는 이시스가 서 있고, 그 옆에 [[호루스]]를 상징하는 매가 있다. 이 장면 위에 두 개의 부조가 있다. 하나는 호루스와 [[네프티스]]에게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왕관을 선물하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부조, 나머지 하나는 이시스와 어린 호루스에게 향을 바치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부조다. 탑문 사이를 통과하면 왼쪽에 바로 보이는 거대한 건물은 이시스 여신의 신당으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지었다. 탑문 바로 뒤의 앞뜰에 [[덴데라 신전]]과 비슷하게 생긴 건물이 하나 딸린 모습인데 이걸 '생명의 집'이라고 부른다. 주 목적은 [[오시리스]]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소였고, 왕의 신성성을 강조해주는 역할도 했다. 내부에는 [[호루스]]와 파라오의 신상들이 안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둥주 장식은 [[하토르]] 여신의 머리 장식으로 꾸몄고 벽에는 여러 신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받는 이시스와, 그녀에게 안겨있는 아기 호루스의 모습이 새겨졌다. 그 외에 여러 방들이 안에 만들어져 있고 제사장의 의복을 보관하거나, [[토트]] 신에게 봉헌된 도서관 등 다양한 용도들로 구분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시스 여신의 신당을 한번 둘러보고 나면 마침내 두 번째 탑문으로 갈 수 있다. 두 번째 탑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부조가 새겨져 있지만 기독교도들 때문에 크게 훼손된 상태다. 벽에는 당시 필라에 주교 테오도로스의 비문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어쨌든 두 번째 탑문을 통과하면 이시스 여신의 내부 성소가 등장한다. 탑문을 지나자마자 10개의 기둥들이 떠받치는 다열주로 둘러싸인 작은 정원이 하나 나오는데, 천장이 뚫려있어서 햇빛이 들어온다. 원래 이 곳에도 부조들이 빽빽히 새겨져 있었으나 기독교도들이 다 지워버리고 대신 성경 내용을 새겼다. 서기 500년 경에는 여기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아예 교회로 개조하여 한 번은 [[성모 마리아]]에게, 한 번은 성 스테파노에게 봉헌했다. ||[[파일:philae_temple_819361.jpg|height=300]]||[[파일:trajan_kiosk_372838.jpg|height=300]]|| ||신전 내부의 모습. 맨 끝에 성소가 보인다. ||트라야누스 신전의 모습. || 정원을 건너 3개의 어두운 방들을 지나면 가장 안쪽에 이시스 여신의 내부 성소가 등장한다. 원래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순금으로 만든 이시스 여신의 신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진 상태. 딱히 볼만한 게 많지는 않지만 굳이 보자면 내부의 벽화들이 볼만하다. 특히 성소로 향하는 방에 있는 벽화들을 보면 [[오시리스]]를 애도하는 여신들의 모습, 그의 시신 조각들을 찾는 이시스의 모습, 습지 식물들 사이에 안치된 오시리스의 시신, [[오시리스]]와 [[호루스]]에게 상하이집트의 왕관을 바치는 [[네프티스]] 여신의 모습 등 다양한 벽화가 있다. 1800년대까지만 해도 이집트 유적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벽화의 채색이 화려했지만 홍수 때문에 색료가 물에 쓸려내려가 현재는 바위 색만 남았다.[* 천장이 밤하늘처럼 짙은 푸른색으로 장식되어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한 여행가는 여행록에 필라에 신전 내부가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처음 봤을 때만큼 경탄스러웠다는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 외에 내부에 있는 계단을 따라 지하실로 내려갈 수도 있다. 이 안에도 역시 벽화들이 밀도있게 새겨져 있다. 마지막으로 섬 동쪽에 있는 거대한 건물은 '트라야누스 신전'이라 불리지만 사실 [[아우구스투스]]가 지었다. 워낙 독특하게 생겨서 '파라오의 침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꽃처럼 깎은 14개의 거대한 기둥들로 이루어졌고 기둥들 사이에는 스크린 벽이 세워졌다. 신전 벽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때문에 초창기에는 트라야누스의 신전으로 추정되었다.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미 만들어져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주 목적은 [[고대 로마]]의 황제들을 찬양하는 동시에 이시스 축제 때 제사를 올리던 장소였다. 필라에 신전에서도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건축물이며 사실상 필라에를 상징하는 건물이기도 하다. [[미이라 시리즈]]에도 필라에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등장할 정도.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