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프란츠 카를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오스트리아의 대공[br]{{{+1 프란츠 카를}}}[br]Erzherzog Franz Karl von Österreich'''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rchduke Franz Karl of Austria.jpg|width=100%]]}}} || || '''이름''' ||프란츠 카를 요제프[br](Franz Karl Josef)|| || '''출생''' ||[[1802년]] [[12월 7일]][br][[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공국]] [[빈(오스트리아)|빈]]|| || '''사망''' ||[[1878년]] [[3월 8일]] (향년 75세)[br][[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오스트리아)|빈]]|| || '''배우자''' ||[[조피 프리데리케|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1824년 결혼 / 1872년 사망),,|| || '''자녀''' ||[[프란츠 요제프 1세]], [[막시밀리아노 1세]], [[카를 루트비히(1833)|카를 루트비히]], 마리아 아나, 루트비히 빅토어|| || '''아버지''' ||[[프란츠 2세]]|| || '''어머니''' ||[[마리아 테레사(양시칠리아)|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 '''형제''' ||[[마리 루이즈]], [[페르디난트 1세(오스트리아 제국)|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레오폴디네]], 클레멘티나, 요제프 프란츠 레오폴트, 마리아 카롤리네, 마리아 아나|| || '''종교''' ||[[가톨릭]]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성 로마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공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인 [[프란츠 2세|프란츠 2세(1세)]]의 삼남이다. [[페르디난트 1세(오스트리아 제국)|페르디난트 1세]]의 동생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멕시코 제국]] [[막시밀리아노 1세]], 중시조 [[카를 루트비히(1833)|카를 루트비히]]의 아버지이다. == 생애 == 1802년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2세|프란츠 2세(1세)]]와 [[마리아 테레사(양시칠리아)|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의 4남 8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5살이던 1807년 4월, 친모 마리아 테레사는 여동생 아말리아 테레지아를 낳고 산후 후유증으로 죽고, 그 해 6월에 둘째형 요제프 프란츠 레오폴트 대공도 8살에 사망하였다. 그 이후 아버지 프란츠 2세(1세)는 두 번 재혼했다. 1824년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 [[바이에른 왕국]]의 공주 [[조피 프리데리케]][*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5녀.]와 결혼하여 순서대로 [[프란츠 요제프 1세|프란츠 요제프]], [[막시밀리아노 1세|막시밀리안]], [[카를 루트비히(1833)|카를 루트비히]], 마리아 아나, 루트비히 빅토어를 비롯한 4남 1녀를 낳았다. 부황 [[프란츠 2세|프란츠 2세(1세)]]의 사후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가 된 형 [[페르디난트 1세(오스트리아 제국)|페르디난트 1세]]는 정신장애가 너무 심각해서 일상생활은 물론, 생식 활동이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에 자녀도 없었던데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거기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해서 정치권에서도 퇴위 요구가 빗발쳤다. 정작 페르디난트 바로 다음으로 계승 서열이 높은 프란츠 카를 대공도 생식능력에만 문제가 없을 뿐 형과 마찬가지로 정신장애가 심각했기 때문에, 아내 [[조피 프리데리케|조피 대공비]]는 남편 대신 지능과 판단력이 정상인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프란츠 요제프]]에게 제위를 넘기라고 해서 결국 오스트리아의 제위는 프란츠 카를을 건너뛰어 그의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차남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가 되었지만 얼마 못가 총살당하면서 참척의 고통을 보았다. 이후 1878년 사망했다. 부인인 조피 대공비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당시 여걸로 활발히 활동했고 며느리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엘리자베트 황후]]에게 시짜짓을 제대로 하여, 후대에도 미친 존재감을 보여줬지만 프란츠 카를 대공이 워낙 조용히 살아서 그렇지 의외로 아내인 조피보다 6년 더 오래 살았다. == 가족관계 == === 조상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파르마]] 여공작[br]마리 루이즈[br]{{{-2 (Marie Louise, Duchess of Parma)}}} ||<|6> [[프란츠 2세]][br]{{{-2 (Francis II)}}} ||<|3> [[레오폴트 2세]][br]{{{-2 (Leopold II)}}} || || [[프란츠 1세#s-1|프란츠 1세]][br]{{{-2 (Francis I)}}} || || [[마리아 테레지아#s-1|마리아 테레지아]][br]{{{-2 (Maria Theresa)}}} || ||<|3>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br]{{{-2 (Maria Luisa of Spain)}}} || || [[카를로스 3세]][br]{{{-2 (Charles III)}}} ||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br]{{{-2 (Maria Amalia of Saxony)}}}[*A [[아우구스트 3세]]의 장녀이자 [[요제프 1세]]의 손녀이다.] || ||<|7> [[마리아 테레사(양시칠리아)|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br]{{{-2 (Maria Theresa of Naples and Sicily)}}} || ||<|3> [[페르디난도 1세]][br]{{{-2 (Ferdinand I)}}} || || [[카를로스 3세]][br]{{{-2 (Charles III)}}} ||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A][br]{{{-2 (Maria Amalia of Saxony)}}} || ||<|3> [[마리아 카롤리나|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br]{{{-2 (Maria Carolina of Austria)}}} || || [[프란츠 1세#s-1|프란츠 1세]][br]{{{-2 (Francis I)}}} || || [[마리아 테레지아#s-1|마리아 테레지아]][br]{{{-2 (Maria Theresa)}}} ||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 '''1남''' || [[프란츠 요제프 1세]][br]{{{-2 (Franz Joseph I)}}} || [[1830년]] [[8월 18일]] || [[1916년]] [[11월 21일]] ||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br]슬하 1남 3녀[* [[기젤라 루이제 마리|바이에른의 레오폴트 왕자비 기젤라]],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 [[마리 발레리 마틸데 아말리|오스트리아-토스카나 대공비 마리 발레리]] 등.] || || '''2남''' || [[막시밀리아노 1세]][br]{{{-2 (Maximiliano I)}}} || [[1832년]] [[7월 6일]] || [[1867년]] [[6월 19일]] || [[벨기에의 샤를로트|벨기에의 샤를로트 공주]] || ||<|3> '''3남''' ||<|3> [[카를 루트비히(1833)|카를 루트비히 대공]][br]{{{-2 (Archduke Karl Ludwig)}}} ||<|3> [[1833년]] [[7월 30일]] ||<|3> [[1896년]] [[5월 19일]] || [[작센 왕국|작센]]의 마르가레타 공주 || || [[마리아 안눈치아타|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눈치아타 공주]][br]슬하 3남 1녀[* [[프란츠 페르디난트]] 등.] || || [[마리아 테레사(포르투갈)|포르투갈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br]슬하 2녀 || || '''1녀''' || 마리아 아나 여대공[br]{{{-2 (Archduchess Maria Anna)}}} || [[1835년]] [[10월 27일]] || [[1840년]] [[2월 5일]] || || || '''4남''' || 루트비히 빅토어 대공[br]{{{-2 (Archduke Ludwig Viktor)}}} || [[1842년]] [[5월 15일]] || [[1919년]] [[1월 18일]] || || == 여담 == * 자신은 황제로 즉위하지 않고 평생을 대공으로 살다 갔지만 아들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초대 황제인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인 차남 [[막시밀리아노 1세|막시밀리안]](멕시코식으로 막시밀리아노 1세).] 가족들이 죄다 [[황제]][* 매형 [[페드루 1세(브라질)|페드루 1세]](브라질의 황제로 다섯째 누나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남편)와 외조카 [[나폴레옹 2세]](첫째누나 [[마리 루이즈|마리아 루도비카]]의 아들로 프랑스의 추존 황제)도 황제거나 황제로 추존되었다.]이거나 [[황후]][* [[프랑스 제1제국]]의 황후였던 첫째 누나 [[마리 루이즈|마리아 루도비카]], 브라질의 황후였던 다섯째 누나 [[마리아 레오폴디네]].]인 인물이다. 프란츠 카를은 황제 [[프란츠 2세]]의 삼남으로서 어릴 때부터 성인이 돼서도 별 존재감이 없었다.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자기 대신 황제가 즉위한 이후에도 영향력이나 인지도면에서는 아내 [[조피 프리데리케|조피 대공비]], 장남 프란츠 요제프, 차남 [[막시밀리아노 1세|막시밀리안]], 맏며느리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엘리자베트 황후]], 장손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루돌프 황태자]]에게까지 밀릴 정도. 이로 인해 말년에 형 [[페르디난트 1세]]와 아내 조피가 사망한 이후에는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이였지만 별다른 관심이 없을 정도로 삼남 [[카를 루트비히(1833)|카를 루트비히]]와 사남 루트비히 빅토어와 더불어 당대 합스부르크 황실에서 존재감이 가장 없는 황족이였다.(...) * 자신의 삼남 [[카를 루트비히(1833)|카를 루트비히]]와는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삼남이며 방계 황족으로 자유롭게 살았고 형들이 후계자가 없어서 다음 황위계승자가 되었으나 결국 자기 대신 아들이나 손자가 황제가 되었으며 현재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계 구성원들이[* 방계인 토스카나 대공가와 헝가리 궁정백 가문은 더 윗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이들의 남계후손이 아니다.] 모두 그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비슷하다. 때문에 프란츠 카를과 카를 루트비히 부자는 현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시조]]가 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프란츠 카를은 살아생전에 두 아들들이 모두 황제가 즉위하는 걸 봤고 한번 결혼해서 사별할 때까지 ~~마누라한테 갈굼받으면서~~ 아내 [[조피 프리데리케|조피 대공비]]와 해로했다. 그러나 카를 루트비히는 총 3번 결혼했으며 이중 첫번째 아내 작센의 마르가레타 공주와 두번째 아내 [[마리아 안눈치아타]] 공주 모두 먼저 떠나보냈고[* 이후 카를 루트비히는 자식뻘이었던 세번째 아내인 [[마리아 테레자|포르투갈의 마리아 테레자]]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고 그녀보다 먼저 사망했다.] [[카를 1세|자신의 손자]]는 물론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분류: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분류:오스트리아의 왕자]][[분류:1802년 출생]][[분류:1878년 사망]][[분류:빈 출신 인물]][[분류:카푸친 교회 안장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