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최춘명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고려의 군인]][[분류:해주 최씨]][[분류:1250년 사망]] [include(틀:고려사)] ---- ||<-2> '''{{{#gold 고려국 자주부사[br]{{{+1 최춘명}}}}}}''' || || '''{{{#gold 이름}}}''' ||춘명(椿命)|| || '''{{{#gold 본관}}}''' ||[[해주 최씨]] (海州 崔氏)|| || '''{{{#gold 사망지}}}''' ||[[인천|인주]] [[강화도]]|| || '''{{{#gold 생몰연도}}}''' ||? ~ 1250년 9월 8일(음력 8월 11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최춘명(崔椿命)은 [[고려]]의 군인, 장군이다. == 상세 == 고려의 대명문인 해주 최씨 가문 출신으로, [[여몽전쟁]]당시에 장군으로 참전하였다. [[고종(고려)|고종]] 18년 [[여몽전쟁#s-3.1|몽골의 제1차 침입]] 당시 자주(慈州)에서 서쪽 25리 근방에 위치한 [[제1차 자모산성 전투| 자모산성에는 자주부사(慈州副使) 최춘명(崔椿命)이 성을 포위한 몽골군에 맞서 항전했다.]] 최춘명을 중심으로 고려 백성들과 고려군이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몽골군이 쉽게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231년 12월 [[살리타이]]가 이끄는 군대가 개경을 포위하자 고려 조정은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내시낭중(內侍郞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 최춘명에게도 항복할 것을 권유했으나 최춘명은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살리타이와 [[회안공|회안공(淮安公) 왕정(王侹)]]이 강화 협상을 진행하던 중에 살리타이가 왕정에게 "자모성만 항복 안 하고 뻐기고 있으니 사람을 보내서 항복시키시죠."라고 하자, 왕정은 [[대집성]](大集成)과 몽골 관리를 자모성으로 보낸다. 대집성은 최춘명에게 "좋은 말 할 때 빨리 항복해라!!"하지만 최춘명은 역시나 항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최춘명에게 화가 난 대집성은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서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최이(崔怡)]]에게 최춘명을 모함했고, 이를 들은 최이는 최춘명에게 사형을 내리는 걸 허락했다. 신하들은 할 수 없이 최이의 말에 수긍했지만, 유승단(兪升旦)은 결코 최춘명을 죽여선 안 된다며 반대를 했다. 하지만 최이는 이를 무시하고 내시(內侍) 이백전(李白全)을 보내 최춘명을 처형하게 한다. 최춘명은 성문을 열고 나와 어명을 받고 항복했으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얼굴빛과 행실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를 본 [[다루가치|몽골 관리]]는 "이 자가 우리 명령을 어겼으나 당신들에게는 [[충신]]이니 죽이지 않겠다. 그대들이 우리와 화친을 약속했으니 성의 충신들을 죽이는 게 옳겠는가?"라며 오히려 최춘명을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에는 석방되었다. 이후 논공행상에서 1등공신이 되었고, 추밀원 부사로 발탁되었다. 1250년에 사망했고 관직은 위위경(衛尉卿)까지 올랐다. == 대중매체에서 == 드라마 [[무신(드라마)|무신]]에서도 등장했다. 배우는 임종윤. 드라마에서는 본래 [[이장용]]과 함께 [[최향]] 휘하의 장수로, 최향 실각 당시 [[김경손]]의 간청으로 이장용과 함께 살아남았다. 몽고와의 전쟁 중 화의를 맺어서 휴전이 되었음에도 몽고군에게 성문을 열지 않아 왕명을 거역한 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아이러니하게 [[살리타이]]가 '''"몽고에게는 거역했지만 고려에게는 충신이므로 죽이지 말라"'''며 구해줬다.[* 해당 내용은 드라마상 내용이며, 실제는 최우가 사람을 시켜 [[서경(고려)|서경]]에서 그를 처형하려고 하는데, 마침 지나가던 몽고 관리가 드라마 상 살리타이가 한 말과 비슷한 말을 하여 살아났다고 한다.] 이후로는 이장용과 함께 [[고종(고려)|고종]] 편에 선 사람으로 나오다가 [[최항]] 집권기에 사망한다.[* 식사하다가 급체해서 사망했다고 언급된다.] 박시백의 고려사에서는 중간 페이지에서 박서와 "항복? 그게 뭐지? 자넨 아나?"/"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라는 만담을 주고 받는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