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최난수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노덕술최난수.jpg|width=100%]]}}}|| ||'''친일 경찰 [[노덕술]](앞줄 왼쪽의 안경 쓴 사람)과 최난수(앞줄 오른쪽의 양복 입은 사람)''' || 崔蘭洙 1909~?[* 정확한 몰년은 미상이나,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9011500209205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01-15&officeId=00020&pageNo=5&printNo=17622&publishType=00020y|이 기사]]에 따르면 1978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 제국과 대한민국의 경찰, [[고문기술자]]. 일제강점기에 경찰이었다. 직급이 낮아서 각종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서는 제외되나 각종 잔인한 방법으로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다. 광복 후 [[정판사 사건]] 조작에 가담하고 [[제주 4.3 사건]] 당시 학살을 자행했으며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을 계획했다. == 생애 == 1909년 충청북도 영동 출생. 1939년 전북 고창경찰서 경부보를 지냈다.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발발 당시 본정경찰서 수사주임으로 재직했다. 정판사 사건 당시 노동자들과 독립운동가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 등을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공적(고문기술)을 인정받아 제1관구경찰청 수사주임으로 영전하고 8월에는 제3관구경찰청 수사과장으로 전임했으며 1947년 동대문경찰서 수사주임을 거쳐 1948년 수도관구경찰청 사찰과 부과장이 되었다. [[제주 4.3 사건]]이 발발하고 [[조병옥]] 경무부장이 각 경찰관구에서 차출한 응원경찰 약 1500명을 파견할 때 제주비상경비사령부 직속 특별수사대 대장의 자격으로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를 사찰했다. 그리고는 사태의 완전한 수습을 위해서는 강력 무장부대의 파견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1949년 11월 제주도에 내려가 무차별 강경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그가 지휘한 특별수사대는 고문과 학살로 악명높았다.[[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92112996&navType=by|출처]] 한편 수도관구경찰청 수사과장이 된 최난수는 1948년 10월 하순 전임자 [[노덕술]]의 지휘 하 수도관구경찰청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중부경찰서장 박경림과 함께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주도한 국회의원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1월 초순 노덕술로부터 소개받은 전문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하여, 친일파 처벌에 적극적이던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부위원장 김상돈 및 핵심 관계자 곽상훈, 권승렬, 김병로, 김웅진, 김장렬, 노일환, 오택환 등을 비롯하여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의원 지청천 등 15명의 국회의원을 납치하여 살해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인 1949년 1월에도 백민태에게 자금과 무기를 주면서 계획 실행을 재촉했다. 그러나 백민태가 자수함에 따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92112996&navType=by|출처]] 그리하여 최난수는 1월 25일 노덕술, 홍택희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박경림은 2월 1일 구금되었다. 그러나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벌어졌다. 6월 20일 개정된 1심 결심 공판에서 재판부는 [[노덕술]], 박경림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최난수, 홍택희에게는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최난수와 홍택희는 7월 26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2심 결심 공판에서는 노덕술, 박경림은 무죄, 최난수와 홍택희는 벌금 20만 원으로 감형되어 석방되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92112996&navType=by|출처]] 이후 최난수는 경찰로 복귀하여 1952년 남원경찰서장, 1954년 전남경찰서 수사과장, 1956년 춘천경찰서장, 1958년 김제경찰서장, 1961년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 중앙분실장[* 정확히는 [[5.16 군사정변]] 전인 1961년 2월에 임명된 거라고 한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1020900209201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1-02-09&officeId=00020&pageNo=1&printNo=11997&publishType=00020|1961년 2월 9일 동아일보 기사]]]을 지낸 후 퇴직했다.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92112996&navType=by|출처]] 이후에는 1963년에 [[신정당]]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 외에는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았다. 참고로 그의 아들인 [[최극]]은 1976년에 [[신민당(1967년)|신민당]] 충북제3지구당 위원장으로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를 상대로 가처분 신청을 한 바가 있으며, 그의 조카인 [[최환]]은 [[검사]]로 일하며 부정한 고문경찰이던 큰아버지와는 달리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분류:일본 제국 경찰/인물]][[분류: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분류:1909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영동군 출신 인물]][[분류:제주 4.3 사건]]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