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제1차 양맥 전투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 [[전투 목록/한국사]] [include(틀:고구려의 대외전쟁)] ||<-3> {{{+1 '''제1차 양맥 전투[br]第一次 梁貊戰鬪'''}}} || || '''시기''' ||<-2> 244년 8월 || || '''장소''' ||<-2> [[고구려]], 양맥[* 위치는 불명으로, 현재 [[중국]] 요양시 태자하 상류 또는 중국 [[요녕성]] 번시 시에 위치한 [[오녀산성]]의 서측 혼강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 ||<:> '''원인''' ||<-2> [[공손연]] 멸망 이후, [[고구려]]와 [[위(삼국시대)|위(魏)]]의 관계 악화. || ||<:> '''교전국''' || [[고구려|[[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40px]]]] '''고구려'''[br]{{{-2 (공격)}}}[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blue; font-size: 1.2em" {{{#white '''승'''}}}}}} || '''위'''[br]{{{-2 (방어)}}}[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red; font-size: 1.2em" {{{#white '''패'''}}}}}} || ||<:> '''지휘관''' || [[고구려|[[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40px]]]] '''[[동천왕]]''' || '''[[관구검]]''' || ||<:> '''병력''' || 20,000명 || 10,000명 ||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사상자 : 3,000여 명 || ||<:> '''결과''' ||<-2> 고구려의 승리 || ||<:> '''영향''' ||<-2> [[고구려]]의 승리로 인한 [[동천왕]]의 방심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구려-위 전쟁]] 중 양맥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로 [[동천왕]] 대인 244년 8월에 일어났다. == 전개 == >다시 병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겨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45&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제17권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 244년 8월 [[동천왕]] 시기, [[관구검]]이 1만의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에 쳐들어오자 이에 맞서 2만의 보병과 기병을 동원해 양맥 계곡에서 위군 3천여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후 맞붙은 [[비류수 전투]]에서 반대로 대패하고 수도까지 함락당하는 굴욕을 겪게 되었다. == 대중매체 == 소설 우리나라 삼국지에서는 관구검이 보낸 장군 장문이 비류수에서 패배하고 장군 허일에게 군사 1만을 이끌고 강을 따라 올라가서 양맥을 지나 고구려군의 후위를 공격하도록 지시한다. 허일이 양맥의 골짜기를 지날 때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았고 허일이 거세게 저항해 고구려군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3천의 병사를 잃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양맥 전투, version=55)] [각주] [[분류:고구려]][[분류:한국사/전투]][[분류:삼국시대(중국)/전투]][[분류:한중관계]][[분류:북중관계]][[분류:동천왕]]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