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정성왕후 (r5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조선 왕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정성왕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빈)]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영조의 정비[br]{{{+1 정성왕후 | 貞聖王后}}}'''}}}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고양_서오릉_홍릉_능침(항공).jpg|width=100%]]}}} || ||<-2> {{{#ffd400 {{{-2 홍릉 전경}}} }}} || ||<|2> '''출생''' ||[[1693년]] [[1월 2일]][br]{{{-2 ([[음력]] [[1692년]] [[12월 7일]])}}} || ||[[조선]] [[한성부]] [[가회동|가회방]] 사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일대) || ||<|2> '''사망''' ||[[1757년]] [[3월 23일]]^^([[음력]] [[2월 15일]])^^[* 이 날은 [[영조]]의 서9녀인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이 먼저 죽은 날이기도 한데, 정처(正妻)와 사위가 한 날에 죽은 줄초상이 난 것. 근데 [[영조]]는 중궁전의 상례를 주관해야할 때에 사위가 죽어 [[화완옹주|딸]] 집에 가겠노라고 고집부려 난리가 나기도 했다. [[영조]]와 정성왕후 간의 사이가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br]{{{-2 (향년 65세)}}} ||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관리합[* [[창덕궁 대조전]] 서쪽 행각의 방 중 하나][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 || '''능묘''' ||[[홍릉]](弘陵) || ||<|4>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세제빈}}}''' || ||[[1721년]] [[11월 4일]] ~ [[1724년]] [[10월 5일]] || ||'''{{{#ffd400 조선 왕비}}}''' || ||[[1724년]] [[10월 5일]] ~ [[1757년]] [[3월 23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대구 서씨]] || || '''부모''' ||부친 달성부원군 [[서종제]] (達城府院君 徐宗悌, {{{-3 1656 ~ 1719}}}) 모친 잠성부부인 [[우봉 이씨]] (岑城府夫人 牛峰 李氏, {{{-3 1660 ~ 1738}}}) || || '''형제자매''' ||2남 4녀 중 3녀 || || '''배우자''' ||[[영조]] || || '''자녀''' ||{{{#!folding 양자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효장세자|진종]](眞宗, {{{-3 1719 ~ 1728}}}) 차남 - [[사도세자|장조]](莊祖, {{{-3 1735 ~ 1762}}})}}} || || '''봉작''' ||달성군부인(達城郡夫人) || || '''전호''' ||[[창경궁 문정전|휘령전]](徽寧殿) || || '''존호'''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br](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 || || '''휘호''' ||단목장화(端穆章和) || || '''시호''' ||'''정성왕후(貞聖王后)'''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21대 [[조선/왕사|국왕]] [[영조]]의 [[왕비|정비]]. 조선의 역대 왕비 중 유일하게 왕세제빈에서 중전으로 진봉한 왕비이다. 성씨는 [[달성 서씨|서씨]]이며 본관은 [[대구광역시|대구]] [[달성군]]이다.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이며 [[1692년]](숙종 18년)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년), 12살의 나이에 11살 [[영조|연잉군]] 이금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책봉되고, [[1721년]](경종 1년), [[조선]] 20대 [[조선/왕사|국왕]] [[경종(조선)|경종]]이 이복동생 [[영조|연잉군]] 이금을 [[왕세제]]로 책봉함에 따라 '세제빈(世弟嬪)'이 된다. [[1724년]](경종 4년), [[경종(조선)|경종]]이 갑작스럽게 [[죽음|승하]]하였고, 이에 따라 임금의 상징인 [[조선/왕사|어보]](御寶)를 이어받은 남편 [[영조|연잉군]]이 [[조선/왕사|왕위]]에 오르자 정식 [[왕비]]가 되었다. 남편과의 불화로 [[영조]]와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으며 [[창덕궁 대조전]] 관리각(관리합)에서 [[1757년]](영조 33년) 2월 15일, 66세의 나이로 [[사망|승하]]하였다. [[사망|승하]]할 때까지 무려 33년을 재위하여 '''역대 조선 왕비들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왕비였다.''' 능호는 [[홍릉]](弘陵)이다. == 생애 == === 세제빈 시절 === [[야사(역사)|야사]]에는 정성왕후가 연잉군 시절의 [[영조]]에게 [[결혼|시집]]온 첫날 있었던 일 때문에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혼|혼인]] 첫날밤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이 참 곱다"며 감탄했는데 정성왕후가 무심코 "반가에서 태어난 덕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영조]]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보기에는 이게 소박맞을 만큼 잘못한 말인가 싶겠지만 [[영조]]에게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마누라의 대답을 출신이 미천한 자기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욕]]한 것으로 잘못 받아들인 것이다. [[숙빈 최씨]]는 '''천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출신이 불분명해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손마디와 뼈마디도 굵고 손이 되게 거칠었다고 한다. 정성왕후의 조카인 서덕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서 [[영조]]가 정성왕후를 미워하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서덕수는 다름아닌 [[경종(조선)|경종]]을 죽이고 [[영조|연잉군]]을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의 주모자 중 하나였으며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두시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덕분에 [[영조]]는 이복형 [[경종(조선)|경종]] 앞에서 [[폐위|폐세제]]를 자처하며 무릎 꿇고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영조|저하]]를 위해 모의한다는 서덕수의 발언을 세상에 알린 게 다름아닌 [[영조]]인 만큼 저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삼수의 옥]]을 수사하던 도중에 [[목호룡]]의 고변에서 [[영조]]의 첫 아들 [[효장세자]]를 낳은 [[정빈 이씨]]의 [[죽음]]도 서덕수가 [[경종(조선)|경종]] [[암살]]을 위해 구한 [[독|독약]]의 시험 대상 겸 정성왕후의 경쟁자 제거를 위해 [[정빈 이씨]]에게 [[독]]을 먹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 왕비 시절 === [[1737년]](영조 13년) 3월 10일 <[[승정원일기]]> 기사에서는 [[신하]]들이 "중궁전에 들어가는 진상품보다 [[효순왕후|현빈궁]][* [[효장세자]]의 [[세자빈]]인 [[효순왕후|현빈 조씨]]의 거처다.]에 들어가는 진상품이 많아 중궁전의 체면이 맞지 않으니 진상품을 늘리자"고 하자 "[[효순왕후|현빈궁]]에 기거하는 나인이 많아 그런거"라며 거부하고 "중궁전에 들어가는 약에 대한 표지를 내리는게 매번 늦어 중궁전으로 들어가는 약이 들어가는 것이 매번 늦어진다"고 하자 "도제조가 [[대구 서씨|서씨 일가]]의 서명균인데 설마 늦겠냐"며 "이미 이전에 서명균에게 중궁전의 약은 그들 집안일이니 알아서 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고 변명했다. 신료들은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요? 뭐 확인해보겠습니다."라는 반응이었다. 두 부부 사이가 최악인 건 [[궁궐]] 내에서도 공공연한 일이었는지 정성왕후는 [[사망|승하]]하기 14년 전인 [[1743년]](영조 19년)부터 [[영조]]에게 통증을 [[호소]]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담석|담증]] 가지고 [[꾀병|엄살]] 부린다"고 말을 씹어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용태(병의 증상)를 진찰한 의관도 애초에 "[[영조]]가 자기 마누라 얘기라면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니 [[영조]]를 모시는 [[환관|내시]]에게 대신 보고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당시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영조의 부부관계가 파탄났다는 걸 다들 알았다는 뜻이다.] [[1752년]](영조 28년) 11월 23일에는 "중전의 [[회갑]]인데 하례를 드리게 하자"는 [[우의정]] [[김상로]]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사도세자]]에게 "네 엄마[* 사도세자를 직접 낳은 생모는 [[영빈 이씨]]지만, 왕의 자녀는 모두 공식적으로 왕비의 자녀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된다.]의 [[회갑]]이랍시고 잔치까지 크게 벌일 것이 있느냐"는 내용의 글을 써서 보내는 일도 있었다. >'''우의정 김상로가 중궁전의 회갑에 하례를 드릴 것을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다''' >---- >[[영조|임금]]이 대신과 예조의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중궁전의 [[회갑]]에 하례를 드릴 것을 극력 청하였는데, [[영조|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청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글을 지어 춘방관(春坊官)으로 하여금 [[사도세자|세자]]에게 가서 전하도록 하였다. >문학 '''박사눌(朴思訥)'''이 가서 고한 뒤에 또 청대하니, 임금이 불러 물었다. '''박사눌'''이 말하기를, >>"[[사도세자|동궁]]이 이 하교를 받고 매우 [[실망]]하며 말하기를, 내가 평소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고는 이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하니, [[영조|임금]]이 말하기를, >>"지나치구나." >하였다. >---- >-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1752년]], 청 건륭(乾隆) 17년) 11월 23일 (경진) 1번째기사.''' 그로부터 15일 후 [[영조]]는 [[양위]] 파동을 벌여 [[홍역]]을 앓다 나은 지 1달밖에 안 됐던 병약한 [[사도세자]]를 눈 밭에서 양위를 한다는 전교를 거두어 달라게끔 [[석고대죄]] 제대로 시켰다. === 사망 후 === [[1757년]](영조 33년), [[사망|승하]] 직전이나 당시, 《[[영조실록]]》과 《[[한중록]]》에 따르면 심하게 [[각혈]]을 하고 팔다리가 심히 부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현대로 치면 [[위궤양]]에 [[부정맥]]이 겹쳐서 세상을 떠난 걸로 보이는데 당시 남편 [[영조]]의 태도가 그야말로 [[막장]]이다. >'''중궁이 피를 토하여 약방에서 주원에 옮겨 직숙하다''' >---- >중궁전(中宮殿)이 편찮은 까닭에 약방에서 주원(廚院, [[사옹원]])에 옮겨 직숙하였다. >당시 곤전(坤殿)이 [[각혈|피를 토한 것]]으로 인하여 원기(元氣, 심신의 활동력)가 갑자기 가라앉았는데, >연달아 삼다(蔘茶, 인삼차)를 올렸지만 조금의 동정(動靜)이 없었으므로, 상하(上下)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 >- '''《[[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1757년]], 청 건륭(乾隆) 22년) 2월 14일 (병자) 1번째기사''' [[영조]]는 죽은 마누라의 빈소를 지킬 생각은 안 하고 우연히 같은 날 [[사망]]한 사위 정치달([[화완옹주]]의 남편)의 문상을 갔다. 이는 궁중 예법에도 어긋나고 [[인간]]적으로도 너무 지나친 처사라 대신들과 대간이 경악하여 심하게 반대했지만 [[영조]]는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체차(遞差)[*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해버리면서까지 인정머리 없이 강행했다. >'''일성위 정치달이 졸하자 곡반을 하고, 이를 만류한 삼사 신하를 체차시키다''' >---- >이날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 [[화완옹주]]의 남편)'''이 [[사망|졸]](卒)하였다. [[예조|예단]](禮單)이 먼저 들어오고 조금 있다가 중궁전(中宮殿)이 [[죽음|승하]]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장차 곡반(哭班)에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좌의정과 우의정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중략) >>"이렇게 망극(罔極)한 시기를 당하여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망극한 일을 하시려 합니까?" >하니, [[영조|임금]]이 잇달아 엄중한 하교를 내렸으나, '''이최중(李最中)'''이 눈물을 흘리며 더욱 힘껏 간쟁하였다. >[[영조|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이최중'''에게 물러나도록 명하였는데, '''이최중'''이 말하기를, >>"신은 청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감히 물러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최중'''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하고, 인해서 합문(閤門)을 닫고 마침내 보련(步輦)으로 '''연영문(延英門)'''을 나갔다. >대간(臺諫)과 옥당(玉堂)에서 앞으로 나와 다투어 고집하자, 임금이 또 모두 체임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이득종(李得宗)'''이 말하기를, >>"신의 관직을 체임하더라도 전하의 이번 행차는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영조|임금]]이 삼사의 신하를 '''중도 부처(中途付處, 유배 죄인의 평소 공로 등으로 정상 참작하여 중간 지점에 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유배형)''' 하도록 명하였다가, 조금 뒤에 단지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중략) >---- >- '''《[[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1757년]], 청 건륭(乾隆) 22년) 2월 15일 (정축) 3번째기사.''' 이후 불과 한 달 후인 3월 26일, 대왕대비 [[인원왕후]]마저 [[죽음|승하]]하면서 일종의 완충장치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그런 후 [[조선]]사에 [[임오화변|듣지도 보지도 못한 비극적 스캔들 사건]]이 일어난다....'''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한성부|한양]]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 지역에 묻힌 건 [[영조]]의 뜻이 아니라 [[정조(조선)|정조]]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를 배려한 탓이었다.[* 과거 [[문정왕후]]도 "[[중종(조선)|중종]]이 [[장경왕후]]랑 묻힌 꼴은 못 보겠다"고 이장을 했으나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곳이라 무산되었다. [[문정왕후]]나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나 [[중종(조선)|남]][[영조|편]]에 대한 정은 있었던 모양.] [[영조]]는 아내를 떠나보낸 후 --워낙 변덕이 심한 분이라-- 뒤늦게나마 미안했는지 친히 행장까지 쓰고 오히려 정성왕후 옆에 묻히려고 빈 자리를 마련했다. [[정조(조선)|정조]]는 지금의 [[동구릉|원릉]] 자리에 [[영조]]를 장사지냈는데 이 자리는 원래 [[효종(조선)|효종]]이 매장되었다가 비가 샐 우려가 있다 해서 천장된 흉지이자 파묘 자리였으며 석물이 해를 거르지 않고 기우는 등 최악에 가까운 자리였다. 더군다나 "[[경종(조선)|경종]]을 여기에 장사지내자"는 신하들의 주청에 [[영조]]는 "[[장례식|국장]]에 어떻게 파묘 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적도 있었다. [[정조(조선)|손자]]에 의해 민간에서도 묏자리로 기피하는 파묘 자리에 잠든 것. 물론 이것만으로 손자인 [[정조(조선)|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에게 불효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할아버지인 [[영조]]에 대한 효성 하나는 지극했다. 나중에 "[[경종(조선)|경종]]에게 신하 노릇하기 싫었다"는 신하를 보며 "우리 할아버지([[영조]])가 형님 되시는 [[경종(조선)|경종 대왕]]께 한 우애가 얼만지 아느냐"며 더욱 분노했다. == 가계 == * '''친정([[달성 서씨]])''' * '''아버지 : 신천군수 증 영의정 달성부원군 효희공(信川郡守 贈 領議政 達城府院君 孝禧公) 서종제(徐宗悌)''' * '''어머니 : 잠성부부인 [[우봉 이씨|이씨]](岑城府夫人 李氏)''' * 큰오빠 : 증 이조판서(贈 吏曺判書) 서명백(徐命伯) * 올케언니 : 부인 [[여주 이씨|이씨]](夫人 李氏) * 작은오빠 : 지평(持平) 서명휴(徐命休) * 큰언니 : 부인 [[달성 서씨|서씨]](夫人 徐氏) * 형부 : 이조판서(吏曹參判) 이중경(李重慶) * 작은언니 : 부인 [[달성 서씨|서씨]](夫人 徐氏) * 형부 : 신정집(申正集) * 여동생 : 부사부인 [[달성 서씨|서씨]](牧使夫人 徐氏) * 제부 : 부사(牧使) 임거(林蘧) * '''시가([[조선/왕실|전주 이씨]])''' * '''시조부 : [[현종(조선)|현종]](顯宗) 이연(李棩)''' * '''시조모 : [[명성왕후]] [[청풍 김씨|김씨]](明聖王后 金氏)''' * '''시아버지 : [[숙종(조선)|숙종]](肅宗) 이순(李焞)''' * '''시어머니 : [[인원왕후]] [[경주 김씨|김씨]](仁元王后 金氏)''' * '''배우자 / 자녀''' * '''남편 : [[영조]](英祖) 이금(李昑)''' *''' 양자(장남) : ^^(추존)^^[[효장세자|진종 소황제]](眞宗昭皇帝) 이행(李緈)''' * 양며느리 : ^^(추존)^^[[효순왕후|효순소황후]] [[풍양 조씨|조씨]](孝純昭皇后 趙氏) * '''양자(차남) : ^^(추존)^^[[사도세자|장조 의황제]](莊祖懿皇帝) 이선(李愃)''' * 양며느리 : ^^(추존)^^[[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 [[풍산 홍씨|홍씨]](獻敬懿皇后 洪氏) * 양손자 : ^^(추존)^^[[의소세자]](懿昭太子) 이정(李琔) * '''양손자 : ^^(추존)^^[[정조(조선)|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 이산(李祘)''' * 양손녀 : [[청연공주]](淸衍公主) * 양손녀 : [[청선공주]](淸璿公主) * 양서며느리 : [[숙빈 임씨|숙빈]] [[부안|임씨]](肅嬪 林氏) * '''양서손자 : 충정공(忠貞公)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 * '''양서손자 : 충헌공(忠獻公)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 * 양서며느리 : [[경빈 박씨(장조)|경빈 박씨]] [[밀양 박씨|박빙애]](景嬪 朴氏/朴彬愛) * 양서손녀 : [[청근옹주]](淸瑾翁主) * 양서손자 : 효민공(孝愍公)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 * 양서며느리 : 수칙 이씨(守則 李氏) == 여담 == * [[영조|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라 [[단명]]했을 거라 오해하겠지만 실제로는 장수했다. [[1757년]](영조 33년), [[사망|승하]]했을 때 그의 [[나이]]는 만 65세. [[영조|남편]]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것이다. [[임오화변]]이 발생했을 당시 [[영조]]와 [[사도세자]]가 마지막으로 찾은 장소가 바로 정성왕후의 위패가 있는 '''[[창경궁 문정전|창경궁 휘령전]]'''이었다. 두 사람이 위패에 절을 한 직후 갑자기 [[영조]]는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가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지간 사이에 달려 있다.고 말하였다."고 주장하며 궁을 봉쇄하고 [[사도세자]]를 처단하게 된다. * 남편 [[영조]]와는 사이가 안 좋다 못해 최악이자 [[막장]] 그 자체이다.[* 똑같이 정비이면서 자식을 못낳았던 [[선조(조선)|선조]]의 왕비 [[의인왕후]]도 남편 선조와 서먹했다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다.][* 놀랍게도 광해군과 사도세자 둘 다 자신을 아껴주던 법적 어머니이자 정비([[의인왕후]], 정성왕후)와 사이가 좋았으면서 그 두 명이 사망하면서 궁궐 내에 의지할 데가 없어지고 아버지에게 핍박받아서 결국 삐뚤어지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도세자는 여기에 할머니인 인원왕후까지 잃고 광해군보다 더 심한 핍박을 받아 정신질환까지 앓고 있던 상황이라 그 정도가 더 심했지만...] [[영조]]는 아예 정성왕후를 [[창덕궁]] 변두리로 보내고 자기는 [[경희궁]]에 있으면서 문안이나 안부 등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자식이 된 사도세자를 그녀한테서 강제로 떼어놓아 법적으로 정성왕후가 어머니임에도 직접 키우지도 못하게 했다. 정성왕후의 [[환갑]] 잔치도 [[숙의 문씨]]에 의한 건방진 말꼬라지 때문에 [[인원왕후]]가 버르장머리 고쳐주겠다고 [[사도세자]]와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가 보는 앞에서 [[회초리]]로 종아리 때리다가 [[영조]]한테 발각돼서 역성을 들다가 결국 파토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는 [[눈물]]을 왈칵 쏟으며 통곡하는데 자기는 느릿느릿 와서는 슬퍼하지도 않고 그 와중에 슬퍼하는 [[사도세자]]더러 "니 [[옷]] 꼬라지[* 옷 댓님(바지 밑에 묶는 끈)을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면서 풀린 건데, 아버지라는 [[영조|작자]]는 돌아간 정성왕후에 대한 조문은 커녕 늦게 와서는 슬퍼하는 기색도 없고 마침 조문하면서 엎드려 우는 세자의 통곡소리를 듣고 꼴뵈기 싫었는지 옷 댓님 풀린거 가지고 꼬투리 잡아 뭐라 한 것이다.] 그게 뭐냐?"라고 꾸중만 했다. 당연히 이는 사도세자한테 심적으로 충격을 주었는데 세자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말도 못했다. * [[사도세자]]와는 친아들이 아님에도 의외로 사이가 좋았다. 자녀를 낳지 못해 후궁 [[영빈 이씨]] 소생인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돌봤다고 한다. 실제로 정성왕후는 살아 생전에 [[사도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생모였던 [[후궁]] [[영빈 이씨]]의 자식에서 중전 정성왕후의 자식으로 [[양자(가족)|양자]] 입적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시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법적인 할머니 되는 [[인원왕후]]와 더불어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아끼고 보호하는 인물이었으며, [[사도세자]] 역시 [[편집증]]적인 스타일과 냉혹한 성격의 [[영조]]한테 [[학대]]당하는 핍박 속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어머니 정성왕후에게 의지하며 극진히 대우했다고 한다. 정성왕후가 [[사망|승하]]하자 [[사도세자]]가 밖에서 "소자가 왔다"며 엎드려 통곡했을 정도다. 어찌보면, 정성왕후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중압감을 주는 처지를 보고 [[동병상련]]을 느꼈을 수도 있다. 다만 말이 아들이지 [[사도세자]]가 [[영조]]의 마흔둥이(늦둥이 아들)었기 때문에, 정성왕후와도 나이가 40년 이상 차이가 나서 당시 기준으로는 할머니와 손자뻘이 된다.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와도 그럭저럭 관계가 괜찮았다고 한다. * 종합적으로 보면 [[폐위|폐비]]가 되지 않았을 뿐, 내쫓기지 않은 [[조선]]의 [[왕비]] 중 제일 비극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십 년 동안 남편인 [[영조]]에게 계속 홀대받은 걸로도 모자라, [[영조]]는 정성왕후의 [[죽음]]을 그녀가 친자식처럼 아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말실수를 한 것이든 조카 때문에 곤란에 처한 것이든 둘 중 어느 것이 사실이든, 정성왕후가 크게 잘못한 것은 사실상 없는데도 [[영조]] 혼자 착각하고 의심하여 홀대를 수 십 년 동안이나 받았다. 어찌보면 못난 [[연산군|남편]] 탓에 [[폐비 신씨|폐비]]가 되기는 했지만 정작 자신은 [[연산군|남편]]과 사이가 괜찮았던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여러 명 낳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던 데다가 [[사화]]를 일으키며 미쳐 돌아가는 [[연산군]]에게 충언을 해도 무사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에 [[연산군]]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강화]] [[교동도]]에 유배, 위리안치당하여 병으로 죽기 직전에 "중전([[폐비 신씨]])이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고 한다.]보다 여자로서는 더 비참했다고 볼 수 있다. == 대중매체에서 == 무수한 [[영조]]의 출연작들에 비해 출연 빈도가 적다. 거꾸로 말하면 이하의 작품들은 그나마 최소한의 고증과 구색엔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 드라마 === *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 편 - [[김애경]] * [[대왕의 길]] - 문예지 비록 역사처럼 [[영조]]에게 홀대받지만 작중 [[인원왕후]]와 함께 [[영조]]에게 끊임없이 간언을 하며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갈등과 문제들을 중재, 해결하려 노력한다. 그 중에서도 26화에서 화재 사건을 계기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세자 시키려는 것을 [[인원왕후]]와 함께 간곡히 간언하여 막고 후에 같이 [[사도세자|세자]]를 위로하며 슬픔을 나누는 걸 마지막으로 [[인원왕후]]와 함께 극에서 퇴장한다. 이후, [[인원왕후]]와 함께 직접적인 [[사망|승하]]장면이 생략되었기 때문.[* 영화 [[사도(영화)|사도]]에서처럼 간접적으로 죽은게 언급된다.] * [[동이(드라마)|동이]] - 신규리(아역), 정모레(성인) 연잉군 시절 [[영조]]와 갓 혼례를 맺은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나오며[* 극에서 혼례를 맺기 전 [[숙빈 최씨|동이]]가 직접 아들인 [[영조|연잉군]]의 혼 처를 구하기위해 서종제 집으로 찾아가 여식을 청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딸에게 맑고 총명한 눈빛을 지녔다고 칭찬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영조]]에게 홀대받고 미움받는 사이였다는 건 드라마와 성격이 완전 틀리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실제 역사를 대입해 보았을 때 생모인 [[숙빈 최씨]]의 의중을 연잉군 시절인 [[영조]]가 모를 수 있을까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 별다른 역할없이 [[인원왕후]]에게 문후(문안 인사)를 올리러 가는 모습 정도로만 등장한다. 마지막화에서 [[영조]]가 [[조선/왕사|왕위]]에 오르자 함께 [[왕비|중전]]의 자리에 오른다. * [[해치]] - [[최수임]] === 영화 === * [[상의원]] - [[박신혜]] * '''[[사도(영화)|사도]] - [[박명신]]''' 2010년대에 [[임오화변]]을 다룬 대표 작품인 이 영화를 통해 정성왕후를 알게 된 사람이 적지않게 많다. 실제 역사대로 초반부에 시어머니인 [[인원왕후]]와 함께 의붓아들인 [[사도세자]]를 어린 시절부터 매우 귀여워하며 예뻐한다. 또한, 남편 [[영조]]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점도 묘사된다. 극중에서 [[영빈 이씨]]가 [[영조]]의 성격이나 버릇을 갓 시집온 [[혜경궁 홍씨|세자빈 홍씨]]에게 알려주는 부분에서도 자기는 총애받지 못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 씁쓸해한다.[* 이는 영화 내내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분명히 부부인데도 [[영조]]와 서로 직접적으로 대화하는 장면이 단 한개도 없다.'''] 하지만 [[영빈 이씨]]가 [[환갑]] 잔치까지 건의해줄 만큼 대접을 해주는지라, 둘 사이엔 큰 다툼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낸다. 노년에 거동이 힘들 때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한 것도 다름아닌 [[영빈 이씨]]다.[* 심지어 배역을 맡은 [[박명신]]은 [[영빈 이씨|영빈]] 역할을 맡은 [[전혜진]]이 추천해서 영화에 합류했다고 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대왕대비인 [[인원왕후]]보다 한 달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영화 속에서는 [[인원왕후]]가 먼저 시름시름 앓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며 [[인원왕후]]와 달리 [[죽음|승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장면이 없다.[* [[인원왕후]] 상중에 [[영조]]가 [[사도세자|세자]]를 [[폐위]]시키면서 꾸짖을 때 [[죽음|중전]]이 죽었다는걸 언급한게 다다.] [[사도세자]]의 [[정신병|광증]]이 발발한 이유에는 자신을 아껴주던 정성왕후의 [[죽음]]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나마 등장한 이 영화에서도 실제 역사보다 비중이 낮게 책정된 편.[* 다만 극 중 영빈의 환갑잔치를 치르면서 간접적으로 정성왕후를 영빈 이씨에게 투영하는 행동을 보였다.][* 정성왕후가 얼마나 [[사도세자|세자]]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는가를 자세히 보려면 드라마인 [[대왕의 길]]을 보면 좋다.] * [[궁합(영화)|궁합]] - 김분례 == 참고 문서 == * [[경빈 박씨(장조)|경빈 박씨]] * [[경종(조선)|경종]] * [[경종실록]] * [[경희궁]] * [[사도세자]] * [[선의왕후]] * [[숙빈 최씨]] * [[숙의 문씨]] * [[숙종(조선)|숙종]] * [[숙종실록]] * [[영빈 이씨]] * [[영조]] * [[영조실록]] * [[인원왕후]] * [[임오화변]] * [[정빈 이씨]] *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 [[정조(조선)|정조]] * [[정조실록]] * [[조선/왕사]] * [[창경궁]] * [[창경궁 문정전|창경궁 휘령전]] * [[창덕궁]] * [[한중록]] * [[서오릉|홍릉]] * [[화완옹주]] * [[효순왕후]] * [[효장세자]] * [[혜경궁 홍씨]] [[분류:조선의 왕비]] [[분류:대구 서씨]] [[분류:1693년 출생]] [[분류:1757년 사망]][[분류:종로구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