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전혜린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2> '''{{{+1 전혜린}}}[br]田惠麟''' || ||<-2> [[파일:external/tv.pstatic.net/20070522161206197127572.jpg|width=100%]] || ||<|2> '''출생''' ||[[1934년]] [[1월 1일]][* 음력 1933년 11월 16일] || ||[[평안남도]] [[순천시(평안남도)|순천군]] || ||<|2> '''사망''' ||[[1965년]] [[1월 11일]] (향년 31세)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남학동 25번지 자택 || || '''학력''' ||[[경기여자고등학교]] {{{-2 (졸업)}}}[br][[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2 (독어독문학[* 법학과에서 전과하였다.] / 학사)}}}[br][[뮌헨대학교]] {{{-2 (독문학 / 학사)}}} || [목차][clearfix] == 개요 == >그러나 가끔 나는 내 피부 속에서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 좁은 껍질 속에 감금되어 있는 정신의 중량이 확 느껴지고 파괴 의욕을 느낄 때가 있다. 무언지 일격이 내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을 기다리는 그런 때다. '''이 반 의식 상태를 활짝 갠 의식 상태로 바꿔주고 이 반 소망된 생활을 열렬히 소망된 생으로 만들 무엇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타날 것을 기다린다.''' 요술 지팡이를 기다리듯. >---- >저서 「목마른 계절」 中 > '''불꽃처럼 사랑하고 사랑하며 죽어가리'''[* 정공채가 쓴 전혜린의 평전 '아! 전혜린'의 부제다. 그녀의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잘 묘사했다.] [[대한민국]]의 [[번역가]], 수필가, 독문학자. == 생애 == 1934년 1월 1일 [[평안남도]] [[순천시(평안남도)|순천군]]에서 [[조선총독부]]의 고급 관료였던 아버지 [[전봉덕]][*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일제강점기 친일 경찰로 활동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서도 경찰 고위직을 역임했고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경찰을 떠나 헌병 장교로 임관했다.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헌병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진상 은폐를 주도했다.]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순해(金珣海)[*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화준(金化俊)의 딸이다.] 사이의 1남 7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골수 친일파인 덕분에 유복한 가정에서 생활할 수 있었으며, 이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대한민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독일 유학까지 가는 밑바탕이 되었다. 1952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55년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로 전과하고 [[독일]]로 유학하였다. 1959년 [[뮌헨 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이 학교 조교로 근무하였다. 유학 중이던 1955년 [[가톨릭]]에 귀의하여 막달레나(Magdalena)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한국에서부터 만나던 [[김철수(1933)|김철수]]와 독일에서 결혼해 딸 김정화를 낳았다.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은 당시 기준으로 대단한 특권이지만 생활비는 원활하게 조달되지 않았던 것 같다.[* 동란이 막 끝나고 도독한 것은 당시 대한민국 형편은 물론 여행자유화도 실행되지 않았던 실정에서 어지간한 권력과 재력이 바탕되지 않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막대한 특권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이웃나라인 일본으로의 유학도 상당한 재화가 소비되는 일이었는데, 당시에 직항편도 없었던 독일로의 유학은 그 자체로 기득권임을 증명하는 징표였다.] 전혜린의 독일 시절 기록에는 번역으로 돈을 버는 과정에서 피로와 불안이 들어있다. 돈이 완전히 떨어져 일생에서 처음으로 일주일 동안 물배를 채우며 굶어봤다는 내용도 있다. 1959년 5월 귀국하여 [[경기여자고등학교]], [[공주사범대학]] [[독어교육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이화여자대학교]]의 교강사를 거쳤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강사를 지낼 때에는 [[서울대학교]] 독문학 동아리인 독우회를 지도하였다. 1964년 김철수와 이혼 후[* 김철수는 후에 재혼하였는데 재혼한 부인이 평생 동안 전혜린의 제사를 지냈고 자신이 낳은 자식들도 제사에 참석하게 했다고 한다.] [[성균관대학교]] 독문학과 조교수가 된다. 1965년 1월 11일 오전 9시경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남학동 25번지 자택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501110032920702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01-11&officeId=00032&pageNo=7&printNo=5916&publishType=00020|별세했다]]. 향년 31세. 그녀의 시신은 [[서대문구]] [[홍제동(서울)|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되었고 유해는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독일]] 유학 시절부터 [[헤르만 헤세]] 등 독일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였다. 사후 유고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발간되었다. == 평가 == 요절한 천재를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전혜린이 번역한 독일 소설들은 당시 호평을 받으며 '전혜린 신드롬'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사후 출판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필집 중 하나로 여겨진다. 순수와 진실을 추구하고 정신적 자유를 갈망하던 전혜린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당대의 새로운 여성상으로 평가받는 한편, 완벽한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지성적인 현대 여성의 심리로서 분석된다. == 저서 ==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66년 *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1968년 * 《목마른 계절》. 1994년 === 역서 === * [[프랑수아즈 사강]] 《어떤 미소》(Un certain sourire). 1956년 * 에른스트 슈나벨 《안네 프랑크 : 한 소녀의 걸어온 길》(Anne Frank). 1958년 *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 1959년 * [[에리히 캐스트너]] 《파비안》(Fabian). 1960년 * 루이제 린저 《생의 한 가운데》(Mitte des Lebens). 1961년 * H.게스턴 《에밀리에》. 1963년 * W.막시모프 《그래도 인간은 산다》. 1963년 * [[하인리히 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Und Sagte kein Einziges Wort). 1964년 * 하인리히 노바크 《태양병》. 1965년 == 여담 ==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시절 독우회라는 독서모임을 이끌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노태우 정권 시절 실세로 꼽혔던 [[박철언]]이 독우회의 맴버였다고 한다. * 2004년에 방영한 EBS 드라마 <[[명동백작]]>과 <[[지금도 마로니에는]]>에서 전혜린의 일생을 간략히 다룬다. 배우는 [[이재은(1980)|이재은]]. [[분류:대한민국의 문학 교수]][[분류:한국 여성 작가]][[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분류:실향민]][[분류:1934년 출생]][[분류:1965년 사망]][[분류:약물로 죽은 인물]][[분류:순천시(평안남도) 출신 인물]][[분류:담양 전씨]][[분류:이화여자대학교 재직]][[분류:국립공주대학교 재직]][[분류:성균관대학교 재직]][[분류:서울대학교 재직]][[분류:경기여자고등학교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뮌헨 대학교 출신]]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