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보)]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국보|{{{#f39100 대한민국 국보 제138호}}}]]''' || ||<-2> {{{#fff {{{+1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br]{{{-1 傳 高靈 金冠 및 裝身具 一括}}}}}}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 || '''{{{#fff 분류}}}''' || 유물 / 생활공예 / 금속공예 / 장신구 || || '''{{{#fff 수량/면적}}}''' || 일괄 || || '''{{{#fff 지정 연도}}}''' || [[1971년]] [[12월 21일]] || || '''{{{#fff 제작 시기}}}''' || [[삼국시대]] || [[파일: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4.jpg|width=540]] [[파일: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2.jpg]] [[파일: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3.jpg]] [목차] == 개요 == 傳 高靈 金冠 및 裝身具 一括.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6세기]] 경 [[대가야]] 시대의 [[황금]] [[금관]] 및 황금 장식품들.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 중이며, [[대한민국의 국보|대한민국 국보]] [[틀:대한민국의 국보|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 내용 == [[파일: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1.jpg]] 6세기 무렵 [[대가야]] 왕의 금관으로 추정되는 금관과 황금 장식품들이다. 원래는 1961년 경에 불법 [[도굴]]꾼들이 몰래 고분을 도굴하다 발견한 것으로, 이후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이 구입하여 [[삼성미술관 리움]]에 전시해놓은 것이다. || [youtube(69617dtZzjY)] || 이렇게 불법적인 루트로 유통된 도굴품이었던 관계로 이 금관의 정확한 출토지는 한동안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그저 고령군 지역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하여 전(傳) 자를 앞에 붙여서 전 고령 출토 금관이라 불러왔다. 그러다 2020년 1월에 [[북구(대구광역시)|대구]] [[경북대학교]] 박천수 교수와 [[대구한의대]] 박물관 등이 연구한 결과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중 하나인 45호분에서 도굴된 것을 최종 확인하였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5&aid=0000784381|SBS 뉴스 : 삼성그룹 창업주가 아꼈던 가야금관, 출처 밝혀졌다]] 45호분 1호 석실 한가운데에서 도굴꾼이 쓸어가면서도 빠뜨리고 간 아주 작은 두 종류의 금제 장식이 나왔는데 국보로 지정된 이 금관의 부속 금구와 똑같았던 것이다. 금관과 함께 나온 금귀걸이 또한 이번에 새로 발견된 45호분 1호 석실 출토 금귀걸이와 [[쌍둥이]]처럼 닮아있어 이 금관 및 장신구들의 출처가 고령 지산동 45호분이라는 것을 더욱 강력히 증명하였다. 이 금관의 발견은 [[대구광역시]] 현풍도굴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61년 조직된 전문 도굴꾼들이 대구 현풍읍 유가면의 고분들을 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에 걸쳐 조직적으로 도굴하여 소중한 [[한국]]의 고분 유물 400여 점을 빼돌려 해외에 팔아먹고 있었는데 문화재 관리국과 정부에서는 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다가 [[경찰]]이 겨우 발견하여 잡아들인 사건이었다. 이들을 잡은 후 급히 취조한 결과 대구 외에도 고령, 성주 지역의 고분들도 지속적으로 매우 많이 털어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때 1961년 10월 경 고령에서 순금관을 파냈고 이를 110만원에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팔아치웠다는 자백도 받아내었다. 이 자백이 사실이라면 당시는 아직 경주 [[신라왕릉]]을 본격적으로 발굴조사하기 전으로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나온 최초로 금관이어서 놀란 언론은 이 내용을 일제히 대서특필했다. 이후 도굴꾼들은 [[정의구현|유죄를 선고받고 콩밥을 먹으러 들어갔으나]], 이 장물을 취득한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병철 회장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에 격분한 사람들에 의해 훗날 2006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재차 이 문제가 불거졌지만 역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병철 회장은 세인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한 듯 금관을 일절 공개하지 않다가 1971년 4월 국립박물관(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호암컬렉션이 특별 전시될 때 처음 금관을 세상에 선보였고 그해 말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금관은 높이 11.5㎝, 밑지름 20.7㎝로 머리에 두르는 넓은 띠 위에 4개의 풀꽃 장식이 꽂혀 있다. 띠에는 아래위에 점을 찍었으며 원형 금판을 달아 장식했는데, 금관에 붙어있는 것 외에도 다양한 부속 금제 장식품들이 함께 보관 중이지만 불법적인 도굴 과정으로 인해 이 장식품들이 금관의 어느 부분에 어떤 모양으로 붙어 있었는지는 파악할 수 없는 상태다. 한국 [[금관]]을 대표하는 신라금관들이 나뭇가지와 사슴뿔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면, 가야금관은 풀잎이나 꽃잎을 주 모티브로 잡고 있어서 가야 문화만의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출토된 고대 금관은 총 14개로, 그 중 10개(혹 11개)가 한국에서 출토되어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최대의 금관 보유국으로 명성이 높다.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12775/1|동아일보 : 가야 포함한 삼국시대는 세계 유일의 금관 공동체]] 이 10개의 한국 금관 중 [[신라]]의 것이 6개(아직 학계 검증이 안 된 [[호림 금관]]을 추가할 시 7개), [[가야]]의 것이 3개, [[고구려]]의 것이 1개로, 가야는 신라 다음으로 우수한 고대 황금 문명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이 금관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오구라 컬렉션]]의 일환으로 [[일본]]에 불법 유출된 상태인 창녕 금관과 함께 가야의 세련된 공예술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71년 12월 21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 외부 링크 ==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0755&cid=46657&categoryId=46657|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820667&cid=46620&categoryId=46620|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가야금관]]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69941&cid=40942&categoryId=33062|두산백과 :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577340&cid=51931&categoryId=54256|향토문화전자대전 :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 [[https://en.wikipedia.org/wiki/Crown_of_Gaya|영어 위키백과 : Crown of Gaya]] * [[https://ko.wikipedia.org/wiki/전_고령_금관_및_장신구_일괄|한국어 위키백과 :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틀:대한민국의 국보|제138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1380000,11&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傳 高靈 金冠 및 裝身具 一括)]] >경상북도 고령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가야의 금관과 부속 금제품이다. 금관은 높이 11.5㎝, 밑지름 20.7㎝로 머리에 두르는 넓은 띠 위에 4개의 풀꽃 모양 장식이 꽂혀 있는 모습이다. > >넓은 띠에는 아래위에 점을 찍었으며, 원형 금판을 달아 장식하였다. 드문드문 굽은 옥이 달려 있으나 출토된 뒤에 단 것이라고 한다. 풀꽃 모양 장식은 대칭되는 네 곳에 금실로 고정시켰는데 드문드문 원형 금판을 달았다. 부속 금제품은 원형, 은행형, 꽃형, 곡옥 외에도 금환(金環), 드리개(금제수식)들이 섞여 있어서, 부속품들이 금관의 어느 부분에 어떤 모양으로 붙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금관의 풀꽃 모양 장식은 나주 독무덤(옹관묘) 출토의 백제 금동관과 같은 형식이지만, 경주에서 출토되는 금관과는 다른 형식이라 흥미롭다. 또한 이 금관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금관 장식인데, 끝을 펜촉처럼 다듬은 4개의 풀꽃 모양 장식을 세우고, 그 양 옆에 뿔처럼 튀어나오게 만든 돌기를 달아 굽은 옥을 걸 수 있게 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분류:대한민국의 국보]][[분류:가야의 금제유물]][[분류: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분류:서울특별시의 문화재]][[분류:고령군의 문화재]][[분류:금관]]캡챠되돌리기